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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달빛 아래에서 춤추는 그들2023-01-26
문라이트

내 침대 옆의 벽에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의 포스터가 걸려있다. 나는 포스터에 담긴 그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쳐다보곤 한다. 내가 방에 붙일 포스터를 고르는 기준은 영화 속 인물의 삶이 얼마나 반영되어 있느냐, 영화의 색감을 어느 정도로 표현하느냐에 달렸다. 이 중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인 문라이트의 포스터는 아주 오래도록 바라본다. 문라이트의 포스터 속에는 주인공 샤이론의 (길다면) 긴 일생이 담겨있다. 문라이트는 3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Little, Chiron, Black 이다. 이는 성장 과정에서 샤이론이 불리는 이름이기도 한데, 이 파트 별 나이가 한 얼굴에 모두 담긴 작품이 바로 문라이트의 포스터이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가장 가까운 그 포스터를 가만 보고 있자면 한 사람의 일생을 내 두 눈으로 지켜보는 듯한 기묘한 감정이 든다. 마치 트루먼 쇼를 시청하는 사람들을 시청하는 우리의 시선을 자각할 때의 기분이다. 이제 이 포스터가 내게 얼마나 큰 입체감을 가졌는지는 그만 설명해도 될 것 같다.

나는 어째서 문라이트를 이토록 사랑하는가?’ 이 영화를 본 그 순간부터 쭉 가져온 의문이다. 어째서 이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나는가?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빈민가의 흑인이자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사람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 그리고 다 커버린 현재(청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어렸을 때 아주 작고 왜소하고 말이 없던 아이는 커서 무서운 사람이 되었다. 힘이 없고 자신감이 부족해 계속 괴롭힘을 당하던 소년은 이제 존재만으로도 다른 사람의 가를 누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는 아주 작은 스위치만으로도 인생의 나침반이 다른 쪽으로 굴러가는 우리네 인생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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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론은 소수자를 대변한다. 흑인이며, 마약을 판매하는 마초 집단으로 가득 찬 마을에서 사는 게이 소년이다. 이러한 샤이론의 이질감은 본인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취약함으로 받아들여져서, 그는 학창 시절 내내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혼란과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고독한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그 고독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 노력한 이들이 바로 후안과 테레사이다. 만약 나에게도 후안과 테레사가 있었다면 내 유년 시절은 훨씬 애정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한 아이가 자라려면 온 동네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후안에게 묻고 싶다. 후안, 당신의 애정과 다정의 끝은 왜 보이질 않는가? 왜 당신 같은 사람이 내 인생에는 나타나지 않았지?

 

달빛을 쫓아 뛰어다니는구나. 달빛 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너도 파랗구나. 이제 널 그렇게 불러야겠다. 블루.”

 

이 대사는 후안이 어렸을 적 한 할머니에게 들은 후 샤이론에게 전해준 위로의 말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말이기도 하다. 문라이트는 위의 대사를 그대로 나타내듯 블루색상을 곳곳에 설치했다. , 책가방, 모자, , 바다, , 교복, 가구 등에서 옅은 블루와 진한 블루, 오션 블루, 청록색을 품은 블루를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블루 색상을 억압에서 벗어나 해방으로 다가가려는 시도라고 보았다. 답답한 마음을 파도가 모두 쓸어가 버리고 마침내 애정 하는 사람이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를 표현한다고 보았다. 샤이론의 첫사랑이자 마지막을 함께 마무리하는 케빈 역시 첫 등장과 마지막 등장 때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색이 블루라는 이야기를 했던가? 나에게 블루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저녁과 밤 사이 그 어디쯤에 속하는 하늘의 색이다. 나를 당장이라도 밑으로 끌고 내려갈 것 같다가도, 나를 그 위에 띄워 평생을 유랑하게 만들 것만 같은 바다의 색이다. 나는 늘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나를 상상한다. 가끔은 심해 속의 물결이 날 저 밑바닥으로 붙잡아 내려갈 때도 있고, 어쩔 땐 귀까지만 물속에 담은 채 바다의 먹먹한 소리를 듣기도 한다. 샤이론의 블루와 나의 블루는 제법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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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후안이 어린 샤이론에게 수영을 가르쳐 주는 장면이다. 후안은 샤이론에게 끝까지 놓지 않겠다며 바닷물에 샤이론을 띄워준 다음, 처음으로 헤엄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어린 샤이론은 서툰 헤엄 짓을 통해 물살을 가르며 바다를 헤집는다. 해방이다. 나는 이때 후안이 샤이론에게 해방을 가르쳐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케빈과 샤이론이 중간에 바다에서 만나는 장면에서는 바람이 얼굴을 스치면 세상이 잠깐 멈춘 기분이야. 세상이 다 고요해져.’ ‘그럼 내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리지라며 말을 주고받는다. 이때 샤이론은 난 너무 많이 울어서 어쩔 땐 눈물로 변해버릴 것 같아.’라고 하는데, 나는 이 장면을 두 번째로 좋아한다. 그의 눈물과 나의 눈물을 합친다면 바다만큼의 크기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했다. 정을 나눈 그들의 흔적은 바닷가의 모래 속에 고요히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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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해방의 장면을 말하자면 마지막 장면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근육을 키우고 마약을 팔지만 조금도 자라지 못했다. 아직도 어머니가 나오는 악몽을 꾸고, 케빈이 애칭으로 부르던 블랙(B)으로 활동하며, 케빈의 전화를 받고 설렘을 느낀다. 그리고 마침내, 케빈과 다시 만나 그를 위한 요리를 받고, 노래를 듣고, 마지막 장면에서 케빈과 온정을 나누며 비로소 어른이 된다. 샤이론 속에 남아있던 아주 어린아이가 바다 앞에 서서 푸르른 달빛을 받으며 뒤를 돌아본다. 위로받는다.

 

위로받는다.

 

그게 아마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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