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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제된 연출 그리고 역동하는 연기, <파란>202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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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된 연출 그리고 역동하는 연기, <파란>
윤필립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화 <파란>(강동인 감독, 2025)은 겉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 안에 담긴 감정의 결이 놀라울 만큼 풍부하고 깊다. 이 영화는 극적인 사건보다 인물의 내면에 천착하며 관계의 미세한 균열과 그로 인한 감정의 파장을 탁월하게 포착한다. 이야기의 골격 자체는 비교적 단순하고 일부 관객에게는 다소 예측 가능한 전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강동인 감독은 이와 같은 이야기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 결핍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연출적 선택을 한다. 감독은 불필요한 설명을 배제한 채 침묵과 여백, 공간의 호흡을 통해 인물들의 정서를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이끈다. 이러한 점에서 섬세한 감정 묘사는 결과적으로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이 되며, 그 미덕은 배우들의 연기력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무엇보다 강동인 감독의 연출은 절제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대사에 의존하지 않고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주변 풍경을 통해 감정을 끌어올리는 방식은 때로는 다큐멘터리적이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클로즈업을 통해 포착한 배우들의 표정, 그 안에 잠재된 감정의 흐름은 이 영화가 얼마나 인물 중심적이며 감정 중심적인 작품인지 잘 보여준다. 더불어 감독은 빛과 그림자의 대비, 자연광을 활용한 촬영기법 등을 통해 인물의 내면 상태를 시각적으로 강화하며,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정제된 사진첩을 넘기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배경음향 또한 과하지 않게 사용되어 감정을 이끌기보다 감정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역할을 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연출의 힘은 배우들이 각자의 역할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며, 그 결과 영화 속 인물들이 스크린 위에 존재하게 만든다.
이러한 연출적 특징을 바탕으로 이수혁은 그간의 이미지와는 결이 다른, 보다 정제되고 농축된 연기를 선보인다. 이수혁은 작품 속에서 ‘태화’라는 인물을 연기하는데, 이 캐릭터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실의 무게 사이에서 조용히 침잠해 가는 인물이다. 그 과정에 이수혁의 스타 페르소나 그 자체가 기여한 바도 있으나 이수혁은 그 이미지에 안주하지 않고 ‘태화’라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구현해낸다. 특히, 감정이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에서도 과장하지 않고 감정을 응축시키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총을 들고 있는 장면에서도 단순한 폭력의 상징이 아니라 태화의 복잡한 심경과 윤리적 딜레마가 동시에 전해진다. 다시 말해, 이수혁의 연기는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의 내면으로 천천히 스며들게 한다.
한편, 하윤경이 연기하는 ‘미지’는 얼핏 보면 감정 표현이 적은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속에서 수많은 갈등이 교차하는 인물이다. 하윤경은 이러한 내면의 복잡성을 섬세한 감정 조절과 절제된 제스처로 표현해낸다. 그녀의 연기는 감정의 파고가 극에 달할 때조차 과장되지 않으며 오히려 침묵과 정지의 순간에서 더욱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특히, 이수혁과의 대면 장면에서는 시선과 숨결, 반항 어린 눈빛만으로도 인물의 심리 상태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인 연기를 넘어 인물과의 깊은 교감 속에서 탄생한 진정성 있는 연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수혁과 하윤경의 연기가 이 영화의 정서를 지탱하는 기둥이라면 권다함, 김현, 임영주 등의 조연 배우들은 그 정서를 다양한 결로 확장시키는 중요한 축이라고 할 수 있다. 권다함이 연기한 ‘요한’은 태화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상실과 불안을 마주하는 인물로, 그의 존재는 이 영화 속 불안한 청춘들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한다. 김현은 현실의 무게를 상징하는 ‘천영주’ 역으로 등장해 극의 긴장을 이끌며, 임영주는 짧지만 강렬한 등장으로 관객의 기억 속에 잔상을 남긴다. 이처럼 조연 배우들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고 극의 리듬을 섬세하게 조율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란>은 배우 앙상블이 만들어낸 미스터리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궁극적으로, 영화 <파란>은 서사 구조보다는 감정의 흐름에 집중하는 작품이다. 인물의 말보다 침묵, 사건보다 분위기, 결론보다 여운을 중시하는 이 영화는 보는 이에 따라 느껴지는 무게가 다르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감정의 영화’이자 ‘기억의 영화’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힘이라고 볼 수 있겠다. 강동인 감독은 이처럼 명확하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고, 감정을 억제함으로써 더 깊은 감정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관객과 조용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들은 그 대화의 중심에서 진심을 다해 응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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