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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거장 3인전' <오고가며>: 정한석 영화평론가 2016-06-18(토)  - 시네마테크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

 

6/18 <오고 가며>

 

* 강  연 : 정한석 영화평론가

* 장  소 :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전체 강연중 <오고가며>에 관한 일부만 요약되어있습니다.) 


 

오고 가며 01

 

몬테이로는 자신이 주연을 맡은 몇몇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오고 가며>도 그 중 한 편인데요. 특히 잘 알려져 있는 것들로는 주앙 드 데우스 삼부작이라고 부르는, 그러니까 신의 삼부작이라고 부르는 세 편의 영화가 있습니다. <노란 집의 추억><신의 코미디>와 그리고 <신의 결혼식>까지를 주앙 드 데우스 삼부작이라고 부릅니다. 영화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몬테이로는 자신이 연기를 하는 것과 동시에 몬테이로라는 캐릭터는 굉장한 호색한으로 출연을 하고 있죠. 그리고 이 영화 <오고 가며>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주앙 드 데우스 삼부작과 이 <오고 가며>를 연이어서 붙여 놓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고요. 특히 몬테이로의 이 작품은 다들 아시겠지만, 그의 유작입니다. 대부분의 유작들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쩌다 유작이 되는 경우들이 많죠. 하지만 이 작품은 몬테이로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시한부 인생이 미리 예정된 상태에서 이 작품이 유작이 될 것이란 걸 알고 만든, 의식하고 만든 작품입니다. 그래서 아마 지금과 같은 마지막 숏으로 영화를 맺음 하겠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네 편의 영화와 함께 한 편을 더 감안을 한다면, <존 웨인의 히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몬테이로의 어떤 자기 초상적인 영화라고까지 말하긴 어렵겠습니다만, 그래도 이 영화까지 포함을 하자면 이 다섯 편의 영화, <노란 집의 추억><신의 코미디>, <신의 결혼식>, <존 웨인의 히프><오고 가며>까지를 몬테이로의 자기 초상화 연작이라고 저는 부르고 싶고, 아마도 제가 오늘 드리는 이야기들은 몬테이로의 나머지 영화에 해당되는 이야기들이기보다는 지금 제가 앞서 거론한 이 다섯 편에 해당되는 이야기로 국한해서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머지 영화들에 대해서는 또 다른 문제들이 형성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저는 들기 때문입니다.

 

오고 가며 02

 

저는 이 영화에서 버스 타고 가는 장면을 다 좋아합니다. 제목 자체도 <오고 가며>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설명하기는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카메라를 정면으로 놓고,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과 거기 끼어 있는 몬테이로, 즉 주앙 부부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죠. 그런데 버스가 움직이고, 이 노인이 그 안에서 때때로는 어쩌지 못하고 때때로는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버스 안에 있을 때, 그 장면이 심정적으로 좋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활동적으로도 참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 장면을 봤습니다. 버스 안에서 몬테이로의 행동 중에 하나가 저는 사실 인상 깊은 게 하나 있는데요. 보신 분들도 있으시겠습니다만, 버스에만 들어가면 이 사람이 창밖으로 시선을 위로 올린 채 뭔가를 찾는 것처럼 자꾸 행동을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뭔가 쫓아오는 건 아닌가, 혹은 뭐가 저기 있는 건 아닌가 허공을 쳐다보는 경우가 있거든요. 시선이 버스에만 들어가면 항상 위를 쳐다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행동과, 이런 동작과 마지막 장면을 연결시킨다는 것이 다소 과잉적인 해석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어떤 느낌이 들었냐면 버스 장면을 좋아하는 저의 입장에서 마지막 장면에 이 영화에서 거의가 아니죠.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앙 부부의 머리 위에서 다프네라고 하는 여인이, 실재하는 여인일지 환상일지 모르는 그 여인이 부감 숏으로 잡혀서 이 사람의 머리 위에 나타났을 때, 그것이 이 사람이 보는 마지막이거나 혹은 꿈꾸는 마지막일 터인데, 그 위치가 이 사람이 버스 안에서 봤던 시선과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나타났던 여인의 위치가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저에게는 생동적인 감동 같은 것을 줬던 것 같습니다. 혹시 이 장면을 다시 보시게 된다면 그런 부분도 한 번 생각해보시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고요. 또 하나는 조금 더 대책 없는 즐거움인데요. 버스 안에서 합창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무슨 노래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포르투갈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친근한 노래겠죠. 그 장면에서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주앙 부부가 거기 맞춰서 약간 허약한 몸으로 박자를 맞춰가며 춤을 추고 있을 때, 그 장면이 상당히 좋다고 생각할 때에 공원에서 잠깐 어두워지면서 벤치에 앉아 쉬지 않습니까. 그러고 나서 다시 버스를 타고 있는 주앙 부부의 모습이 있는데, 그때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꼬마 악사가 등장을 합니다. 사람들과 낮에 합창을 했던 그 버스 안에서 모두가 사라지고 주앙 부부 혼자 남아 있고, 다른 꼬마 악사가 남아서 한 사람은 음악을 연주하고 한 사람은 음악을 듣고 있을 때, 굉장히 먹먹할 정도로 그 장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봐도 그렇고 가끔씩 다시 보아도 그 장면이 좋게 느껴집니다. 혹은 이 영화에서 음악이 흐르는 장면이 저한테는 전부 좋습니다. 


제 생각에는 주앙 드 데우스 삼부작과 이 <오고 가며>를 연이어서 붙여 놓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고요. 특히 몬테이로의 이 작품은 다들 아시겠지만, 그의 유작입니다. 대부분의 유작들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쩌다 유작이 되는 경우들이 많죠. 하지만 이 작품은 몬테이로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시한부 인생이 미리 예정된 상태에서 이 작품이 유작이 될 것이란 걸 알고 만든, 의식하고 만든 작품입니다. 그래서 아마 지금과 같은 마지막 숏으로 영화를 맺음 하겠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네 편의 영화와 함께 한 편을 더 감안을 한다면, <존 웨인의 히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몬테이로의 어떤 자기 초상적인 영화라고까지 말하긴 어렵겠습니다만, 그래도 이 영화까지 포함을 하자면 이 다섯 편의 영화, <노란 집의 추억><신의 코미디>, <신의 결혼식>, <존 웨인의 히프><오고 가며>까지를 몬테이로의 자기 초상화 연작이라고 저는 부르고 싶고, 아마도 제가 오늘 드리는 이야기들은 몬테이로의 나머지 영화에 해당되는 이야기들이기보다는 지금 제가 앞서 거론한 이 다섯 편에 해당되는 이야기로 국한해서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머지 영화들에 대해서는 또 다른 문제들이 형성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저는 들기 때문입니다.

  

오고 가며 03

 

예를 들면, 첫 번째 가정부가 들어왔을 때, ‘벨라차오라는 노래가 나오면서 주앙 부부가 바닥을 열심히 닦고 있지 않습니까. 그 노래에 대해서 이 영화를 처음 볼 땐 저도 무슨 노랜지 잘 몰랐고요. 파르티잔 찬가라고 하는데요. 그러니까 파시즘이나 나치즘에 대해서 저항하던 유격대들, 우리말로 하면 빨치산 투쟁가라고 합니다. 빨치산 투쟁가가 흐르고 거기 맞춰서 빨치산 투쟁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주앙 부부가 바닥을 열심히 닦고 있을 때, 그 허약한 몸의 익살스러운 몸짓, 하지만 그에 비해서는 굉장히 진지한 자세가 주는 어떤 양가적인 느낌이 저한테 큰 인상을 줬던 것 같습니다. <노란 집의 추억>이란 영화를 보시면 아마 바닥을 닦는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실 겁니다. 주앙 드 데우스가 어머니를 찾아가게 되는 장면이 있는데요. 그 장면 이후에 바닥을 닦는 장면을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은데, 몬테이로의 영화에서 많은 부분이 희극화되고 있습니다만. 어머니에 대한 부분은 항상 등장할 때마다 굉장히 성스럽게 등장합니다.

 

<노란 집의 추억>에서 성스럽게 등장한 어머니가 바닥을 닦고 있었다는 걸 본 관객 입장에서 다시 그 장면이 등장하는데 주앙 부부가 바닥을 닦으면서 엄청나게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노래가 들려오지만 상황은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설명해내기가 어려운 그런 장면을 맞닥뜨렸을 때에 이상한 감정이 줬던 인상이 컸던 것 같습니다. 혹은 공원 나무 밑에서 주앙 부부가 가끔씩 오고 가면서 쉬지 않습니까. 부부가 앉아서 쉬고 있을 때 열 몇 살쯤 됐을까요? 소녀가 자전거를 타고 그 앞을 몇 차례 지나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 장면이 시작할 때 아리아가 함께 시작하고, 그 장면이 끝나면 노래도 같이 끝나게 되는 거죠. 이를테면 그런 장면이 굉장히 좋은 이유는 어떤 의미나 의도를 해석하기에 앞서 그 사람 앞을 계속해서 지나가는 자전거의 운동과 그리고 그때 들려오는 음악, 그 둘이 만들어내는, 그리고 그걸 듣고 있거나 혹은 듣고 있는 거라고 우리가 상상하게 되는 주앙 부부의 모습을 보는 것, 그런 삼박자가 주는 느낌 때문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이런 비슷한 장면을 몬테이로의 다른 영화에서도 만나시게 될 텐데요. 우리가 교향곡을 심포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몬테이로는 말장난을 좀 좋아하는 편이었는데요. 지금 제가 말씀드렸던 것과 같은, 음악이 흐르고 하나의 음악에 맞춰서 한 신이 만들어지는 이런 경우를 두고 몬테이로의 경우에는 신포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말장난이죠. 교향곡처럼 만들어지는 장면화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오고 가며 04

 

하지만 몬테이로 자신에게는 신포니라는 것이 굉장히 즐거운 작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작업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음악을 나오는 장면에서 마지막 장면을 빼놓을 수 없죠. 다프네가 나온 다음에, 물론 몬테이로의 눈입니다. 몬테이로의 그 빅 클로즈업된 눈이 정지되면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영화를 맺게 되는 그 마지막 순간도 저에게는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혹은 꿈 장면도 좋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꿈을 해석하자면, 먼저 사망하게 된 부인에 대한 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꿈에 대해서 확신할 순 없는 거죠. 단지 이 꿈이, 우리가 꿈의 성질이라고 얘기할 때, 기이하고 몽환적인 그러한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까지만 우리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계속해서 좋아하는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건데요. 실내 장면을 제가 말씀드리지 않은 것 같은데, 실내 장면 중에선 이런 장면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겁니다. 리라라고 하는 악기죠. 악기를 돌리면서 자기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무슨 설화나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려주고 있을 때,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대체로 뭔가 이 영화가 최면적이란 느낌이 들면서 보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런 장면 중에서도 가장 최면에 빠지게 되는, 이 반복적인 음악과 이 음악에 맞춰져 있는 이 사람의 낭독의 음률이라고 할까, 목소리 같은 것들이 뒤섞여서 마치 우리에게 최면을 걸고 있는 기이한 느낌을 받아서 그 장면이 인상적이기도 합니다. 실은 이상의 장면들이 제가 간략하게 말을 할 때, “저는 이 영화의 이런 점이 참 좋습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대책 없이 순진하게 말해보고 싶은 겁니다. 몬테이로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몬테이로가 그런 말을 하는데요. 영화란 결코 시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영화란 무던히도 시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몬테이로는 스무 살 때 시집을 내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되려고 했던 꿈을 가지고 있기도 했겠죠. 영화란 시가 될 수 없지만, 시만큼 아름다울 수 없지만, 시만큼 아름답기 위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얘기가 될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아마 다른 몬테이로 자기 초상화 연작 중에서도 제 생각에는 이 <오고 가며>가 가장 그 말에 걸맞은 시적인 풍모를 지닌 영화가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