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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미래의 범죄들 -이데올로기와 주술을 넘어서-2024-01-24

영화의 배경은 특정되지 않은 근미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간들은 통증에 대한 역치가 높아져서 웬만한 통증은 불쾌함으로 감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사람들은 통증을 성적자극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외상 및 과도한 신체적 변형 과정을 행위예술의 한 장르로 즐기기까지 한다.

 

A woman in a white shirt examines a man in black on a reclining chair

 

 

주인공인 사울 텐서는 그 행위예술가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이다. 사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몸 안에 불필요한 장기가 자라고 있다. 이는 영화에서 조기진화증후군으로 불린다. 사울은 그로 인해 신체적인 고통을 항시 겪고, 몸의 컨디션을 체크해주는 침대에서 잠들며, 섭식조차 어려워 취식의자라는 소화 기구에 의지해서 고통스럽게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 장기가 어느 정도 이상의 크기로 자라면, 국립 장기 등록소에 가서 장기에 문신을 한 뒤, 그의 퍼포먼스 파트너인 외과의사 카프리스와 장기를 적출하는 공연을 한다. 카프리스는 사울을 마취시키지 않은 채, 부검장비인 샤크로 사울의 배를 갈라 장기를 적출한다. 이 징그러운 퍼포먼스를 관중들은 경이롭고 아름답게 느끼는 듯하다. 공연을 마치고 며칠 뒤, 사울은 클리넥이라는 행위예술가의 공연을 다녀오는 길에 랭 도트리스와 마주친다. 그는 자신의 아들인 브렉켄을 부검하는 퍼포먼스를 해달라고 사울에게 요청한다. 브렉켄은 랭의 전처인 듀나로부터 살해당했다. 브레켄은 플라스틱을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기에, 그 이질성을 견딜 수 없는 모친으로부터 살해되었다. 한편, 랭은 플라스틱 취식 집단의 수장으로서 정부로부터 견제 받고 있다. 그 집단은 브레켄같이 선천적으로 플라스틱을 먹도록 태어난 체질이 아니었기 때문에 구성원 모두가 인위적으로 플라스틱을 취식 가능하도록 몸을 변형했고, 플라스틱 폐기물을 초코바와 유사한 형태로 만들어서 섭취한다.

 

A woman (Kristen Stewart) kisses a man in black (Viggo Mortensen) next to the blinds

 

 

, 이 집단은 무기물을 취식 가능한 유기물로써 소화하고, 섭취한 무기물을 유기물로 배설한다. 이들은 기후위기라는 사태의 대응으로써 플라스틱을 섭취할 수 있는 몸으로 스스로를 개조한 것이다. 이들의 신체 개조는 인간종을 교란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호모사피엔스와 유사하지만 호모사피엔스라고 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안정된 범주로 분류관리하는 공권력의 입장에서 인간범주를 교란하는 이들의 존재는 눈엣 가시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취식하고 배포하는 플라스틱 초코바를 보통의 사람들이 먹으면 파란 피를 흘리면서 죽는다. 플라스틱합성수지 음식을 이용한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범죄는 비교적 사소한 문제다. 이 새로운 존재들이 자신들의 정당성과 보편성을 요구하고 나설 때, 체제는 사회구성원들에게 이들도 우리와 동일한 사람으로 인정하자.’는 사회적 합의를 해야 한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냐?’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여성유색인종을 같은 사람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냐라는 문제로 많은 사회들이 기회비용을 치르었고, 지금도 그 갈등들을 겪어내고 있다.

 

A beautiful woman with facial disfigurements smiles at another woman

 

 

다시 말해 이들의 존재는 잠정적으로 시스템과 사회 구성원들의 감수성을 수정하도록 요구하는 존재, 사회적 혼란을 예견하는 정치적 존재들이기에, 정부는 범죄수사국으로 이들을 견제감시해왔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선천적으로 플라스틱을 소화시킬 수 있는 브레켄의 존재가 중요했다. 브레켄은 플라스틱을 소화하는 새로운 인간종의 등장을 보편화하는 것이고, 이는 곧 플라스틱취식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상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레켄을 견딜 수 없었던 모친이 브레켄을 살해했기에, 랭은 행위예술가로서 이 분야의 정점에 있는 사울에게 아들의 부검퍼포먼스를 요청하여 플라스틱취식의 정당성을 알리려 한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예술가에게 접근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공권력을 대변하는 형사도 사울에게 접근하여 플라스틱취식자들을 염탐해달라고 한다. 다시 말해 랭은 플라스틱취식이라는 범주를 기존 사회에 새겨 넣기 위해 예술을 이용하려는 것이고, 형사는 사회적 관성을 위해 예술가에게 접근한 것이다. 사울은 기본적으로는 형사의 끄나풀이지만, 서서히 랭의 입장에 공감하게 된다.

 

A man covered in ears, with his eyes and lips sown shut

 

영화는 4가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사울의 장기 적출 눈과 입을 바늘로 꿰맨 뒤, 춤을 추는 클리넥 얼굴에 특정한 무늬의 외상을 입히는 오딘 브레켄의 부검. 은 불필요한 장기를 제거함으로써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온다는 메시지를 퍼포먼스에 덧입히고 있다. 그러나 메시지는 아무래도 좋다. 이 퍼포먼스가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은 내장기관의 스펙타클이고 장기 적출의 에로틱한 뉘앙스다. 사울의 장기에 문신을 새기는 팀린은 이를 섹스로 인지한다. 장기적출은 역치가 높아진 인간에게 걸맞는 새로운 형식의 섹스인 것이다. 은 당장은 특이하고 과도한 광경 같지만, 사실상 구시대적 예술이다. 전신에 귀를 붙인 댄서가 빠른 리듬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 전부이다. 은 역치가 높아진 인간에게 소구하는 신체변형예술이다. 통증에 대한 역치가 높아진 인간에게는 통제된 방식으로 신체에 외상을 입히는 일조차 즐길 만한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는 브레켄의 괴이한 장기에 당황하여 신의 징벌과 같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카프리스의 퇴행적 퍼포먼스다. ~은 현실의 관객 입장에선 전위적으로 보이지만, 영화 속 사회에서는 감각적 쾌락에 복무할 뿐이며, 은 기존 체제를 대변하는 퍼포먼스로 전락한다. 반면 랭은 몸 속 장기의 진화를 장기적출로 해소할 게 아니라 플라스틱을 먹으라고 권한다. 플라스틱을 먹을 수 있는 신체로 거듭나고 있는데 계속 일반식을 먹으니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울은 망설인다. 기존의 인간종에서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Viggo Mortensen spills what most disturbed him in Crimes of the Future

 

영화는 인류가 플라스틱 사용을 멈출 수 없다고 보는 듯하며, 일견, 인간이 진화에 준하는 대가를 치뤄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 듯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취식의자에서 플라스틱바를 먹는 사울, 자신의 진화를 장기 적출 퍼포먼스로 환원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사울을 보여준다. 사울은 취식의자에 의존한 섭식을 관둔 뒤, 플라스틱바를 먹고 눈물을 흘린다. 이는 분명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기쁨이며 카메라의 시선에 비꼬는 뉘앙스는 없다. 그 동안 사울을 고통스럽게 했던 장기는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플라스틱을 먹으라는 신체 내의 외침이었던 것이다. 위에서 진화를 대가라고, 징벌처럼 말했지만 이 영화는 현재의 플라스틱 소비를 중단하라고 촉구하지 않는다. 인류의 욕구 자체가 높아져 있는 상황에서 욕구를 절제하는 것은 퇴행적 몸짓이다. 그런 도덕적 훈계는 브레켄의 부검 중에 당황하여 예술을 다시금 제의적 기능에 복무시키는, 새로운 종을 부정하는 카프리스의 퍼포먼스와 궤를 같이 한다.

 

Crimes of the Future: King of Body Horror - InsideHook

 

사울의 장기적출은 전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상술했듯이 감각적 쾌락이 그 본질이다. 그리고 장기 생성이 예술적 창조라면 그 장기를 적출하는 것은 창조성의 삭제인 것이고, 기존 인간종에 머무르려는 것이며 신체 내 변화를 부정하는 것이다. 잘못된 건 장기가 아니라 그 장기의 생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체제, 진화를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하며 증후군 따위로 명명하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이다. 진화는 잘못에 대한 대가나 질병이 아니라 그저 환경에 맞게 신체가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전까지 사울은 신체 내 장기 생성을 예술적 창조성의 작동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기존에 없던 범주를 예술로 표현하고 주장하는, 예술의 정치화에 대한 알레고리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울은 예술을 밀어붙여 정치로 나아가게 하는, 기존의 범주들을 교란하는 존재이며, 크로넨버그 감독 자신이 필모그래피로 보여준 예술=정치에 대한 은유적 존재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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