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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버닝> - ‘하루키에서 포크너로: 퇴행인가, 재장전인가'2018-05-23
버닝 스틸컷_

 

<버닝> - ‘하루키에서 포크너로: 퇴행인가, 재장전인가'

 
*일시 : 2018. 05.23(수) 19:00
*장소 : 영화의전당 소극장
*강연 :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 (철학박사)
*주제 :  ‘하루키에서 포크너로: 퇴행인가, 재장전인가'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영화를 기본적으로 사회성이 강한 미스터리 형식으로 청년작가의 성장을 그린 영화다. 이렇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사회성이 강하고, 그런 한편 미스테리 형식이지만 내용적으로 청년작가의 성장을 보여주죠. 그래서 이 영화는 사회성 코드로도 읽을 수 있지만 예술론, 이창동 감독이 생각하는 예술에 대한 생각이 굉장히 대등하게 들어있는 그런 영화다라는 점을 보았습니다.

 

영화가 기본적인 톤,  빛과 색채가 굉장히 어렴풋합니다. 어렴풋한 빛은 영화가 기본적으로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라고 종수가 말을 한 것처럼. 이 어렴풋한 빛은 세상에 대한 인식자체도 어렴풋하다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을 텐데 이 영화 제작 자체가 계절이 가을에서 시작해서 겨울에 마무리 되는 것이라 햇빛이 갈수록 어두워집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하루 중에 언제인지를 가늠을 못할 정도로 햇빛이 어둡죠. 그런 느낌이 이 영화 전반에서 깔고 있는 세상이 수수께끼라는 것과 맞물려 있는 것 같고요. 시간적으로도 동틀 무렵과 해질 무렵이 영화의 절반정도를 차지한다고 할 정도로, 대체적으로 그런 두 시간대가 중요하면서, 어둡고 희미한 빛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렴풋한 빛’이 ‘빛의 인식’이라고 볼 때, 그래도 뭔가 인식을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어렴풋하다 고해서 우리가 좌절 할 것이 아니라 이창동 감독은 그런 것들을 추적해 나가려고 한 것 같아요. 여기서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영화제목이 굉장히 떠올랐습니다.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라는 60년대 작품 그리고 <겨울 빛>, 북부 스웨덴 쪽이니까 겨울 빛은 대단히 어렴풋하죠. 불투명한 유리를 통과한 것 같은 빛이 오늘 영화에서도 많이 보였는데, 왼쪽 장면은 해미 집에 하루에 한번 잠시 유리창에 햇빛과 함께 남산전망대가 비친 모습이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인식이 들어오는 부분입니다. 오른쪽은 벤 집에 있던 그림이죠. 모네가 그린 루앙 대성당 그림을 변형시켜서 미술상을 받았잖아요. 루앙 대성당은 건축 양식적으로는 불꽃양식이라고 표현하는데 사실 재미있는 것은 루앙 대성당에서 화형당해서 죽은 사람이 잔 다르크죠. 루앙 대성당 앞에서 잔다르크가 화형 당했으니까 오늘 영화 <버닝>과도 무관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희미한 회색빛이 영화의 기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는 생각 해 볼 수 있습니다.

 

크게 보면 하루키 원작의 소설에 포크너를 결합했다고 저는 요약해 봅니다.

하루키 원작의 설정이라는 것이 뭔가 하면 저는 인물 설정에 있다고 생각을 해요. 어떻게 보면 가난한 남자와 여자 그리고 잘 사는 남자 삼각관계 속에서 가난한 여자가 잘 사는 남자에의 유혹에 넘어가 살해당하니까 가난한 남자가 복수를 했다고 하면 굉장히 뻔한 설정으로 보일 수 있는데, 사실은 하루키의 인물 설정에서 새로운 것은 현실과 비현실 관계 속에서 세 사람의 관계를 설정했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의식하는 남자 ‘종수’, 현실을 의식하지 않는 여자, 혹은 현실을 의식하고 싶어 하지 않는 여자 ‘해미’, 현실과 비현실을 함께 의식하려고 하는 남자 ‘벤’ 동시 존재라는 이야기인데요. 동시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나중에 할 텐데, 동시 존재라는 것이 오늘 이야기의 핵심 적인 개념 중 하나입니다. 현실과 비현실관계속에서 인물을 설정하는 것은 하루키 설정이다.

 

그리고 서사 구조에 있어서도 영화 2시간 가까이 하루키의 원작 소설과도 가깝죠. 서사구조에서 기본적으로 주인공 ‘종수’가 두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관찰하고, 회상하는 거기에다가 이창동 감독이 덧붙인 것이, 주인공의 내적인 변화와 외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덧붙였는데 이 뒷부분 변화와 처벌은 제가 볼 때는 윌리엄 포크너의 요소가 들어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결과로 이 두 가지가 함께 만나는 데, 버물려 주는 개념이 동시 존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결과로 다층구조적인 이야기들이 복잡하게 나왔다. 사회성, 심리, 예술에 대한 생각들인데 오늘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연관된 소설로 먼저 큰 줄기를 잡아보면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1983,1990)에다가 영화 <버닝> 사이에 포크너가 들어갔다고 말씀 드렸는데. 오늘 제가 말씀 드리고자하는 것은 하루키 원작 <헛간을 태우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포크너의 (1939)가 아니라 일반적 상식과 다르게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라고 말씀드리고 싶고, 그리고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와 함께 <태엽 감는 새>(1995)라는 작품이 오늘 영화에서 많은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또한 포크너의 작품[Barn Burning](1939)와 [That Evening Sun](1931)이 더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키의 인물 설정은 오늘 영화에서 그대로 활용이 되는데, 이것은 현실·비현실 관계 속에서 설정이 됩니다. 왼쪽 사진이 그런 부분을 굉장히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종수’는 말하자면 현실을 의식한다는 게 말하자면 현실의 고통 속에서 압도되어서, 우리가 가위눌린다고 하죠. 가위에 눌려서 파묻혀 있는 상태입니다. 어떤 새로운 상상 같은 것을 잘 못하는 상황인거죠. 사실은 자기가 작가 지망생이라고 하는데, 영화 초반부에 볼 때는 작가로서의 자질이 상당히 떨어지는 겁니다. 왜 그런가하면 ‘해미’가 현실·비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전혀 감을 못 잡습니다. ‘종수’가 어떤 캐릭터인가 하면, 초반 부분에는 굉장히 감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나중에 ‘벤’이 비닐하우스 태운다고 할 때도 그것을 직설적으로 듣잖아요. 그래서 직접 매일 체크하죠, 작가로서는 굉장히 함양이 모자란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작가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다고 봐야한다는 겁니다. 이 친구가 나중에 작가로 성장하는 모습, 그리고 끝내 성장하고 만다는 겁니다. 현실에 너무 압도되어서 다른 상상적인 것을 못하고, 사상의 세계를 못 누립니다.

 

그런데 비해서 ‘해미’는 귤껍질 까기 팬터마임을 보여주듯이, 귤껍질 까기에서 핵심은 환상을 진짜처럼 의식한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잊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현실을 잊는 것, 환상에 들어가는 것을 종수는 감을 못 잡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조금 전에도 언급했던 잉마르 베리만 감독이 그런 말을 많이 하죠. ‘환상을 가지고 놀지 못하면 예술가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 관계 속에서 어떻게 예술가가 진정한 예술을 만드느냐 인데, 이 점이 오늘 영화에서 중요한 테마라고 말씀드립니다. ‘해미’라는 사람은 ‘종수’보다 훨씬 예술적인 사람이에요. 문제는 현실세계에 대한 피안으로 정신세계 자체가 저 너머로 가버렸습니다. 그것을 잠자는 것으로 잘 표현하는 것 같아요. 잠잔다는 것은 현실이 잊고 싶을 때 자버리는 거예요. ‘벤’은 어떠한가하면 사실은 예술의 성격을 떠나서 가장 예술적인 사람은 ‘벤’인거죠. 현실과 비현실을 자유롭게 왔다갔다 잘하는 사람인거죠. 이것을 현실·비현실 관계라고 하는데 문제는 그자체로는 좋은 예술은 안 나와요. 다만 굉장히 예술적이기 때문에 소설가라는 이유로, 그만큼 ‘종수’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도 털어놓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종수’ ‘해미’ ‘벤’이 하품을 하는 장면이 굉장히 이창동 감독이 잘 했다고 생각해요. 원작 소설에 없는 부분인데, 하품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것은 잠을 자지 않는 것이거든요. 잠을 자지 않으면서 이 현실을 떠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지겨울 때 하품하면서 정신은 여기를 떠나는데 육체는 머물고 있는 거죠. 잔다는 것은 완전히 가버리는 것이지만 동시 존재를 이야기하는데 하품은 굉장히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하루키 원작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데, 두 가지 판본이 있다는 말씀을 드릴게요. 이게 왜 중요한가하면 1983년에 발표한 것이 원작이고요, 그러고 나서 1990년에 본인이 스스로 전집을 발간하는데, 전집에는 단편소설을 고쳐서 새로 싣습니다. 거기서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요. 90년도에 들어서서 전집을 만들 때, 포크너 요소를 삭제한다는 겁니다. 오른쪽 보시면 저 대목이죠. 종수가 공항에 마중을 나갔잖아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비행기는 네 시간이나 연착했고, 그 동안 나는 커피숍에서 83년에는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을 읽었다.’라고 되어있는데, 90년도에는 저 부분을 빼버리고 ‘주간지 세 권을 읽었다.’로 바꾸는 겁니다. 말 그대로 포크너를 삭제한 거죠. 왜 그랬을까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다르게 말하면 이창동 감독이 영화에서 포크너 이야기를 많이 했잖아요. 벤도 나중에 카페에서 포크너를 읽고 있고, 종수가 ‘나는 포크너 같은 작가가 되고 싶어요.’ ‘나는 포크너를 보면 나를 보는 것 같아요.’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반면, 하루키 입장에서는 포크너를 벗어나려고 했던 거예요. 내 작품하고 포크너와 연관 시키지 마라. 젊은 사람들이 제목 때문에 오해를 하니까 아예 그것을 없애버리려고 포크너라는 글자를 떼어버린 거예요. 실컷 떼어놨는데 이창동 감독이 도로집어 넣은 겁니다. 하루키 감독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어쨌건 이창동 감독은 하루키가 떼어 놓은 것을 도로 넣었다.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떼는 대신에 무엇이 상대적으로 강조가 되는가하면,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성격이 더 강조화됩니다. 왜냐하면 포크너의 이름도 있었는데 빠지니까 더 그 성격이 강조된다는 것인데, 하루키와 피츠 제럴드의 연관성, <위대한 개츠비>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하루키의 인생책이 세 권인데 그 중에 하나가 <위대한 개츠비>라고 했고, 2009년에 직접 번역을 하기도 했죠. 우리나라에도 김영하 작가가 따라서 번역을 하기도 했고요. <위대한 개츠비>와 오늘 작품 또한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그리고 1974년도 영화 또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인물 설정에 있어서 <위대한 개츠비> 구도를 많이 가져온 것 같아요. <위대한 개츠비>는 잘 아시다시피 개츠비라는 사람이 1차 대전 전에 데이지라는 사람과 약혼을 했었는데 1차 대전 참전 후 돌아와 보니 데이지가 부자와 결혼을 해버린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랬더니 그걸 알게 된 개츠비가 데이지 강 맞은편에 궁궐 같은 집을 지어서 매일 파티를 열고 데이지가 들어오길 기다리죠. 그러다가 만나는 장면이죠. 그때 중재를 선 사람이 가운데 보이는 닉이라는 사람이죠. 저 세 사람의 관계가 <위대한 개츠비> 구조가 오늘 영화와 원작 소설과 굉장히 비슷하다. 특히 데이지와 그녀의 성격을 비교해 보면, 그녀라고 하면 하루키 소설에서는 사람이름이 안 나오고 나, 그, 그녀로 밖에 안 나오거든요. 그녀는 진부한 현실보다는 화려한 환상에 끌리는 인물인데, 말하자면 개츠비는 환상을 만드는 사람이고, 데이지는 환상에 끌리는 사람이고 잘 웁니다. 그리고 닉은 그것을 관찰하고 회상하는 존재로 나옵니다.

 

위대한 개츠비 스틸컷

 

사진을 보시면 개츠비가 영국에서 수입한 아름다운 실크셔츠를 한 더미 꺼내서 데이지에게 하나씩 던집니다. 그걸 보다가 갑자기 셔츠에 얼굴을 묻고 데이지가 엉엉 웁니다. 개츠비가 놀라서 왜 우냐고 물어보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는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셔츠가 아름답다고 운다는 것은 보통경지가 아닙니다. 데이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인데요. 나중에 말씀 드리겠지만 해미는 그것과 좀 다르게 이창동 감독이 해석을 한 것 같아요. 그녀는 귤 판토마임에서 보여줬듯이 환상에 끌리는 사람, 그리고 잠을 자는 사람이다. 지금 보시는 사진은 1974년도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인데, 이 영화에서 새벽과 해지는 장면이 굉장히 많아요. 오늘 영화와 장면적으로 무관하지는 않은 겁니다.

 

 태엽 감는 새 표지

 

그리고 하루키 소설 중에서 <태엽 감는 새>(1995)라는 작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영화에서 여러 가지 상징들이 나오는데 이 상징들이 상당수가 이 작품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하루키에서는 고양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 영화에서도 등장합니다. 설정은 이렇죠. 아내가 집을 나가요. 나가면서 하는 말이 ‘집 나간 고양이를 찾아주지 않으면, 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이야기가 시작되죠. 잃어버린 고양이 테마가 여기에서도 나오고요, 이상한 전화 혹은 연결되지 않는 전화 또한 이 소설에도 나옵니다. 그리고 우물이라는 테마가 여기서 중요하게 나옵니다. 그 우물은 어떤 우물이었는가. 물이 없는 마른 우물 이야기가 여기서 나오고, 거기에서 더 들어가면 다른 세계의 통로로 설정이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우물에는 하루에 한번 10초에서 20초 정도 빛이 비칩니다. 그 설정도 이 소설에 나옵니다. 왼쪽 사진은 영화판 표지인데요, 우물에 빛이 들어오는 게 보이시죠. 눈 좋으신 분들은 보이실지 모르겠는데 야구배트가 있습니다. <태엽 감는 새>에서는 아내가 해미처럼 다른 세계로 가버린 거예요. 되돌아오려고 하는 것을 막는 존재가 굉장히 권력자에 정치가인 오빠인데요. 그녀를 돌려받기 위해 남자가 야구배트로 때려죽입니다. 그런 설정이 <버닝>과 상징적인 소재 차원에서 굉장히 비슷한 것이 많다는 것을 곁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윌리엄 포크너입니다. 오른쪽 사진은 을 1985년에 미국에서 TV로 제작을 했었거든요. 남자 누군지 아시겠어요? ‘토미 리 존스’입니다. 저럴 때가 있었습니다. 턱이 참 강한 배우이죠. 그리고 앉아있는 꼬마가 주인공이죠. 오늘 영화에 법정, 재판장면이 나오는데요. 그것은 명백하게 포크너 작품에서 나온 것이다. 포크너 작품에서 법정이라는 것은 중요하거든요. 하루키 원작에서는 법정 요소가 없었는데, 이것은 명백하게 포크너 요소가 들어온 것이죠. 주제는 19세기 말 미국 남부 미시시피 주를 전전하는 가난한 농민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토미 리 존스가 아버지인데요, 소작인을 착취하는 지주를 늘 증오하고, 지주의 헛간을 계속해서 태우면서 태울 때마다 그 마을에서 쫓겨나 옮겨 다니는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 미국의 헛간이라는 것은요, 소작인이 1년 동안 농사지은 것을 모아놓는 곳으로 대형 창고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헛간 같은 것이 아니어서, 그걸 태우면 재산 손실이 엄청난 것이죠.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해 주시고, 그 아버지를 한편으로는 좋아하고 존경하면서 아버지가 너무 폭력이 지나치지 않은가, 너무 자의적으로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하면서 사회적인 양심 때문에 갈등하는 아들의 모습이 그려진 영화입니다. 결론은 꼬마 녀석이 아버지를 말리다가 안 되니까 지주 집에 가서 일러바칩니다. 그래놓고 아버지가 올까봐 달아나는데 뒤에서 총소리가 두 방 들리죠.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은 거라고 짐작이 되는 겁니다. 간접적으로 아버지를 죽이는 거죠. 굉장히 파격적인 이야기입니다.

 

that evening sun 표지

 

그리고 또 하나 [That Evening Sun](1931)이라는 작품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 소설 제목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하면 흑인 연가 ‘St. Louis Blues’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 주여. 오 주님이여. 전 저 저녁 해가 너무 싫어요. 저녁놀이 너무 싫어요.’이러는데 흑인적인 블루스 연가에서는 전형적으로 저녁놀, 석양이 죽음과 심판을 상징하는 것 이라고 해서 두려움과 공포의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 사진을 보시면 흑인여성 낸시가 주인공인데, 보시면 배가 볼록합니다. 백인남자와의 성매매로 인해 임신을 하게 되어서 낸시의 흑인 남편이 자기를 죽이러 올 거라고 계속 공포에 떠는 이야기입니다.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해만 지고 나면 어디 숨어 있다가 내 남편이 나를 죽이러 올 거야’라며 스릴 넘치는 전개가 돋보입니다. 결말에 진짜 죽는지 어떤지, 낸시가 괜히 잘못 상상해서 두려워 한 건지 근거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이야기도 없습니다. 거기에서 꼬마 백인 가족이 돌봐줍니다. 꼬마가 낸시와 대화를 하는데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꼬마가 ‘낸시, 자요?’라고 물었습니다. 낸시가 뭐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응’ 아니면 ‘아니’라는 대답이었을 텐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 목소리는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사라지는지도 모를 이상한 소리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치 사라진 것 같았다. 세상에서.‘라고 꼬마가 이야기를 하면서 회상합니다. ‘그녀는 마치 계단 위에서 나를 볼 때, 눈빛이 너무나 강요되었는데, 그 눈빛이 나의 눈에 각인이 된 것 같았다. 마치 태양을 보다가 눈을 감아도 태양의 잔상이 눈에 남는 것처럼.’이라는 대사가 있어요. 그것처럼 낸시라는 존재는 사회에서 사라지고 지워지는 잔상과 같은 존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늘 해미의 성격이 이창동 감독 영화에서는 감독이 이 소설을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상통하는 것 같다. 이때 ‘저녁놀’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낸시의 상황을 무력한 마음을 표현하는 요소이다. 그리고 지는 해는 낸시의 운명, 현실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백인에게 지배되는 상황을 나타낸 것을 해미에게도 대입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해미가 춤을 추는 장면에서 마일스 데이비스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에 맞춰 춤을 추는데, 더군다나 벤이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를 트는 건 이상하잖아요. 본인이 그렇게 하겠다는 식의 음악을요. 트럼펫 연주에 맞춰 해미가 춤에 가까운 판토마임을 하죠. 저때 아마도 이창동 감독은 해미가 죽는건 무섭지만 사라지고 싶다고 하잖아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하죠. 이것은 일종의 죽음 충동이라고 볼 수 있는데, 죽음 충동이라는 것을 <버닝>은 현실에서 무력해지는 행위가 소멸을 바랄 수 밖에 없는 내몰린 그런 상황이라고 해석을 한 것 같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와는 조금 다르죠. 소멸을 바라도록 그런 상황으로 내몰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포크너 요소를 정리해 보면 헛간을 중심으로 해서 보면 헛간의 주제에서는 사회 계층 갈등이 굉장히 중요하게 나타났다는 것과 폭력적인 아버지가 나옵니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다는 주제, 그리고 대가족이라는 것은 미국 남부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대가족에서 이탈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와 소신을 위해서 아들이 아버지를 처벌하는 거죠. 그런데 오늘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벤을 처벌하는 쪽으로 옮아갔죠. 그런 것들이 달라진 점인데, 여기서 나타나는 고독한 개인과 죄의식이 중요한 테마이고, 그런 과정에서 아이의 내적성장이 중요한데, 포크너 요소에서 다른 것들은 전부다 해체하고, 분해하고, 우회시켰는데, 내적성장하나는 가져간 것 같아요.

 

그리고 포크너의 대체적인 경향은 남부 전통을 통해 자기 확신에 빠진 현실감이 떨어지는 그런 사람, 그리고 오늘 영화에서 무능한 아버지, 무관심한 어머니, 상처받는 자식이라는 테마도 그대로 반영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과 곁들여서 포크너는 남부사회를 엄청 비판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현대 메마른 사회에 비해서는 나은 점이 있었던가하는 향수를 보여서 이중적인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그런 작품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루키는 왜 포크너를 버렸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시대가 바뀌었다는 거죠. 그럼 어떻게 시대가 바뀌었는가. 하루키 문학 세계라는 것은 토지와 연관된 산업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토지라고 말하는 어떤 지역에서 넘어가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라는 거죠. 그리고 강한 개성의 아버지는 이제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극복해야할 아버지 이런 문제가 별로 없는 시대로 돌입했다는 것이죠. 포스트모던 시대죠. 오히려 그런 시공간을 벗어난 공간이고, 아주 도시적이고 살벌하며 고독한 인간관계가 드러나는 것이 하루키의 문학세계이죠. 그러니까 포크너 요소와 본인의 요소를 혼동하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포크너와 무관하다고 해도 안 믿어주니까 아예 지워 버렸다는 거죠.

 

 아버지에 비해서는 어머니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대라는 것인데, 극복할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와 내밀한 결합이 있고, 아버지가 부재하니까 아버지라는 존재는 정신분석적으로 금지의 존재, 현실의 존재, 처벌의 존재인데, 아버지가 없으니까 말하자면 버릇없는 아이들이 많이 나오는 거죠.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처벌을 안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여자에 대한 폭력을 마구잡이로 하는 부분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가부장적 폭력이 분명히 존재하죠. 가부장 적인 아버지가 존재할 때, 또 다른 폭력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여자에 대한 폭력과 폭력에 대한 대상이 계속 있어야하니 집착을 하는 것인데, 우리가 가부장적 폭력에 익숙해도 이런 개념은 낯설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히치콕 <사이코>(1960)의 주인공인데요. 이 작품에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개념이 없는데,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미성숙한 아들이 어머니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가 마음에 끌리는 여자만 있으면 스스로 여자를 처벌해 버립니다. 이때 연쇄살인이라는 것은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정과 같은 것이죠. 재미있는 것이 폭력이 가부장적 폭력만 생각하는데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없을 때, 또 다른 폭력이 있는 거예요. 하루키가 생각하는 문학세계 속의 폭력이라는 것은 이런 종류인 겁니다. <사이코>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남자 주인공 안소니 퍼킨스가 사람을 연쇄살인 할 때마다 어떻게 해요. 늪에 다 빠뜨려서 증거를 다 가라 앉힙니다. 그 장면이 오늘 영화에서 오른쪽 아래의 두 개를 비교해 보시면 왼쪽이 <사이코>이고 오른쪽이 <버닝>에서 저수지에 찾아가는 장면입니다. 두 장면이 굉장히 비슷합니다. 이창동 감독은 저 장면을 통해서 이런 요소들을 관객들이 보고 생각하라고 던져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영화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는 사이코패스의 종류이다. 주장은 안하지만 그런 것들을 암시하죠. 굉장히 섬세하게 암시를 하는 게 벤과 어머니의 부딪힘이라는 것을 이창동 감독이 섬세하게 잡아내어 보여줍니다. 처음에 애인하고 통화하는 것 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예. 예, 엄마’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인 것을 알았죠.

 

영화는 포크너를 도입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제가 ‘퇴행이냐? 재장전이냐?’ 이런 제목을 달았던 이유가 지금 이 시대에 포크너를 이야기 한다는 것이 퇴행으로 보여 질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퇴행이냐, 아니냐. 아니라면 이창동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이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영화는 포크너를 재도입했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도입해야하는가 할 때 핵심적인 요소를 왜곡시키고, 분산시키고, 어지럽게 했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너무 많은 것들을 넣어서 관객들을 괴롭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포크너의 핵심적인 ‘흙, 땀, 냄새’ 이런 것들을 많이 표현합니다. ‘종수’는 일을 하고 언제나 젖어있죠. 그리고 냄새나는 공간에 있고요. 아버지는 2차 산업의 핵심인 사우디에서 건설업을 하고 있잖아요. 그것이 지금 어떤 3차 서비스 산업 또는 4차 산업에 비해서 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그런 세계로 가야한다는 주장도 일체 없습니다. 문화적인 옹호도 없으며, 이런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 또한 없습니다. 그리고 포크너의 에서 핵심적인 계기인 같은 산업 안에서 예를 들어 소작인과 지주의 갈등 이런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산업 간의 갈등은 있는가 하면, 종수로 따지고 보면 3차 산업, 4차 산업 종사자에요. 왜냐하면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고, 유통업 하는 친구거든요. 4차 산업과 연결되는 3차 산업이거든요. 그러니까 ‘종수’와 ‘벤’의 갈등은 산업간 갈등도 아니에요. 말하자면 애정문제 말고는 없는 겁니다. 포크너 요소를 가지고 왔다고는 하지만 이런 부분은 굉장히 미약하고 분산되어있다. 다만, 빈부갈등은 있는데, 빈부갈등을 이유로 칼로 그렇게 여러 번 찌를 만큼의 설득력은 있는가 생각하면 그것은 좀 미약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시골집이라는 것도 트라우마 공간이라는 계기는 가져오는데, 이것이 파주라고 설정이 되면서 남북 분단의 상징 지역이기 때문에 그 의미들이 여러 가지로 분산이 되어버립니다. 일반적인 농촌으로 잡았더라면 그쪽으로 집중이 되는데, 파주라고 하니까 언제나 대남방송이 들리고 태극기가 꽂혀 있는 곳으로 설정하면서 분산이 되어버린 겁니다.

 

결론적으로는 내적생성밖에 없다는 이야기인데, 조금 더 말씀 드리면 폭력적인 아버지 그리고 종수의 트라우마라는 계기도 도입을 했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부자갈등이나 아버지 살해는 핵심적인 계기가 아닙니다. 다르게 말해서 상징적인 아버지가 사회악을 처벌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세계에 대항해서 하루키 세상에 대립각을 세우면서 포크너를 넣었다면 상징적인 강한 아버지가 나오는가 했더니 또 그것도 아닙니다. 히치콕의 <로프>(1948) 같은 작품에서는 그렇죠. 다만 종수는 아버지의 폭력성을 그대로 물려받고, 원래 포크너 원작에서는 아버지의 폭력성이 싫어서 벗어나려는 친구였는데, 이 영화에서는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폭력성을 물려받고 그것을 벤에게 투사를 한다. 더군다나 아버지의 칼을 물려받아서 말이죠. 주인공이 격렬한 환상을 가져가면서 내적생산을 한다는 것은 포크너 적인 요소거든요. 하루키에게는 없는 요소이고요. 하루키는 그렇게 격정적인 요소와 광적인 환상에 사로잡혀서 사람이 변하는 그런 이야기는 없거든요. 그냥 싸늘한 또라이들만 나오거든요. 격정적인 요소와 광적인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은 포크너 적인 존재로 내적 생산적인 요소는 분명히 가져가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고 생각하는 포크너 적인 요소는 거의 분산되고 왜곡되는 것이죠.

 
영화는 ‘동시존재’ 속 출구를 모색하며 포크너의 ‘내적 성장’이라는 계기를 알리려고 한다고 봅니다. 동시존재라는 개념이 잠깐 나왔었죠. 하루키의 여러 소설에 나오는데, 한마디로 현실과 비현실의 관계를 말합니다. 현실과 비현실이라는 것이 완전히 경계가 분리된 것이 아니고, 같이 공존한다는 이야기가 동시존재인데요. 중요한 것은 동시존재의 밸런스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현실이 있으면 비현실이 존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굉장히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상상이나 환상이 없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메마르고 재미가 없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현실이 있는 만큼 비현실도 존재해야한다는 밸런스가 필요하다. 이 정도는 우리가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 말을 벤과 같은 연쇄살인범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말을 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살인을 하고 책임질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한 게 아니고 다른 세상에 있는 제가 한 거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죽이고 나서, ‘내가 죽인 게 아냐, 또 다른 대상의 내가 죽인거야.’라는 도피하고, 회피하며 자기의 죄를 정당화 시키는 수단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면죄를 받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죠. 원작 소설에서 ‘그’라는 사람이 ‘동시 존재가 없다면 우리가 살아갈 수 없어요.’ 라고 이야기 합니다. 일명 진실이다. 왜냐하면 잊어버리고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어야 죄책감이 없이 잘 살아갈 수 있거든요. 이게 왔다갔다 잘해야합니다. 왔다갔다를 잘 하는 존재가 벤 인겁니다. 밸런스라는 것은 현실과 비현실을 왔다갔다 잘하는 그 균형을 잘 잡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원래 공부 잘 하는 사람이 할 때 딱 공부하고 놀 때 잘 놀고 그렇잖아요. 벤 같은 엘리트들이 스위치가 잘 되는 겁니다. 대마초를 그렇게 많이 피우는데도 마약중독이 안 된 것 같거든요. 착한 애들이 잘 빠져들죠. 그래서 예술이 안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인 겁니다.

 

동시존재라는 것은 범죄적 측면에서 보면 이 세상에서 죄책감을 덜려면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야하는데, <헛간을 태운다>에서는 그럼 무엇이겠는가.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존재가 헛간인거에요. 그러니까 뭘 태워버려야 하는 거예요. 다르게 말하면 내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게 되거나, 어떤 여자에 애정을 가지거나 집착을 하게 되면 내가 다른 세상으로 자유롭게 털어버리고 넘어가려 할 때 맘이 걸리거나 죄책감이 생겨서 못가는 거예요. 몸이 무거워 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걸 태워버리는 겁니다. 두 달 주기로 태운다고 했잖아요. 마음이 좀 다잡아졌는가하면 스스로 다 태워버립니다. 그래야 스스로가 자유로워지니까요. 조금 지나면 이 사람이 나에게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된다 싶으니까 죽이는 겁니다. 헛간이라는 것이 일종의 죄책감이 될 수 있는 요소, 버리고 갈 때 죄책감이 될 만한 요소를 태우고 가는 것이죠. 다르게 이야기 하면, 영화 <히트>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1급 범죄자의 자격이 무엇인가 하니 30초 만에 딱 풀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기억나시죠? 위험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30초 만에 모든 것을 털고 갈 수 있어야한다. 만약에 30초 만에 털고 갈 자신이 없는 거라면 절대로 거기에 맘을 주지마라. 그런데 그 영화는 결국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실패하잖아요. 바로 이 비닐하우스 혹은 헛간이라는 것은 영화 <히트>에서 드니로가 말하는 ‘30초 만에 털고 나갈 자신이 없는 것’이라 볼 수 있고 이것을 주기적으로 태운다고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이 현실에서 비현실로 자유롭게 살 수 있거든요. 이것이 동시존재의 문제다. 이것이 4차 산업형 또라이 사고방식이고요. 상식적으로 동시존재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요소에요. 그게 없으면 예술이라는 것도 없고, 상상의 세계라는 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예술가라면 저것을 다르게 생각해야한다.

 

이창동 감독은 그것을 어떻게 다르게 생각해볼까 고민한 것 같아요. 말하자면 왔다갔다 스위치해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환상이 현실에 영향을 줄 수 없고, 현실이 환상의 세계에 영향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이것으로 ‘땡’하면 딱 털고 가고,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것이 정말 말 그대로 현실과 환상이 한 덩어리로 응축이 되어야한다.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서 해미처럼 다른 세상으로 가버리면 예술은 없습니다. 자기 혼자만 만드는 예술은 우리가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추상적이고 전달이 안 됩니다. 그리고 종수처럼 현실에만 갇혀 있는 사람도 예술을 못 만듭니다. 현실에 억눌려져 있으면 상상을 못하거든요. 그 문제는 현실의 고통을 끌어안고 직면하면서도 그 속에서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게 하는 그런 예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현실 생각하다가 환상생각하며 기분 풀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게 벤이라면 그런 것도 예술은 안 되는 겁니다. 오락이죠, 오락. 현실의 고통을 끌어안으면서도 그 속에서도 또 다른 상상을 하게 만드는 것, 즉 현실과 비현실이 스위치 되어 왔다갔다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환상이 한 덩어리로 크리스털처럼 결정이 되어 있는 상황, 이런 작품을 만들면 그게 진짜 예술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는 거죠. 그랬을 때 현실과 비현실의 크리스털이미지라는 것이 바로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만든 영화 철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이것은 현실이면서도 환상인 것 같은 이미지가 하나로 응결되어있는 것을 말하죠. 이것이 우리가 조금 전에 본 영화에서 비닐하우스와 같은 것이죠.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죠. 그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니까 내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영화감독이라면 당연히 동시존재에 관심이 가죠. 영화를 보면서 나는 부산에 있고 영화 장면에 파주가 나오면 파주에 있고. 영화라는 것 자체가 동시존재이거든요. 그렇잖아요. 영화라는 것이 동시존재이고, 예술이라는 것이 동시존재입니다. 그것 못하면 작품이 아니죠. 영화는 파주 보여주는데 우리가 계속 부산을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잘못된 것이죠. 나는 부산에 몸이 있는데 동시에 파주에 있다. 이게 작품이고 동시존재이죠. 영화를 본다는 것은 동시존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스크린이라는 것은 물질이고 빛밖에 없는 것인데, 물질이고 빛이잖아요. 여기서 우리는 환상을 보잖아요. 이것이 환상인데 다르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현실과 비현실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죠.

 

형식과 내용의 측면이 있는데, 형식은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크리스털과 자기반영인데 자기 반영은 간단한 거예요. 내가 영화를 만드는 모습이 이야기 속에서 보이면 자기 반영이죠. 형식은 베리만의 <페르소나>(1966)과 상당히 닮은 요소가 있어요. 둘 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소년이 주인공이죠. 어린아이가 어떤 인물의 전화를 받고 깨어납니다. 엄마가 애기를 버리고 갔잖아요. 왼쪽 사진은 엄마의 영상을 이미지로 만지는 모습이죠, 환상이지만 현실이고 애기한테도 현실이고, 우리가 옆에서 보면 스크린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저것이 영화의 세계이고 소년이 감독인 겁니다. 어머니 이미지라는 것이 감독이 만들려고 한 영화의 세계다. 그리워하는 사람을 만들려고 한 것이 영화의 목표다. 이런 것들이 베리만에게 굉장히 중요한 주제인데, 오늘 영화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입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엄마를 찾고 해미를 찾습니다. 그리고 자기 반영성이라는 것은 현실과 비현실이 크리스털(결정)되면서 작품의 모습과 작품 자체가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는 것이 자기 반영성인데요.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별 이야기가 아닙니다. 종수가 작가라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는데, 특히 저는 어느 정도 사건의 전모를 종수 나름대로 파악을 하고 나서 해미집에 가서 혼자서 자기 위로를 하잖아요. 자기 위로를 하는데 거기에서 해미가 없는데, 성행위를 하는 것처럼 장면이 나오잖아요. 이게 바로 위의 장면의 세계이죠. 해미가 없다는 것을 생각 안하는 것이 귤껍질 까기의 핵심인데, 해미가 없다는 것을 잊었잖아요. 지금 종수가 한 단계 들어간 겁니다. 순간 해미가 없다는 것을 잊고 작가의 세계를 생성해서 들어간 것이죠. 그때부터 뒷이야기에 대해 저는 개인적으로 종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종수가 살해했다 해봤자 영화이야기인데, 저는 어쨌건 종수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술가가 만들어 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해미가 없다는 것을 잊었고, 시계방향으로 보시면 저 친구가 또 따각따각 소리가 나는데 봤더니 타자를 치고 있었죠. 작품을 쓰고 있었던 겁니다. 딱 한번 나오죠. 이때부터 뒤에는 종수의 창작일 수 있고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는 종수가 자위행위를 할 때도 꼭 남산타워를 보면서 하더라고요. 남산타워라는 것이 남근, 팔루스 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작가가 되어가면서 부터는 남산타워를 안보고, 해미가 없는데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는데요. 그때 자위행위를 할 때 주머니에 무언가가 들었는지 열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금속성의 딸각딸각 소리가 나요. 하도 자위행위를 많이 해서 또 그런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타자를 치고 있었던 거죠. 거기에서 이창동 감독이 유머 혹은 예술로 넣은 것이 아닌가 창작이 자위행위라는 그런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내용적으로는 정신분석 개념이나 상징이 굉장히 많이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분석학에서 섬뜩함(Unheimlich)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지속하는 것에서 갑자기 낯선 것을 볼 때 굉장히 섬뜩한 느낌이 듭니다. 이 영화 속에서 보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집이라는 것도 섬뜩한 트라우마를 줬고, 그리고 해미도 못 알아보잖아요. 성형 밑에 깔린 진짜 얼굴을 보았을 때 섬뜩한 느낌이 들죠. 그래서 부모집이라는 것은 되돌아가기 싫은 트라우마의 집이라는 겁니다. 이창동 감독이 많이 바뀌었죠. 박하사탕에서는 나 다시 돌아 갈래라고 하지만, 이제 돌아가기 싫어 인거죠. 종수가 해미와 연관된 중요한 것들을 다 망각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저렇게 기억을 못 할 수가 있는가. 저런 것들은 오른쪽 보시면 아버지가 어머니 옷을 태우게 하는데 이것은 굉장히 폭력적인 것이거든요. 아이가 엄마가 떠난 것도 고통스러운데, 직접 어머니 옷을 다 태우라고 하는 것은 아이와 엄마의 근원적인 관계를 스스로 잘라라는 것이거든요. 굉장히 폭력적인 것이고, 어머니를 금지시킨 것이죠. 그 뒤로 해미의 기억이 없다는 것은 해미의 기억이 금지되고 억압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해미가 우물에 빠졌다는게 사실이고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우물이 있었잖아요. 그런 중요한 사건을 기억을 못한다는 것은 해미에게서 종수가 어머니 같은 존재를 느꼈기 때문에 인 것 같고, ‘못 생겼어!’라고 이야기 하는 것도 종수 성격이 못되고 독한 사람이 아닌데, 여자에게 느닷없이 가서 못생겼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있을 때 그렇게 하거든요.

 

마지막으로 내면 고백이 나타나는 데, 이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세 사람은 소통을 바랐다. 대마초를 피면서 상호 고백을 하는데, 저는 서로 구원 요청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벤도 작가니까 관심이 가서 이야기를 했다고 하지만, 지금 자기도 범죄행위를 하는데 들킬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도 이런 생활이 힘든 겁니다. 저렇게 잘 사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불행하겠느냐 하지만 자기도 나름대로 삶이 매끄럽지 못한 겁니다. 어떻게 보면 죽여 달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런데 감이 떨어진 종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진짜 비닐하우스만 찾으러 다녔잖아요. 그리고 해미도 마찬가지죠. ‘나무가 많이 컸네.’ 이건 뭡니까? 어릴 때 보던 나무가 많이 컸는데 따져보면 어릴 때부터 종수를 좋아한 거잖아요. 그런데 감이 떨어졌는지, 혹은 어머니의 같은 존재가 느껴지면 스스로 금지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기억을 하나도 못하죠. 다시 ‘나무 많이 컸네, 어릴 때 기억이 나 그땐 내가 너를 좋아했던 기억이 나.’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도 창녀라고 욕을 하잖아요. 그때의 사실은 해미가 굉장히 표정이 바뀌면서 차에 타는데 그게 마지막 얼굴이잖아요.

 

그날 밤에 꾸는 꿈이 비닐하우스가 타는 꿈이잖아요. 그래서 벤과 종수를 비교해보면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비유잖아요. 그에 비해 종수는 엄마 옷을 태우는 꿈이라는 것은 굉장히 직설적인 것이고 아직 상징 단계에 못 들어간 겁니다. 상징적인 대체로 승화되지 못했는데 그것을 벤을 만나고서 한 단계 더 들어간 것 같아요. 해미를 통해서는 또 다른 단계에 들어갔다면, 벤을 통해서 또 다른 동시 존재의 세계로 들어간 상징과 환상의 개념에 대해 접하게 되는 것이고, 예술가로 성장하는 것이죠. 엄마 옷을 태우던 아이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꿈으로 바뀌는 거죠. Fort-Da 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실을 던지면 나한테 사라졌다가 실을 당기면실패가 돌아오잖아요. 한 살 먹은 아이가 이런 놀이를 한데요. 엄마가 나를 떠난 것이 굉장히 고통스럽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던질 때 안 보일 때는 엄마가 나를 떠날 때는 굉장히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상황인데, 내가 실패를 던지니까 ‘내가 엄마를 보냈어.’라고 그야 말로 자기 위로를 하는 겁니다. 능동적인 주어가 되어서요. 그리고 다시 실패를 당기면 엄마가 오잖아요. 엄마가 오면 ‘내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엄마를 다시 부를 수 있어.’ 라고 주어가 들어가는 겁니다. 그 고통을 상징적인 것으로 대체해 나가면서 그 고통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거든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고통의 극복이라는 것은 없거든요. 왜냐하면 하나의 고통에서 견딜만한 고통으로 대체하는 것이 치료거든요. 완전하게 제로로 치료하는 것은 없고,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잘 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 것을 제일 잘하는 사람이 예술가예요. 그런데 종수는 아직 그게 안 되었던 겁니다.

 

엄마 옷을 태우는 트라우마가 꿈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는 것은 이게 대체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날 대체가 이루어 진 것이죠. ‘엄마가 나를 떠난 게 아니야, 내가 엄마를 보낸 거야.’하며 애기가 계속 이상한 웃음을 짓잖아요. 더구나 그날 저녁에 뭐했어요? 해미보고 창녀라고 했죠. 그렇게 상상조작, 상징조작, 환상조작이 되니까 예술이 되는 것으로서 결국 현실/환상의 크리스털을 통해서 욕망이 각성되고 살아야 되겠다는 삶의 의지가 각성이 됩니다. 거기에서 나타나는 현실과 비현실이 하나의 덩어리로서 현실의 고통을 그대로 직면하면서 예술로 승화되는 그런 영화, 그런 예술이 가지는 현실의 파괴적인 힘이 가지는 원시적인 힘 이것이 예술이 가야할 길이 아닐까 하고 이창동 감독이 보는 것 같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포크너 요소이고요.

 

결론은 원작 소설이 상실감으로 끝난다면 영화에서는 상당히 저항적인 결말을 가졌는데, 다른 사회적·내면적 예술론이 있을 텐데 예술론에 있어서는 현실 고통의 진실을 추구하고 그 위에서 상상력과 미의 세계를 세우는 것이 예술이라고 이창동 감독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읽었고요. 다만 그것이 좀 더 분명하게 전달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너무 미묘하게 많은 내용들로 이야기가 되어서 양을 줄였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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