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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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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문의 스크린2025-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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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스크린
이시현 2023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때때로 평가가 몹시 어려운 영화를 마주할 때가 있다. 영화가 실사례를 소재로 하거나, 적어도 현실과 닮으려고 노력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혹자는 그러한 영화를 현실의 가능성, 내지는 영화적 진실(Cinéma verité)을 담지하는 시네마라 극찬할 것이다. 혹자는 실제 사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뿐 이에 대한 특별한 표현방식 등이 부재한다면 그러한 영화는 예술적 가치가 부재하는 뉴스와 다름없다고 지적할 것이다. 혹자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 따위의 개념은 허구일 뿐이며 그러한 영화는 자신이 주관적으로 인식한 현실을 객관으로 둔갑시키는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것이다.
이 모든 관점은 부분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이중 어떤 관점이 가장 타당한지는 순전히 관객과 평론가의 소신에 달려있는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약 수사, 검찰과 경찰의 대립 및 검찰과 정치권의 결탁을 주요 소재로 하는 <야당>에 대해 판단하는 것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이는 정치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서사와 설정 등 영화 내적 요소만 고려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수감된 ‘강수’가 야망 있는 검사 ‘관희’의 명령을 받고 마약 집단에 내부 스파이, 일명 ‘야당’으로 잠입하는 내용은 <무간도>부터 <신세계>, 어쩌면 <검사외전>까지 이어져 내려온 클리셰이며,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강수’를 희생양으로 삼는 ‘관희’의 선택 그리고 ‘관희’에게 복수하기 위해 앙숙인 ‘상재’와 의기투합하는 ‘강수’의 모습은 <부당거래>의 그림자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그림자를 혹자는 한국범죄영화의 계보를 읽을 수 있는 레퍼런스로 이해하겠지만, 혹자는 기존의 성공공식을 답습하는 게으름으로 비판할 것이다.
하지만 <야당>을 기존의 상업영화와 차별화하는 지점은 과거 두 차례의 탄핵에 대한 공동체의 기억을 직접적으로 호명하는 이 영화의 정치적 선택에 있다. 일례로 극중 최종 빌런으로 설정되어 있는 대통령 후보가 검사 출신이라는 점, 검사와 피고가 웃으면서 독대하는 장면을 건너편 빌딩에서 촬영하는 장면 등은 기시감을 넘어 노골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가 정치성을 온몸으로 수용하려는 이상 이 영화에 대한 미학적 판단은 정치적 판단과 분리될 수 없다. 법치주의를 우선시하는 보수주의자는 이 영화가 현실의 몇몇 지점을 과장하는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것이다. 반면 사회의 불의를 혁파하는 것에 관심이 큰 진보주의자는 이 영화의 결말에 통쾌함을 느끼는 한편 이 영화를 두 차례의 탄핵과 검경의 갈등을 매끄럽게 조합한 시네마로 평가할 것이다.
둘 중 어떤 관점이 타당한지는 나로서는 답하기 힘든, ‘위험한 질문’이다. 이 영화가 마약 중독을 연출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반복적이라는 점, 클리셰 덩어리의 서사가 예측가능했다는 점 등은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나의 미학적, 정치적 판단은 어떠하냐고? 답변을 하기에 앞서 이청준의 <소문의 벽>의 일부분을 인용하겠다.
“어렸을 때 겪은 일이지만 난 아주 기분 나쁜 기억을 한 가지 가지고 있다. 6.25가 터지고 나서 우리 고향에는 한동안 우리 경찰대와 지방 공비가 뒤죽박죽으로 마을을 찾아드는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경찰인지 공빈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또 마을을 찾아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우리 집까지 찾아 들어와 어머니하고 내가 잠들고 있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전짓불을 얼굴에다 내리비추며 어머니더러 당신은 누구의 편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때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전짓불 뒤에 가려진 사람이 경찰대 사람인지 공비인지를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지독한 복수를 당할 것이 뻔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상대방이 어느 쪽인지 정체를 모른 채 대답을 해야 할 사정이었다. 어머니의 입장은 절망적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절망적인 순간의 기억을,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가려 버린 전짓불에 대한 공포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영화평론가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평론가가 되는 것 역시 요구받는 시대이다. <소문의 벽>의 주인공, ‘박준’은 전짓불 앞에서 진술을 강요당하는 공포에 시달린 나머지 미쳐버리고 만다. 문학행위란 한 작가의 가장 성실한 자기진술이기에, 눈앞의 전짓불이 어느 진영의 것인지 말할 수 없는 작가는 진술을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나 역시마찬가지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진보주의자인지 보수주의자인지 알 수 없는 이상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영화평론가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영화를 보는 심미안도, 필력도 아닌 용기임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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