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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202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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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
이시현 2023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때때로 나는 내 부모님을 보며 경외감과 의구심을 동시에 느낀다. 나로서는 그들이 왜 나를 위해 그토록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왜 나의 성취를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개 자식들은 부모의 내리사랑을 당연시하지만, 이익추구의 관점에서 자식을 낳고 양육하는 것은 지극히 비합리적인 처사이다. 그들의 헌신이 유전자의 명령 때문이라는 실없는 반박은 하지 않길 바란다. 만약 우리가 그저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면, 작금의 저출생 상황을 설명할 수 없으니 말이다. 부모의 애정은 차가운 머리가 아닌 따뜻한 심장에 기반한다. 그리고 드림웍스는 인류가 맞닥뜨린 재난 앞에서 우리 모두가 잠정적으로 품고 있는 이 ‘따뜻한 심장’에 호소한다.
<와일드로봇>의 주인공, ‘로줌 유닛7134’는 최첨단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동시에 갖춘 로봇공학의 결정체이다. ‘로줌 7134’는 본래 어느 가정집에서 활용될 운명이었지만, 불시착 사고로 인해 야생의 숲 한복판에 떨어진다. 야생동물은 자신들과는 사뭇 다른 ‘로줌 7134’를 환영하지 않고, 급기야 곰의 습격을 받기까지 한다. 산비탈을 구르는 과정에서 기러기 둥지를 깔아뭉갠 ‘로줌’은 둥지에서는 단 한 마리의 알만이 살아남았음을 깨닫는다. 상황에 대해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낀 ‘로줌’이 새끼 기러기를 독립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받아들임으로써 ‘로줌 7134’는 ‘브라이트빌’의 어미, ‘로즈’로 거듭난다. ‘그것’이 ‘그녀’로, 그리고 로봇-기러기라는 이질적인 관계가 부모-자식 관계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브라이트빌’은 다른 기러기에 비해 덩치가 작게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로봇 어미를 둔 여파로 일반적 기러기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행동양식을 지닌다. ‘로즈’와 함께 ‘브라이트빌’을 양육한 여우, ‘핑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연”에서 ‘브라이트빌’은 잡아먹히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정도이다. ‘브라이트빌’은 자신이 다른 기러기들과 다르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끼는 한편 ‘로즈’로 인해 자신들의 가족들이 죽었다는 점에서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급기야 ‘브라이트빌’은 가출을 감행하기까지 하지만 ‘로즈’의 계속된 헌신으로 ‘브라이트빌’은 끝내 성공적으로 독립해 다른 기러기들과 숲을 떠나게 된다.
프로그램대로 행동해야 마땅한 로봇이 양육이라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뛰어넘는다니, 정말 아동 애니메이션이기에 허용가능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비현실적 설정은 대다수의 부모-자식 관계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헌신은 약육강식의 법칙, 무엇보다 우리 내면에 탑재된 이기적 합리성이라는 프로그램을 뛰어넘는다. 많은 부부들은 단순히 양육이 부담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식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줄 수 없기 때문에 출산을 포기한다. 더 많은 사랑을 줄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사랑하기를 포기한다는 점에서 부모의 헌신은 신비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수식할 방법이 없다.
드림웍스는 만약 우리가 자식을 위해 이기적 본성을 억누를 수 있다면,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겨울이 되고 한파가 찾아오자 ‘로즈’는 숲 속의 동물들을 자신의 보금자리로 인도한다. 처음에는 본능에 이끌려 다투던 동물들도 ‘로즈’의 헌신에 감복하며 이 순간만큼은 공존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어느새 ‘로즈’는 숲 전체를 돌보는 어머니가 되었으며, 봄이 되어 무리들과 숲에 돌아온 ‘브라이트빌’ 역시 마침내 ‘로즈’를 어머니로 인정한다.
당연하게도 이 우화에 대해서는 몇 가지 비판과 반문이 가능할 것이다. 정작 작중의 인류는 합리성의 극단을 추구하며 초고도 문명을 이룩했는데, 실체도 없는 따뜻한 가슴이 정말 인류에게 도움이 될까? 기후위기 등 각종 재난 앞에서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생존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기심 아닐까? 자식을 향한 부모의 애정이 공동체 전체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일까? 모두 지극히 타당하며 실로 반박이 어려운 비판들이다. 차갑다 못해 엄동설한처럼 느껴지는 머리들 앞에서 따뜻한 가슴이 할 수 있는 말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태까지 항상 세상을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은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들의 낙관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로 말미암아 어린이들과 부모가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면, 나는 이 동화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할 각오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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