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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 <더 파더> -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2021-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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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영화 <더 파더>: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
플로리앙 젤레르 감독의 <더 파더>(The Father, 2020)은 ‘인지저하증’을 겪는 아버지가 기억의 원점에 이르는 과정을 그렸다. 먼저 인지저하증이란 용어를 언급하는 게 좋겠다. 한자문화권은 전통적으로 ‘치매’란 명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한국을 제외한 나머지 동아시아 나라들은 부정적인 어감을 지닌 ‘치매’ 대신 ‘실지증’(타이완), ‘인지증’(일본), ‘뇌퇴화증’(홍콩, 중국)을 사용한다. 이 글은 2014년 국내 보건복지부 조사에서 가장 선호도가 높은 용어로 선정된 ‘인지저하증’을 사용한다.
젤레르는 오늘날 프랑스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 가운데 하나다. 프랑스 주간지 <렉스프레스>(L’Express, 08/11/2014)는 그의 작품이 “아방가르드 극과 풍자 희극을 혼합한 포스트모던 연극”이라고 했다. ‘풍자 희극’을 혼합했다는 말은 고전극 요소를 많이 지녔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또 젤레르의 글쓰기는 “단조로운 일상생활의 지하 동굴을 탐사”하며, 강박 구조와 게임 감각이란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
젤레르는 연극 <어머니>(2010), <아버지>(2012), <아들>(2018)을 발표했다. <어머니>는 우울증, <아버지>는 인지저하증을 키워드로 삼았다. 젤레르는 <아버지>가 자신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모티브로 하는 ‘비극적 소극’(tragic farce)이라고 했다. 반복, 폐쇄 회로의 강박 구조, 또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의 서사는 이 작품에서도 잘 나타난다. <더 파더>는 이 연극 <아버지>를 영화화한 것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아버지(안소니)가 자신의 집에서 나와 딸(앤) 집에서 지내다, 요양원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는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영화는 주인공 안소니의 1인칭 시점에 관객들을 몰입시키고, 주인공이 겪는 혼란과 공포를 함께 체험하게 만든다. 이 체험의 공유는 강렬하다. 동정(sympathy)보다 공감(empathy)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 공감은 ‘인간에 대한 예의’ 또는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게 한다.
• <리어왕> 요소
일반적으로 동정은 상대와 거리를 두고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다. 반면 공감은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는 데서 발생한다. <더 파더>의 관객들은 주인공의 인지 상태와 내적 세계를 공유하며, 공감에 이른다. 영화는 이를 위해 특별한 장치를 마련한다. 내용적으로는 관객을 몰입시키는 서사가 있고, 형식적으로는 시간 장치와 공간 장치가 있다.
서사 측면은 고전극 성격이 짙다. 특히 인물성격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떠올리게 한다(공교롭게도 안소니 홉킨스는 2018 영화 <리어왕> 주연을 맡았고, 그때 촬영감독을 맡은 벤 스미타드 Ben Smithard는 <더 파더> 촬영을 맡았다). <리어왕>은 왕-아버지의 몰락을 그린다. 여든 살의 리어왕이 집에서 쫓겨나 광기, 혼란, 나약함을 드러내는 모습은 안소니 인물 설정과 닮았다. 안소니는 자신의 박탈감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안소니: 다들 이렇게 뜯어 가니(I am losing all my things, everyone’s just helping themselves) 이대로 가다간 나중엔 알몸만 남겠다.
안소니가 앤 앞에서 루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리어왕이 두 딸 앞에서 막내딸 코딜리어에 대한 그리움을 거듭 밝히는 모습과 겹친다. 그런 한편 리어왕 큰딸이 아버지를 가리켜 ‘노망’(dotage)을 언급하는 것도 흥미롭다(“노망이 나서 저러시니 실컷 떠드시게 두세요.” 1막 4장) <리어왕> 서사는 오늘날 인지저하증 관점에서 재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리어왕은 ‘미치고 싶지 않다’고 호소한다(“오, 내가 미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미치지 않게! 하늘이시여!” 1막 5장) 그러면서 혹시 정신이상이 있는지 스스로를 의심한다. “내 정신이 온전치 않은 것 같아 두렵다네.”(4막 7장) 이것은 안소니가 “여긴 내 집이야. 그렇지? 앤?”이라고 조심스럽게 묻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영화는 이처럼 리어왕과 닮은 설정으로 관객들의 관심을 모은다. 혹시 안소니의 말처럼 딸이 아버지 재산을 노리는지. 그래서 아버지를 정신이상자로 몰아가는 건 아닌지. 아니면 정말 아버지가 이상해진 건지. 이 미스터리 속에서 관객들은 안소니의 눈으로 사태를 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끝 장면에서 안소니가 “도대체 나는 누구지?”라고 물을 때 우리는 리어왕의 대사를 상기하게 된다.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자 없는가?”(1막 4장)
• <오이디푸스왕>
영화는 또한 미스터리 성격을 띤다(안소니 서재에는 추리작가인 P. D. 제임스 소설집이 꽂혀 있다). 심층적으로 <오이디푸스왕>의 미스터리 서사와 닮았다. 미스터리는 감춰진 진실을 파헤쳐가는 서사를 말한다. <오이디푸스왕>에서 감춰진 진실은 바로 자신의 정체다. 그가 자기 정체를 알게 되자 반전이 일어난다. 관객들은 이에 공감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안소니도 자기 정체성의 심리학 요소를 보여준다. 그는 평소에 은폐, 억압되었던 요소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는 직업이 엔지니어였던 걸로 보이지만, 늘 오페라 음악에 심취해있다. 어느 날 새로 온 간병인 로라에게 뜬금없이 자신이 직업 댄서였고, 마술사였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것은 남몰래 꿈꾸던 희망이 아니었을까. 그는 다음날 앤에게 자신의 탭댄스 실력이 “숨겨진 재능”이 아니겠냐고 농담을 던진다.
그것은 무의식에 은폐된 욕망, 정체성이고, 이 정체성은 예술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 안소니가 화가인 딸 루시를 자주 언급하며, 진정 소통이 되는 상대로 여기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듯하다. 또 루시를 닮은 간병인 로라에게 자신이 직업 댄서였고, 마술사였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법하다. 안소니는 무의식적으로 예술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런 만큼 루시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은 곧 자신의 죽음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엔딩 장면에서 마침내 자신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상태(“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통 모르겠어.”)란 것을 인정할 때, 말하자면 자기 정체성에 관한 새로운 진실을 인정할 때 그는 공포와 무기력함을 드러내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공포와 무기력함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안소니가 최소한의 자의식이 있고, 내적 삶이 있다는 말이다. <스틸 앨리스>(2015)의 제목처럼 ‘스틸(=아직) 안소니’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진실의 순간에 주인공이 또 다른, 진실한 의사소통 욕구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사실 그가 다른 사람과 진실한 의사소통 욕구를 보여준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것은 서사 구조의 측면에서 영화가 완전한 파국의 비극이 아니라, 기존의 삶 대신, 또 다른 삶의 전개를 암시하는 비극임을 말해준다. 오이디푸스가 왕좌에서 물러나, 비록 고통스럽지만 새 삶을 시작한 것처럼. 삶은 어떤 식으로든 지속되는 것이다.
• 해럴드 핀터(Harold Pinter)
이처럼 영화의 서사는 고전극 성격을 띠는 한편, 형식 측면에서는 영국 극작가 해럴드 핀터를 생각하게 한다. 젤레르는 2014년 <렉스프레스>와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해럴드 핀터의 “수수께끼 같은 대사와 침묵 pause의 변주”를 차용했다고 밝혔다. 실제 <더 파더>에는 침묵이 많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안소니 : 참, 루시는 어딨다니? 소식 들었어?
앤 : (침묵) 저는 이사를 갈 거예요.
안소니 : 여긴 내 집이야. 그렇지? 앤?
앤(캐서린) : (침묵)
안소니 : 말해봐라. 여긴 내 집이잖아. 아니야?
핀터의 연극과 마찬가지로 <더 파더>의 침묵은 ‘나중에야’ 이해된다. 처음에는 침묵의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사건이 전개되고 나서 돌이켜보면 그때 그(그녀)가 어째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침묵의 의미와 효과는 사후(事後), 즉 사건이 일어난 뒤로 지연된다. 이것은 관객의 참여와 적극적인 재구성, 재해석을 촉발한다. 말하자면 관객은 침묵으로 표현되는 인물의 진의를 파악해야 한다는 ‘퍼즐 게임’ 속으로 유인되는 것이다.
한편 영화는 핀터의 시간과 공간 기법에도 영감을 받은 것 같다. 핀터의 <배신>(1978)이 대표적이다. <배신>은 역방향 시간으로 펼쳐진다. 두 남녀가 헤어진 지 2년 뒤로부터 연극은 시작되고, 그들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막이 내린다. 그런 한편 첫 장면과 끝 장면 사이는 순방향과 역방향 시간이 뒤섞인다. 핀터는 이 전개가 영화의 자유로운 시간에서 착안했다고 말한다. <더 파더>의 시간이 지그재그인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또 공간 측면에서 핀터의 연극 상당수는 주인공이 거주하는 방을 중심으로 정체불명의 외부 침입자와 권력 투쟁을 벌이는 내용을 담았다. 그의 작품이 ‘위협 연극’(Comedy of Menace)으로 불리는 이유다. <더 파더>에서 안소니가 자신의 집에서 나가지 않으려 하는 모습, 또 간병인을 비롯해 앤의 남편인 폴을 침입자로 여기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더 파더>의 시간, 공간 장치에는 분명 독창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시간이 공간과 인물과 혼합된다는 것. 다시 말해 시간 혼성, 공간 혼성(다중적 사용), 인물 혼성(2인 1역, 또는 1인 2역), 세 가지가 함께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 결과로 관객들은 주인공의 혼란스런 머릿속에 들어간 것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 녹아내리는 시간
영화의 시간은 공간과 인물에 혼합되고, 녹아내린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1931)에서 ‘녹아내리는 시계’를 연상하게 한다. 영화의 시간은 안소니 집의 시간 → 앤 집의 시간 → 요양원의 시간이란 순방향이 큰 줄기를 이룬다. 여기서 시간 순행의 표지는 집이 바뀔 때마다 천천히 집 내부를 비추는 장면이다. 하지만 처음과 끝의 이야기가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하는 가운데, 앤 집의 사건들은 순행과 역행이 뒤섞여 있다.
사건 1. 안소니는 주방에서 물을 끓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파란색 비닐봉지 두 개를 발견한다. 누가 갖다 놨을까. 언제 이런 게 있었나. 그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봉지에서 물건을 꺼내 선반에 넣는다. 그런데 거실 쪽에서 문소리가 나서 가보니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거실에 앉아 있고, 자신을 폴이라고 밝힌다.
이것은 안소니가 ‘빌’의 모습을 한 폴을 만나는 장면이다. 곧이어 안소니는 ‘캐서린’의 모습을 한 앤을 만난다. “이런 황당한 일이... 앤은 어딨지?” 안소니는 깊은 혼란에 빠진다. 빌과 캐서린이 모두 요양원 간호사란 사실은 결말부에 가서야 밝혀진다. 현재(요양원의 시간)가 몇 달 전(몇 년 전?)의 과거와 뒤섞인 거다.
사건 2. 이 장면이 지나가고, 앤이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며 집에 들어오더니, 주방 테이블에 파란 비닐봉지 두 개를 놓는다. 그러면서 “얼마나 힘든지 몰라. 지난번엔 나도 못 알아보셨어.”라고 말한다.
이 대사만 들으면 사건1은 사건2로, 순방향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앤의 행동을 보면 다르다. 관객들은 앤이 봉지를 올려놓은 ‘결과’를 먼저 보고, 그런 다음 봉지를 올려놓는 동작을 보는 것이다. 사건의 인과적 순서(원인/결과)가 뒤집혔다. 요컨대 사건1에서 사건2의 흐름은 역방향 시간이다.
그런데 사건1은 누구의 집일까. 주방 인테리어(베이지색 계열의 바둑판 벽타일과 짙은 밤색 싱크대)는 안소니 집이지만, 대화로 보면 확실히 앤 집이다. 그러고 보니 사건1과 2의 주방은 미묘하게 다르다. 벽면이 푸른빛 단색으로 바뀌고, 원목 색상 테이블이 ‘모던’한 블랙으로 바뀌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사건1의 주방 모습은 안소니의 주관적 시점이다. 안소니가 집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시간 혼성, 공간 혼성, 인물 혼성의 ‘삼합’을 통해 주인공의 혼란스런 인지 상태를 표현한다.
• 정신분석적 관점
물론 사건1을 보는 관객들은 빌/폴과 캐서린/앤이 안소니를 속이려 드는 것은 아닌지,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사건2, 앤의 말(“지난번엔 나도 못 알아보셨어”)을 들으면 의심이 풀린다. 관객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안소니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관객의 관점도 바뀐다.
이 시점 이전까지 관객들은 스릴러의 관점에서 ‘다음 장면은 뭐지?’라고 묻는다. 반면 이처럼 주인공의 증세를 알게 된 뒤부터 관객들은 정신분석가의 관점에서 ‘이 장면은 뭐지?’라고 묻게 된다. 현재 이 장면이 어떻게 성립하는지, 말하자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또는 오히려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궁금해 하게 된다.
시간 역행의 효과는 이것이다. 관객들은 극중 인물들보다 극의 상황을 더 많이 알게 된다. 그 결과 인물의 대사, 행동의 함축적 의미를 짐작하고,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의미를 추론, 해석할 수 있다. 역방향 서사는 이처럼 관객들이 ‘초월적 관점’에서 인물의 감정과 동화되지 않고 거리를 두고 관찰하게 만들고, 인물의 행동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게 한다. 영화가 감정적 동정심을 넘어, 이해에 기초한 공감을 유도하는 근거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현실 시간과 ‘몽상’ 시간의 구분이 더 어려워진다. 흥미로운 점은 안소니의 착란에도 원칙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물 혼성에서 두드러진다. 2인 1역의 인물 혼성은 <욕망의 모호한 대상>(루이스 부뉴엘, 1977)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부뉴엘 영화의 두 여인은 공통점이 전혀 없고, 외려 정반대 성격인 데 비해, 앤/캐서린은 ‘돌봄’이란 공통점이 있다. 게다가 앤의 푸른 색(옷과 실내 벽지)은 간호사와 병원의 색상과 연결된다. 또 폴/빌은 ‘현실’ ‘법’ ‘권위’란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로라/루시의 1인 2역은 안소니의 ‘숨은 자아’와 연관된 ‘파격’ ‘일탈’ ‘예술’을 매개로 연결된다.
이처럼 주인공이 인지하는 인물 혼성은 어떤 공통 개념을 중심으로 ‘압축’되어 있다. 이 같은 ‘압축’은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 꿈에서 일어난다. 프로이트는 꿈에서 일어나는 무의식 활동을 ‘꿈 작업’으로 부르고, 그 첫 번째 원칙이 ‘압축’이라고 밝혔다. 이 관점에서 안소니의 인물 혼성은 마구잡이가 아닌 무의식, 꿈 작업의 원칙에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안소니 내면에서 최소한의 정신적 삶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 반복, 어긋남, 파편
영화는 또한 몇 종류의 반복되는 대사와 장면을 보여준다. 조르쥬 비제의 오페라 <진주조개 잡이>(1863)를 대표하는 아리아 <귀에 익은 그대 음성>도 여러 차례 반복되고, 이 노래의 후렴은 또한 ‘매혹적인 추억’이란 구절을 반복한다.
반복은 ‘닫힌 시간’이다. 주인공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기억, 또는 정신적으로 상처 받았던 순간, 곧 ‘트라우마’와 연결된다. 그런데 반복 장면들은 서로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르다. 가령 폴/빌이 안소니에게 ‘언제까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할 건지’ 묻는 장면이 두 번째 나올 때는 안소니가 구타를 당하는 내용이 덧붙여진다.
진실은 알 수 없다. 그것은 실제 일어난 사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주인공의 변형된 기억일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때 안소니가 고통 받았다는 사실이다. 도입부 앤이 파리로 떠난다고 말하자 안소니는 슬퍼한다. 그 뒤로 앤의 말은 여러 차례 반복되고 변형되며, 진위를 알아내기 어렵게 만든다.
앤은 정말 파리에 살까. 결말부 캐서린은 해외에서 앤이 보낸 엽서를 그 증거로 내놓지만, 완전한 증거는 아니다. 엽서에는 ‘받는 사람’ 주소는 있어도 ‘보낸 사람’ 주소는 없다. 또 엽서 그림은 앤 집의 다이닝룸에 있던 그림과 같다. 엽서는 현실일까, 환상일까. 게다가 이 그림은 플로라(고대 로마 ‘꽃의 여신’) 벽화다. 서기 1세기의 작품으로 이탈리아 폼페이 지역의 건축물에 있는 벽화다.
여기서 폴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폴은 안소니 때문에 자신들이 여행을 못 갔다고 했다. “실은 이탈리아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혹시 폴과 앤은 안소니가 요양원에 들어간 뒤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건 아닐까. 진실은 모른다. 진짜 앤이 파리로 떠났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안소니를 앤 집이 아닌 요양원에서 따로 살게 하려고 ‘선의의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진실은 심연 속에 잠겨 있고, 안소니는 진실의 파편을 보여줄 뿐이다. 이 관점에서 요양원 앞마당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폴란드 작가 ‘이고르 미토라이’(Igor Mitoraj)의 작품 <나라의 빛>(Luci di Nara: Light of the Moon, 1991)이다. ‘빛’을 뜻하는 ‘루시’(Luci)가 안소니 둘째 딸 이름을 연상하게 한다.
• ‘루시 디 나라’
작품 형상은 파편적이다. 머리 부분은 없고, 얼굴 일부만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훼손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손상된’ 조각품 같기도 하다. 주인공이 인지하는 시간과 닮았다. 그는 ‘손목시계와 머릿속의 시계’를 지녔다고 말하지만, 손목시계는 늘 제자리에 없고, 머릿속의 시계는 사라졌다. 아니, 뒤엉켰다. 시간은 환상/현실, 과거/현재를 널뛰기하고, 어떤 시간은 겹쳐지고 늘어진다.
안소니의 시간은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이다. 직선으로 매끈하게 재구성되지 않는다(영화 <메멘토>(2000)와 다른 점은 이것이다. <메멘토>는 거의 온전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 들뢰즈의 말처럼 이 ‘다면체의 결정체’, ‘깨어진 거울’과 같은 시간 혼성 앞에서 안소니는 가위눌리고, 생성(변화)과 탈주를 욕망한다.
“여기서 나갈래. 누가 날 좀 데려가줘요.”
이 상황은 에드바르 뭉크가 만년에 그린 <자화상, 시계와 침대 사이>(1940~1943)을 생각하게 한다. 시계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다. 달리 말해 시계는 곧 시간이다. 시계는 우리가 지탱하는 삶, 습관, 규칙적인 생활을 상징하는 한편, 그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곧 여명(餘命)을 상징한다.
안소니가 그토록 시계에 집착하고, 누군가 시계를 훔쳐갔다고 의심하며, 머릿속의 고장 난 시계에 절망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듯하다. 시계가 사라지거나 작동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 시간이 뒤엉키고 파편화되면, 우리가 현재 어느 시점에 있는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
• 연극적 공간의 영화화
영화는 이런 시간 장치와 함께 공간 장치를 탁월하게 배치한다. 영화는 대부분 안소니 집, 앤 집, 사라이 박사의 진료소, 요양원, 이렇게 네 공간에서 펼쳐진다. 흥미로운 점은 네 공간의 구조가 똑같다. 이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안소니와 관객들에게 혼란을 준다.
앤이 진료소 입구에서 벨을 누르자 안소니는 “열쇠 잃어버렸어?”라고 묻는다. 이곳이 자기 집이라고 여긴 거다(사실 진료소 건물의 계단, 엘리베이터, 층계참은 안소니 집과 겉모습이 같다). 게다가 가구의 연속성도 혼란을 더한다. 앤 집에 있던 컬러 의자와 똑같은 의자들이 진료소에도 놓여 있다.
그런 한편 영화는 실내 환경만 조금씩 바꾼다. ‘같지만, 다른’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변화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고, 그것은 서사 전개와 일치한다. 안소니 집은 고전적인 느낌이고 베이지, 밤색 인테리어에 약간 어두운 조명이다. 이에 비해 앤 집은 모던한 분위기에 조금 밝은 조명과 푸른 색 벽이다. 또 진료소에서 요양원으로 넘어갈수록 푸른 벽과 밝은 조명은 더 뚜렷해진다.
이와 함께 안소니 집에서 가구와 장식들이 풍성한 분위기를 만들던 것과 대조적으로 앤이 안소니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마음먹은 뒤부터 앤 집의 책꽂이와 거실 벽은 비어 간다. 마침내 요양원에 이르면 몇 가지 단순한 가구와 그림 몇 점만 남는다. 이는 곧 주인공이 풍요로운 기억과 인지 능력을 잃어가는 과정과 같다.
이처럼 영화는 공간의 ‘같음과 다름’을 서사 전개에 맞췄다. 원래 제한된 공간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은 연극의 특성이자 단점이다. 아마도 연극의 상당수가 영화화에 실패하는 이유일 거다. 그런데도 감독은 연극의 특성을 거꾸로 살리며 영화화에 성공했다. 감독의 뛰어난 점이라고 생각한다.
• 보호 공간, 억압 공간
주인공에게 집은 곧 기억과 시간이다. 또 주인공은 다른 사람과 대화에서 곤란해질 때마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집은 자신만의 안식처였고, 남몰래 꿈속에 잠길 수 있는 사적인 공간, 정신적인 공간이었다. 집은 하나의 성(城)이었다. 하지만 인지저하증이 온 뒤로 그는 집에서 오랫동안 ‘몽유’ 상태에 있었다.
이때부터 집의 외부가 없어졌다. 집은 자신을 보호하는 성이었지만, 차츰 내부로 닫힌 공간으로 바뀌어 갔다. 그 결과로 주인공은 간병인을 침입자로 여기고, 자신을 요양원에 보내려는 앤과 폴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빼앗으려 한다고 여긴다. 집이 자신을 보호하는 공간이 아니라, 자신을 공격, 억압하는 공간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안소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는 하릴없이 창밖을 내다본다. 왼쪽 편에는 꽃집 아발론(Avalon)이 보인다. 아발론은 아서 왕이 마지막에 치료받기 위해 떠났다고 하는 전설의 섬이다. 이상향, 또는 저승이다. 오프닝 장면에서 안소니가 듣던 오페라 <아서 왕>(1691)의 아리아 <Cold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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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결말부 앤이 요양원에서 걸어 나오는 장면을 ‘블라이스 하우스’(Blythe House)에서 촬영했다. 이 건축물은 매우 위압적이다(<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에서 비밀 정보국 건물로 나오는 이유일 거다). 벽돌로 지어진 겉모습은 오프닝 장면의 안소니 집과 비슷하지만, 느낌은 다르다. 이로써 영화는 ‘같지만, 다른’ 공간 구성을 완결하며, 주인공의 집이 더는 보호공간이 아닌 억압공간으로 인지된다는 서사와 일치시킨다.
• 기억의 원점
영화는 이처럼 시간, 인물, 공간 혼성으로 주인공의 인지 혼란을 표현하고, 그것을 관객들이 체험하게 만든다. 여기서 우리는 인지저하증 환자에게도 자의식이 지속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꿈 작업과 혼란, 불안, 절망은 역설적으로 자의식의 증거다. 이로부터 동정이 아닌 공감이 일어난다. 이 공감은 인지저하증 환자에게도 내면적 삶은 지속되고, 따라서 존중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엔딩 장면에서 안소니는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나무로 돌아간다. 독일 뇌과학자 ‘한나 모니어’는 기억이 미래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기억은 미래를 위해 과거 경험을 재구성하고, 미래 계획을 위한 밑그림을 만든다. 그런데 미래 전망이 (가령 노화, 질병 때문에) 좁아지면, 기억의 작동 방식도 달라진다. 기억은 계속 미래만 내다보고 계획하기보다는 가능성의 폭이 넓었던 과거를 더 많이 돌아본다. 누구나 막다른 골목이 되면, 돌아서는 법이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중요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린 시절은 미래 가능성의 폭이 가장 넓었던 때다. 이 관점에서는 안소니가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또한 기억의 보편적인 작동 방식 속에서 기억의 원점을 찾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안소니는 거기서 또 다른 미래를 준비한다. 어린 시절은 삶의 시초이고, 세계가 우리 앞에 열려 있던 시기다.
일본 사회학자 ‘미야다이 신지’는 세계와 사회를 구분한다. 세계는 그야말로 ‘세상 전체’이고, 사회는 ‘의사소통 가능한 전체’다. 어린아이에게 사회는 인간 세상에 한정되지 않는다. 세계가 곧 사회다. 나무, 비, 바람, 모든 것과 의사소통하기 때문이다. 반면, 어린아이가 자라나면 언어가 통하는 상대가 인간뿐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어른에겐 사회가 전부다. 그 너머의 세계를 망각하거나 무시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의사소통의 한계, 또는 무의미함을 느낄 때 인간은 다시 세계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안소니 : 지금 몇 시지?
로라 : 약 드실 시간이에요
안소니도 의사소통의 한계점에서 또 다른 세계를 (다시) 만난다.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로서. 벽에 걸린 <소년의 초상화>가 안소니와 캐서린을 바라본다. 그림은 안소니 집 다이닝룸에 걸려 있었는데, 이제 요양원에 걸려 있다(그림은 이 영화를 위해 제작됐다). 어린 안소니 모습일까. 카메라는 천천히 창밖을 비춘다. 풍성한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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