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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영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통찰력, 다양한 관점이 돋보이는 '영화평론가' 차별화된 평론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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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프레시 2024년 12월 월요시네마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관하여2025-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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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사소한 것들’ 포스터.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피프레시 12월 월요시네마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관하여
… 타인을 구하면서 이뤄낸 자기구원
┃12월 송연주 영화평론가 발제, 황영미 영화평론가 사회,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국제영화비평가 ‘줌’ 세미나 열어
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으로 월요 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난 12월은 팀 밀란츠(Tim Mielants) 감독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4)에 대해 황영미 영화평론가가 사회를 맡고, 송연주 영화평론가가 발제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세계 각국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이며, 한국지부는 1994년 창립됐다.
사회자 :
안녕하세요. 피프레시 한국본부 제9대 회장을 했던 영화평론가 황영미입니다. 제가 한국경제에 한경에세이로, ‘사소하지만 강한 용기’라고 제목을 붙여서 이 영화를 다뤘습니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Small Things Like These>은 아일랜드 출신 작가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이 2021년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 원작입니다. 1985년 아일랜드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부조리한 상황을 볼 때, 어떻게 행동해야할까? 부조리가 없으면 좋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구조적으로 부조리가 없었던 때가 없었습니다. 그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양심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고민과 선택을 주인공 빌 펄롱(킬리언 머피 Cillian Murphy)의 삶을 두고 여러 생각을 하게 합니다.
원작이 훌륭해서 배우 킬리언 머피가 적극적으로 제작과 주연을 맡아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팀 밀란츠 감독은 2019년 체코 카를로비바리 국제 영화제에서 <패트릭 De Patrick>으로 감독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제74회(2024년 2월) 베를린 국제 영화제 개막작이자 경쟁 부문 초청작으로 상영되었습니다. 또한, 메리 수녀(수녀원장) 역의 에밀리 왓슨(Emily Watson)이 이 영화로 은곰상(조연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발제자 :
안녕하세요. 송연주입니다.
킬리언 머피가 영화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에서 주연을 맡아 오스카상을 수상한 이후 영화 주연을 맡아 공개된 첫 작품입니다. 킬리언 머피가 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설립한 제작사의 이름은 Big Things Films 입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이 전하는 메시지가 ‘Small Things’가 아니라 ‘Big Things’라는 느낌을 줍니다. 벤 애플렉(Ben Affleck)과 맷 데이먼(Matt Damon)의 제작사 Artists Equity도 이 영화 제작을 함께 하였습니다. 뮤지컬 <원스(Once, 2012)>로 토니상 뮤지컬 극본상을 수상한 엔다 월시(Enda Walsh)가 각색을 맡아서 더 기대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현장에서 각색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 펄롱의 의식을 따라 서술되는 원작 소설을 짚으면서 영화의 각색을 중심으로 발표를 진행하겠습니다.
1985년 아일랜드
소설은 1985년의 아일랜드 더블린을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당시는 젊은이들이 런던, 보스턴, 뉴욕으로 이민을 떠난다는 소식이 라디오를 통해 전해지고, 찰스 호히 수상이 대처 수상과 북아일랜드 관련 협정을 맺었고, 벨파스트 연합주의자들이 더블린이 자기네의 문제에 간섭하는 것에 항의하는 뜻에서 북을 치고 행진하며, 비료공장은 직원을 해고하고, 조선소, 펄롱이 아내를 만났던 회사, 그리고 꽃집마저도 문을 닫는 혹독한 시기였습니다.
영화도 1985년의 아일랜드를 카메라에 잘 담았습니다. 축축하고 어둑한 거리, 석탄 공장,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의 젊은이들이 돈을 아껴서 연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려는 모습들입니다. 다만, 라디오에서는 음악이 흐르고, TV에서는 쇼가 보여 집니다. 영화는 소설이 다루는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사장으로서, 가장으로서의 빌 펄롱이 가진 현재의 상황에 카메라는 더 깊이 들어갑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수녀원
실제, 막달레나 수녀원은 1922년부터 1996년까지 약 74년간 미혼모와 어린아이들의 인권을 유린했습니다. 카톨릭 교회가 아일랜드 국가와 함께 운영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곳이었습니다.
소설이 묘사하는 수녀원은 풍경이 크리스마스카드 같은, 위풍당당한 건물이며, 선한목자수녀회가 수녀원을 맡아 관리하고, 기초교육을 제공하는 직업 여학교도 운영하며, 세탁소도 겸업하는 곳입니다. 수녀원이 운영하는 세탁소가 세탁을 깨끗하게 하는 것으로 평판이 좋습니다. 다만, 직업학교에 있는 여자들은 타락한 여자들이어서 교화를 받는 중이라는 소문이 있고, 이 소문을 빌 펄롱의 아내 아일린이 믿고 있습니다. 더러운 세탁물의 얼룩을 씻어내며 속죄하는 거라는 소문, 또는 수녀님들이 고생 중이라는 소문, 또는 모자 보호소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수녀원의 이야기는 소설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소설 시작부분에서 빌 펄롱의 마음이 조금씩 일렁이는데 그 이유를 감춰두었다가 소설 중반에서야 빌이 무엇 때문에 과거를 반추하게 되었는지 알려줍니다. 알록달록 열매가 열렸던 날, 수녀원에서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소녀를 만났고 그 소녀를 외면했던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빌의 어린 시절과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시작되고 5분쯤에 수녀원이 바로 등장합니다. 빌 펄롱이 석탄을 배달하러 가서, 부모로부터 수녀원에 강제 구금되는 여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는 빌 펄롱의 심리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소설보다 빠르게 사건을 드러내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빌 펄롱
1985년 더블린에서 석탄 공장을 운영하는 빌 펄롱. 소설 초반, 빌 펄롱의 목표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어려워하는 이 시기에,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 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는 것이 삶의 목표입니다.
영화는 빌 펄롱의 이런 심경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석탄 배달을 마치고 고단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 가족과 식사할 때, 펄롱의 두 딸이 세인트 마거릿 학교 교복을 입고 있고,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아빠인 빌에게 이야기해줍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사복을 입은 세 딸과 교복을 입은 두 딸을 보여주며, 학교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소설을 보면, 빌 펄롱은 1946년 4월 1일생입니다. 만우절에 태어나서 바보일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름 빌은 William(윌리엄, will의지, helm보호자)의 애칭입니다. 영화에서 미시즈 윌슨은 어린 빌을 ‘윌리엄’이라고 부릅니다. 아일랜드에서 빌은 개신교도 이름이고, 가톨릭교도는 잘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소설은 어린 빌이 학교에서 비웃음과 놀림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외투 뒤쪽이 침 범벅이 되어 돌아온 날도 있었지만, 그래도 큰 집에서 자란 덕분에 애들이 조금 봐주는 것도 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석탄 야적장에서 일하다가 지금의 자리로 올라갔습니다. 건실한 개신교도 특유의 습관을 들여 믿음직한 스타일입니다.
이런 빌 펄롱이 일상에 회의를 갖기 시작합니다. 소설과 영화 모두, 시간순으로 생각해보면, 수녀원에서 자신을 도와달라는 소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빌 펄롱은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미시즈 윌슨과 어머니 세라 펄롱, 그리고 네드에 대한 기억입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과거의 인물들 - 미시즈 윌슨과 세라 펄롱, 네드
소설에서 미시즈 윌슨은 전사한 남편의 유족연금을 받고, 가축(소와 양) 농장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미망인입니다. 자식이 없이, 시내에서 몇 마일 떨어진 큰 집에 혼자 살고, 개신교도입니다. 독실하지는 않지만 개신교도로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빌 펄롱의 어머니 세라는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일하던 열여섯 살 때, 빌을 임신하였습니다. 세라의 가족들은 세라를 외면했지만, 미시즈 윌슨은 세라를 해고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라를 자신의 집에서 지내며 일하게 해주어서, 세라는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빌을 낳고 키울 수 있었습니다. 빌 펄롱이 열두 살 때, 세라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그 바람에 빌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네드는 미시즈 윌슨의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미시즈 윌슨의 건초를 훔쳐서 노새가 먹을 풀이 없어 힘들어하는 일꾼에게 주었던 적이 있고, 여러 번 건초를 훔쳐 도와주었다가, 흉측한 것이 도랑에서 길을 막아 그 일을 멈추었다고, 그것을 후회한다고 어린 빌 펄롱에게 말했었습니다. 빌이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을 때, 네드는 윌슨 집에 왔었던 영국 친척들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 빌은 자신의 아버지가 영국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훗날 빌은 네드가 빌의 아버지이지만, 그것을 숨기고, 빌에게 더 나은 혈통 출신으로 생각하게 만들고서 빌의 곁을 지켜주었다는 것을 은총이었다고 깨닫습니다.
현재의 인물들 - 아일린과 다섯 딸들, 미시즈 케호
소설을 읽었을 때, 영화 각색에서 가장 사건을 만들어 낼 것으로 기대된 인물은 아일린이었습니다. 빌 펄롱의 변화에 가장 현실적인 걸림돌이 될 것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돕는 것보다는 자신의 가족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빌 펄롱의 아내 아일린은 결혼 전, 그레이브스 앤드 컴퍼니 사무실에서 일했습니다. 아일린은 현실적이고 기민한 생각을 가졌고, 빌은 아일린의 이런 성향에 끌려 결혼을 했습니다. 이제 아일린은 다섯 딸을 낳은 주부가 되었습니다.
아일린의 현실적인 성향은, 빌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싫어하는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수녀원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제 무덤을 판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어디든 운이 나쁜 사람은 있다는 주의로,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 해야 하는 일도 있다고, 그래야 계속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게다가 빌에게 당신은 딱히 어려움을 모르고 컸잖아. 세상에는 사고를 치는 여자들이 있어. 우리가 가진 것 잘 지키고 사람들하고 척지지 않고 부지런히 살면 우리 딸들이 그 애들이 겪는 일들을 겪을 일은 없어, 그 애들 부모는 애들을 멋대로 풀어놨다가 문제가 생기니까 모른 척 등을 돌려 버렸을 것이라고 빌을 자극합니다.
아일린의 말은 빌 펄롱에게 수녀원을 거쳐 엄마 세라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펄롱은 아일린의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아이들 중 하나가 빌의 딸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미시즈 윌슨이 빌의 어머니를 거두어준 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빌의 다섯 딸 중, 첫째와 둘째가 이미 세인트 마가렛 중학교에 재학 중이고, 나머지 세 딸들도 그 학교를 보내는 것이 빌의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수녀원과 척을 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빌 펄롱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이후 빌 펄롱에게는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소설과 영화 시작부터 등장하는 식당 주인인 미시즈 케호는 빌 펄롱이 직원들의 저녁까지 챙겨주는 좋은 사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녀원과 문제가 있었다는 소식에, 미시즈 케호는 빌에게 수녀원과 잘 지내라고, 잘 풀린 여자애들은 모두 그 학교를 다녔다고 말합니다. 소설에서, 빌은 그런 케호에게 거스름돈을 되돌려주는 행동으로 반감을 표현합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각색에서 배제된 인물들 - 이웃 여성, 첫 번째 아이와 노인
야적장 길 건너 이웃집 여성은 아일린과 대비되는 인물입니다. 몹시 추운 날 새벽 자물통이 얼어서 빌 펄롱이 야적장을 열지 못하자, 주전자에 물을 데워주어서 문을 열도록 도와줍니다. 빌 펄롱은 이 여성과 결혼했다면 자신의 삶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빌 펄롱은 수녀원 사건 이후로, 다른 삶, 다른 곳을 상상했고, 그것이 자신을 버리고 영국으로 돌아간 아버지(이는 네드의 거짓말 때문에 빌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만)의 피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빌 펄롱은 윌슨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다가도, 이렇게 다른 삶을 꿈꾸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감정은 빌이 자신의 친부가 네드라는 것을 깨닫는 부분에서 각성됩니다. 네드는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녀원에서 빌 펄롱과 마주친 첫 번째 아이는 빌에게 강에 데려다달라고, 그게 안 되면 빌의 집으로 데려가주면 죽도록 일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냥 물에 빠져 죽고 싶다고. 그러나 빌은 아이를 도와주지 못한 채 수녀원에서 나옵니다. 이날은 알록달록 과일이 열렸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이 일은 최소 몇 달 전이 될 것입니다. 황급히 수녀원을 나온 빌이 길을 잃고, 어느 노인을 만납니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냐는 빌의 질문에 노인은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영화는 각색에서 빌과 마주친 첫 번째 아이를 두 번째 아이 세라와 결합합니다. 만남의 시기도 현재 겨울로 변경하고 영화의 시작에 이 만남을 배치합니다. 이 선택으로, 원작에서의 노인은 자연히 사라지게 됩니다.
수녀원 - 세라 레드먼드, 수녀원장
소설에서 빌 펄롱과 마주친 두 번째 아이, 세라 레드먼드는 석탄 창고에서 발견된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아기를 낳았고, 14주 된 아기를 수녀원이 데려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빌에게 아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합니다. 빌은 아기를 알아봐주지 못한 채, 크리스마스 미사를 봅니다.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세라, 미혼모로서 아이를 낳은 것도 같습니다. 다만, 어머니 세라에게는 미시즈 윌슨이 있었고, 세라 레드먼드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빌 자신이 세라 레드먼드에게 미시즈 윌슨의 역할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소설의 후반에 빌 펄롱이 아픈 네드를 찾아갔다가, 네드가 삼촌이냐고 닮았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미시즈 윌슨 집 위층에서 어린 아이가 밖을 내다보는 것을 본 빌은 수녀원에서 보았던 세라 레드먼드를 떠올립니다. 세라는 빌에게 내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봐달라고 했는데, 세라의 아기를 물어보지 않고, 수녀원장으로부터 돈을 받았고, 미사를 본 자신은 위선자였다고 빌은 자책합니다.
영화는 세라를 임신한 소녀로 각색하였습니다. 영화에서 빌 펄롱은 임신한 소녀를 수녀원에서 데리고 나왔기 때문에 앞으로 미시즈 윌슨이 세라를 품었던 것처럼 살아갈 것이라고 예상이 됩니다. 소설은 14주 된 아이에 대한 숙제가 남아있습니다. 영화의 각색은 타인을 구하고, 그로 인해 자신을 구원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게, 세라가 임신 중인 것으로 변경하여 완결성을 높였다고 생각됩니다.
수녀원장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악인입니다. 인종 차별, 남녀도 차별합니다. 수녀원의 부조리함에 나서려는 빌에게 빌의 딸들이 세인트 마거릿 학교에 입학하려는 것을 들먹이며 모른 척 하라고 협박합니다. 그리고 소설과 영화 모두, 수녀원장은 빌에게 이름을 이어갈 아들이 없어서 섭섭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빌은 당당히 말합니다. 우리 어머니도 원장님도 누구도 절반은 딸이라고, 자신은 어머니의 성을 따랐지만, 불편함이 없었다고 말입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빌 펄롱의 변화
빌 펄롱은 만약 미시즈 윌슨이 없었다면 어머니도 세라 레드먼드처럼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수녀원으로 가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장작을 줍기 위해 추위에도 거리를 헤매던 믹 시노트의 아들처럼 자신의 유년도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믹 시노트의 아들과 수녀원에 갇힌 아이들을 빌 펄롱이 외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빌 펄롱이 석탄 상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현재의 아늑함은 미시즈 윌슨 덕분에 가능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소설은 빌이 모든 것을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고도 말합니다. 이런 불안의 한 장면으로, 이른 아침 사제관 뒤쪽에서 어린 남자아이가 고양이 밥그릇에 담긴 우유를 마시는 것을 보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영화에서도 긴장감 있게 연출되었는데, 이 순간 빌의 감정은 자신이 이 아이처럼 되었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또한 빌의 어머니 세라와 수녀원에 갇힌 세라 레드먼드의 이름이 ‘세라’로 같은 것은, 빌이 어머니를 떠올리고 마음을 움직여 행동화하는 데 영향을 줍니다.
사소함과 기쁨 그리고 크리스마스
소설에서, 사소함이란, 상점에서 거스름돈을 받으면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처럼,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을 해냈을 때 기쁨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것이 소설의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크리스마스케이크를 준비하는 아일린이 딸들에게 산타할아버지께 편지를 쓰라고 할 때, 빌 펄롱의 생각이 인상적입니다. 바로,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라는 생각입니다. 아일린이 아이들에게 계획적으로 할 일들을 지시하는 상황에서 빌 펄롱은 숨막힘을 느끼는 것입니다. 영화도 이 부분에서 킬리언 머피의 표정을 보면 가족 안에서도 순간순간 생각에 잠긴 듯합니다.
크리스마스는 그 기쁨을 나누기 좋은 때이지만, 빌 펄롱이 추억하는 어린 시절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원했던 아버지도, 직소 퍼즐도 선물로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빌 펄롱은 미시즈 윌슨에게 찰스 디킨스의 소설책 <크리스마스 캐럴>을 선물 받습니다. 낡은 책이었지만, 책을 읽은 빌이 맞춤법 대회에서 상을 받았는데, 키가 한 뼘은 자란 기분으로, 자기가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돌아다녔다고 표현합니다. 윌슨이 베푼 사소한 선물을 꼼꼼히 읽은 소년 빌 펄롱, 그리고 그 행동으로 얻은 기쁨을 소설은 이렇게 그려줍니다. 빌 펄롱에게 크리스마스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타인을 구하면서 이뤄낸 자기 구원
소설에서 빌이 수녀원을 다시 찾을 때, ‘펄롱은 마치 자기 자신을 만나러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영화는 이 부분을 주제로 살렸다고 생각됩니다.
영화에서 빌 펄롱은 세라 레드먼드를 구하면서, ‘자기 구원’을 이루었다고 느꼈습니다. 수녀원을 다녀 온 뒤 빌 펄롱은 모든 공간에서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특히 현관 앞 복도와 세면대가 인상적입니다. 빌 펄롱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 오프사운드로 아이들의 행복한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빌은 바로 주방으로 가지 않고, 정갈하게 손을 씻습니다. 복도에 들어와 옷을 벗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그 순간이 빌 펄롱에게는 소설에서 말한 ‘멈춰 서서 돌아보는’ 순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식탁에서 아이들과 밥을 먹으며 크리스마스 선물을 이야기할 때, 아일린과 자고 있는 침실, 잠에서 깨어 창밖을 바라보던 거실 공간에서도 빌은 어린 시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영화는 계속해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여 보여주고, 특히 아일린과 침실에 누워있을 때에는 어린 빌 펄롱이 등장하기까지 합니다. 빌의 무의식 속에 있는 어린 빌과의 직면을 통해서 세라 레드먼드를 구하겠다는 빌의 동기를 확고히 하였습니다.
빌이 세라 레드먼드를 구한 것은, 어린 시절 혼자 울고 있던 자신을 만나고 구해낸 것입니다. 영화제작진들이 빌 펄롱이 세상을 구하는 영웅으로 해석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처럼, 빌은 단순한 영웅이 아닙니다. 미시즈 윌슨의 도움으로 자랐던 어린 시절, 해결되지 않은 아버지의 존재, 자신에게 닥쳤을지도 모를 어렵고 힘듦에 대한 불안함, 이 모두를 ‘멈춰 서서 돌아보고’ 자신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세라를 구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빌 펄롱에게 어린 시절의 빌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영화의 표현
소설의 분위기를 살려 내레이션을 쓸 것으로 예상이 되었지만, 영화는 내레이션을 쓰지 않고, 킬리언 머피의 연기로 빌 펄롱의 내면을 표현하였습니다. 각색 시, 아일랜드의 1980년대 남성의 느낌을 주고자, 빌 펄롱의 대사를 절제하려 했다고 합니다.
수녀원에서의 사건을 영화 시작부분에 배치하고,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기부터의 이야기로 압축했습니다. 수녀원에서 빌 펄롱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두 명의 아이를 한 명(세라 레드먼드)로 통일하면서 빌의 변화에 집중하여 구성하였습니다.
카메라가 빌 펄롱의 차 뒤, 등 뒤에서 따라가는 숏은 빌의 시점과 동행하고 빌을 관찰하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또 빌 펄롱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정보를 주어서 빌의 변화에 관객을 참여시켰다고 생각됩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1985년의 아일랜드가 사회적으로 어떤 위기에 놓여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면, 영화는 그 부분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지는 않습니다. 단적으로 라디오, TV를 통해 보여 지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또, 미시즈 윌슨을 통해 개신교도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원작의 표현보다는 덜 합니다. 미장센으로 당시의 아일랜드를 잘 보여주면서, 내용 면에서는 아일랜드를 넘어 보편적이고 개인적으로, 타인을 도움으로써 어린 시절의 자신을 구하는 ‘자기 구원’에 영화는 집중했습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소설이 마지막으로 의도한 부분을 사운드로 연출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소설에서는 소설이 끝난 이후에도 빌 펄롱이 세라 레드먼드와 함께 해야 할 것으로 예상되는 일이 있습니다. 세라가 낳고 빼앗긴 14개월 된 아이를 알아보아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 부분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라는 부분이 더 힘 있게 다가옵니다. 영화에서의 빌 펄롱은 임신한 세라 레드먼드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미시즈 윌슨이 세라 펄롱을 도와준 것처럼 앞으로 세라 레드먼드를 도울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빌 펄롱이 처음 등장하던 일상의 소리로 사운드가 채워집니다. 사소한 것들, 그것을 실천해서 느끼는 잔잔한 기쁨 그리고 일상은 계속된다는 느낌으로요.
‘이토록 사소한 것들’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Q&A, 토론]
❍ 사회자: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발제자의 생각이 저와 같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한경에세이에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서 감동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에서 킬리언 머피의 표정으로 잘 표현했다고 생각하는데,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내레이션으로도 표현해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이 영화는 어둡고 무겁고 불친절합니다. 이 소설은 펄롱의 심리가 그대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것을 킬리언 머피의 눈빛, 표정, 조명 등으로 유추해야하니까 불친절하다고 느껴지는데, 세미나에서 원작을 함께 비교해보니 잘 이해가 되었습니다. 피프레시 회원이신 정문영 선생님 참여해 계신데요. 영문학을 전공하셨습니다. 이 영화 어떻게 보셨는지요?
❍ 참가자 1: 안녕하세요. 정문영입니다. 제가 영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각색 부분이었습니다. 드라마를 전공하고 드라마 극작가 월시가 각색을 했듯이, 제가 전공한 극작가 해럴드 핀터(Harold Pinter)가 극작품만큼이나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각본을 썼습니다. 열 몇 편을 분석해서 제가 책 『해럴드 핀터의 영화정치성』(2016)을 쓰고, 그만큼 관심 있게 들었습니다. 현대 드라마의 거장들이 아일랜드에 많이 있습니다. 더블린 드라마 센터에 6개월간 있기도 하고 그래서 영화를 보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아일랜드는 영화의 배경인 1985년, 그 암울했던 80년대에서 90년대로 가면, 아일랜드가 ‘유럽의 병자’에서 회생을 해서 점차 극복을 합니다. 제가 2007년에 아일랜드에 있었는데, 그때는 ‘켈틱 타이거’(Celtic Tiger,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아일랜드를 상징적으로 부르는 말)라고 경제 붐을 일으켜서 영국보다 더 물가가 비싼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영화의 배경인 80년대는 굉장히 암울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거의 다뤄져 있지 않습니다. 석탄을 채취하는 것, 수녀원의 역할, 천주고와 개신교(Protestant) 사이의 갈등이 전면적으로 다뤄져 있지 않아서, 아마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원작도 읽지 않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아일랜드의 분위기 보다는 힘없고 약자를 착취하는 제도적 문제, 사회적 문제를 생각할 것 같습니다. 원작을 모르더라도 상당부분 빌 펄롱의 심리적인 부분들, 그가 만나는 사람들, 마을, 수녀원 등 그야말로 Small Things를 느끼게 해주어서 각색을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라를 구함으로서 자신을 구하는 것이라는 발제 잘 들었습니다. 생각을 더하자면, 빌의 주변에는 수녀원의 수녀원장, 자신의 아내, 자신을 길러준 미시즈 윌슨, 다섯 명의 딸 등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는 아닙니다. 빌의 구원을 위해서 빌 본인이 구원자(rescuer)가 되어서 자신을 구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빌 스스로가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죠. 아일랜드라는 나라가 80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소설은 네드가 아들 빌에게 너는 좋은 혈통이라고 믿게 하기 위해서 영국 친척의 혈통일지도 모르겠다고 하고, 미시즈 윌슨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빌을 보호하는데 개신교도이고, 약간은 우익적이고 남성적인 것이 스며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유럽의 병자로 불린 아일랜드의 상황에서 자신의 에고(ego)를, 국가의 자존심을 연약하고 평범한 사람, 영웅이 아닌 사람이 용기 있는 행동을 그려내면서 인간성의 회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소설에서 표현한 ‘사소한 것’을 보았을 때, 아이들이 성실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는 것이, 맹자의 ‘인의예지’에 측은지심과 남을 대할 때 예를 갖고 대하는 인간성의 회복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 멈춤(pause)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창 아일랜드의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이런 사소한 것의 중요성, 인간에 대한 감정, 공감(Empathy)의 중요성을 표현하는데 프로파간다적이지 않게 거부감 없이 표현해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 선생님께서 의문을 가지신 부분이, 세라를 구원하면서 자기를 구원했다는 점입니다. 세라와 자기를 병치시키면서, 윌슨이 자기를 구해주지 않았으면, 자신도 세라 신세였을 것이다 하는 부분들을 영화에서 보여줍니다.
발제자 : 영화를 보면, 빌이 약자에게 손을 내미는 영웅인 것은 당연한데, 그 과정에서 아내부터 빌의 행동을 말리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빌의 가정과 딸들을 생각한다면 그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한다는 상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빌은 세라 레드먼드를 구하는데, 그 과정에서 계속된 기폭제는 어린 시절의 빌 펄롱 자신입니다. 세라의 이름을 확인한 뒤, 엄마 세라와 세라 레드먼드가 동일시되면서, 세라 레드먼드를 구하는 것이 엄마 세라, 그리고 빌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사회자 : 사회를 구하는 히어로라기보다 ‘자기구원의 뿌리’가 개인한테는 더 가깝게 선행이나 큰일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방증하는 것이 될 것 같습니다. 이화정 선생님 영화 어떻게 보셨는지 말씀 들어보겠습니다.
참가자2 : 영화를 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킬리언 머피의 클로즈업 숏, 빌 펄롱의 얼굴이었습니다. 얼굴이 심리상태를 잘 보여주었기 때문에 영화가 좋았습니다. 펄롱의 얼굴이 너무 지적이고 잘 생겼습니다. 킬리언 머피는 평범한 사람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 있으면서 내적으로 갈등을 계속하는 표정, 자기주장을 확실하게 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갈등하는 펄롱을 잘 연기했다고 생각합니다. 수녀원장이 펄롱에게 딸들의 학교 문제를 들먹이며 협박할 때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가 어두운 것도 펄롱의 우울함이 잘 전해져서 좋았습니다. 빌은 수녀원의 소녀들처럼 최악의 상태로 떨어질 수 있었음에도 미시즈 윌슨의 도움으로 그런 상황을 면했습니다. 그래서 행운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빌이 어린 시절에 정말 갖고 싶은 퍼즐을 못 받았을 때의 좌절감이 표현되어 마음에 잘 다가왔습니다. 퍼즐을 그렇게 갖고 싶어 했는데 아무도 사주지 않았습니다.
사회자 : 어른들이 빌을 챙겨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빌을 그렇게 대한 것이지요.
참가자2 : 그리고 생각나는 영화들이 많았습니다. 피임을 하지 못하는 옛 시절에 낙태를 시키면서 돈을 버는 여성들이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그 여성의 앞날을 구원해준다는 생각을 가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 영화의 수녀원도 착취하면서 구원해준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디 덴치(Judi Dench)가 주연을 맡은 영화 <필로메나(Philomena, 2013)>도 아일랜드의 수녀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디 덴치가 자신이 버렸던 아들을 찾으러 가는 여정을 그리며 감동을 준 영화였습니다. 끌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감독의 <여자 이야기(Une affaire de femmes, 1988)>에서 이자벨 위페르(Isabelle Huppert)가 주연을 맡았는데, 이 영화도 낙태를 도와주며 돈을 버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당시에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여성들, 낙태를 불법으로 비위생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많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최근작인 <바늘을 든 소녀(The Girl with the Needle, 2024)>에는 임신한 소녀들을 죄인으로 생각하고 죄책감 없이 착취하는 수녀원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사회자 : 다양한 영화들과 함께 이 영화의 의미를 증폭시켜주시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한상준 선생님은 영화 어떠셨나요?
참가자3 : 저는 영화 연출에 관심이 있어서 연출 측면에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상대에 대한 관심의 의미로, ‘숏-리버스숏’을 잘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펄롱이 처음에 수녀원에 강제로 들어가는 소녀를 보게 될 때, 어두운 쪽에 있다가 리버스숏으로 전환합니다. 이후 청소하던 소녀가 도와달라고 할 때도 시점숏과 리버스숏을 씁니다. 숏과 리버스숏을 윤리나 도덕적 딜레마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잘 활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구원’을 말씀하셨는데 감독이 연출한 것을 보면 타당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펄롱이 이중 프레임으로 보입니다. 방에 갇혀있는 것처럼 시각화가 됩니다. 수녀원으로 끌려가는 소녀를 발견할 때에도 펄롱은 어두운 공간, 프레임 안에 갇혀있는 상태입니다. 마지막에 영화에서 혼자 외롭게 있던 프레임으로 세라와 같이 들어가는 것으로 영화가 끝납니다. 이전에는 펄롱이 혼자서 거울을 보고 혼자만 거울에 반사되는데, 마지막에는 뒤에 세라가 함께 거울에 비칩니다. 감독은 이렇게 심플한 방법으로 명확하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를 생각한다는 것이 프레임에 혼자 있다가 같이 있는 것, 혼자 있던 프레임 속으로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으로 명확하게 주제를 전달하는 것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빌이 걸어갈 때의 트레킹 숏은 정직하게 걸어가서 소녀를 구해 나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빌이 세라를 구하러 걸어가는 장면에서의 트레킹숏, 세라를 데리고 나와서 거리를 걸어갈 때 거리를 두고 롱숏으로 트레킹하여 따라갑니다. 그러한 자연스러운 연출, 사소한 연출로 묵직한 메시지를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간결한 연출 방식이 준 큰 울림 대하여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발제자 : 트레킹숏 저도 좋았습니다. 펄롱의 단단한 뒷모습을 따라가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숏-리버스숏은 펄롱의 감정 변화를 빠르게 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중프레임에 가둬놓는 연출도 좋았습니다. 수녀원에서 마루를 닦는 소녀들을 바라볼 때의 프레임, 집에서 펄롱이 창밖을 바라볼 때는 벽이 이룬 프레임 속에 창틀의 프레임이 있고 그 속에 펄롱이 있습니다. 거리에서 여성에게 추근거리는 남성을 바라보는 펄롱의 모습이 과거 창밖을 바라보는 세라 펄롱과 연결되기도 하고요. 어두움에 관해서도, 현재 펄롱의 집은 어둡게 표현되지만, 어린 시절의 펄롱이 지냈던 윌슨의 집은 밝고 포근하게 연출되었습니다. 어린 시절과 현재의 대비를 간결한 연출로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팀 밀란츠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그 시절의 아일랜드를 그리고 싶어서 축축하고 어두운 톤으로 연출했고, 소설 속 펄롱의 시점으로 묘사된 배경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고 밝힌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사회자 : 한준 선생님, 영화 어떻게 보셨는지요?
참가자 4 : 소설 원작이 가진 힘이 있었기 때문에 영화가 좋게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는 또 영화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영화가 과거 회상 씬을 잘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황영미 평론가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어린 시절과 현재를 병치하면서 회상씬이 있었기 때문에 이입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과거 회상씬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발제자 : 원작을 각색하는 데에 과거 병치를 선택한 제작진의 결정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는 플래시백을 쓰거나 과거를 병치하면 다소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쉽게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과거부터 시작해서 현재로 오거나, 현재에서 시작해서 과거로 크게 갔다가 다시 현재로 이어오는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현재와 과거가 병치되는 원작이 가진 구성을 살려서 효과적으로 잘 표현했고, 과거로 넘어가는 브릿지도 잘 썼습니다. 이는 훌륭한 원작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연출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발표 들어주시고, 여러분들의 귀한 말씀 덧붙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회자 : 발제와 참가자분들의 다양한 관점이 더해져서 좋은 원작, 좋은 영화, 뜻깊은 세미나가 된 것 같습니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다음 달에는 이수원 영화평론가(현 전남대 교수)이 <서브스턴스>를 발제해주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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