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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라> : 거리의 윤리, 혹은 불가능한 선택들2025-03-24
영화 <아노라> 스틸컷 이미지



<아노라> : 거리의 윤리, 혹은 불가능한 선택들 


장지애 2024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션 베이커의 <아노라>는 우리가 익숙하게 소비해 온 서사들, 이를테면 사랑, 성공, 구원과 같은 키워드로 정돈된 동화적 문법이 자본의 언어로 어떻게 변형되고, 전유되는 지를 예리하게 추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노라>에서 애니의 상승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며, 귀환은 예정된 절차다. 그것은 실패한 욕망의 서사라기보다는 애초에 욕망 자체가 사전에 봉쇄된 구조, 시스템 내부의 자가 반복적 메커니즘이다. 이동은 허용되지 않고, 이탈은 기획되지 않으며, 탈주는 언제나 귀환의 다른 이름으로 호출된다. 영화는 이 구조적 불가능성을 단지 암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영화적 질서의 중심 축으로 삼아 서사를 조직한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스트립 클럽의 현란한 조명, 리드미컬한 춤, 벌거벗은 몸들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일종의 스펙터클이다. 그러나 영화가 진정 주목하는 지점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과잉된 이미지들 사이에서 불쑥 침투하는 정지의 순간이다. 예컨대 신데렐라 서사의 기점처럼 보이는 클럽—성노동자와 이를 구매하고 소비하려는 구매자의 욕망과 판타지가 얽힌 이중적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던 화려한 조명은 일순간 아득한 여명(黎明)으로, 인공적 사운드는 도심의 잔향으로 전환되고, 그와 동시에 화장기 없는 흐릿한 얼굴로 거리(street)를 걷는 애니의 모습이 스크린을 가로지른다. 환상이 걷힌 자리, 그것은 동화적 서사의 외부이자, 자본이 약속한 환상의 바깥이 불시에 도래하는 지점이다. 


애니의 퇴근길은 <탠저린>의 신디와 알렉산드라,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무니와 핼리, <레드 로켓>의 마이키가 머물고 떠돌던 공간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이들의 궤적은 결국 하나의 장소, 즉 ‘거리’로 수렴된다. 베이커의 영화는 언제나 ‘거리’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그 위에 인물들의 삶과 욕망, 탈주와 귀환의 자국을 그려낸다. 여기에서 ‘거리’란 착취와 해방이 함께 일어나는 곳이지만, 동시에 그 두 가지가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밀어내고, 밀려난 것은 다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비집고 들어오는 역동 속에 베이커의 거리는 구성된다. 


이러한 지점에서 애니는 이전 작의 인물들과는 분명히 다른 결을 드러낸다. 거리 위에 환상을 펼치고 노동의 현실과 환상의 서사를 겹쳐 쓰려했던 기존 인물들은 나름의 생존 방식과 감각을 발휘하며 일시적인 연대와 자율성을 실현해낸다. 비록 그것이 지속되지 않을지라도. 그들은 노동의 현실 위에 환상을 덧씌우거나, 제도 바깥의 틈을 기민하게 포착하면서 거리라는 한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끊임없이 다시 그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거리란 단순한 억압의 공간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환상이 출현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이때의 환상은 기존 질서가 일시적으로 비켜나고, 새로운 감각과 관계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틈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애니의 경우, 거리와의 접촉은 애초부터 거부된다. 그녀는 귀를 막고 거의 눈을 감은 채로 거리를 통과한다. 애니의 퇴근은 거리와의 감각적 접속이 아니라, 거리로부터의 신체적 분리로 읽힌다. 방에 도착한 뒤에도 그녀는 마치 현실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분리하려는 듯이 안대를 착용한 채 침대에 납작 엎드린다. 거리의 풍경은 좁은 창문 틈으로만 비껴 지나가고, 그 너머로 들어오는 것은 지하철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간헐적인 밝음과 어둠, 그리고 좀처럼 잠들 수 없게 만드는 도시의 기계적 소음뿐이다. 그 모든 감각을 봉쇄하려는 애니의 자세는, 거리로부터 이탈하려는 시도이자, 거리에서 서서히 지워지려는 존재의 마지막 몸짓처럼 감지된다. 


이처럼 애니는 거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자 하는 뚜렷한 욕망을 품고 있으며, 비극은 바로 그 욕망 속에 잠복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을 놓고 보면, 애니는 단순한 탈주의 인물이 아니라, 베이커가 지금껏 반복해 온 인물들의 궤적을 메타적으로 재현하는 장치에 가깝다. 특히 성노동자를 다루는 방식에서 베이커는 자주 유사한 서사적 경로를 따라가는 듯 보이지만, 그 반복은 단순한 복제가 아닌 감각의 조율과 시선의 이동을 동반한다. 작품을 거듭할수록 그의 카메라는 인물과의 물리적 거리를 줄이며, 점점 더 밀착된 시선으로 신체의 표면, 표정의 떨림, 숨소리의 리듬까지 포착하려 애쓴다. 과거 작품들이 낯선 인물들을 익숙하고 친근한 도시의 풍경 안에 병치시키며, 이들을 그 일상적 질서 안으로 조심스럽게 동화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아노라>에 이르러서는 그 시선이 훨씬 더 내밀해진다. 이제 카메라는 인물과 배경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기보다, 인물의 감각 내부로 침투해 세계를 그 안쪽에서부터 분해해 나간다. 결과적으로 베이커의 영화는 서사 외부의 질서를 향해 확장되기보다, 서사 내부의 미세한 틈과 균열 속으로 카메라를 밀어 넣으며, 안에서부터 구조를 흔들기 시작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노라>의 신데렐라 서사를 다시 바라보자. 거리에서 지워진 몸은 이반의 성(城)으로 이전되고, 그 이동은 동화적 서사의 절정, 즉 결혼이라는 형식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그 결말은 ‘너무도 당연하게’ 해피엔딩으로 봉합되지 않는다. 구조는 애초부터 그녀의 도착을 예정하지 않았으며, 이 서사는 처음부터 파국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애니가 진입하려 했던 ‘성’—즉 자본과 권력, 안정된 계급을 상징하는 공간—자체가 그녀 같은 존재의 입장을 전제로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장소가 아니라, 철저히 선택받은 이들을 위한 닫힌 구조다. 그 내부는 상류층만이 공유하는 언어, 문화, 가족 규범, 법적 장치들로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애니는 이 모든 질서에 귀속된 낯선 외부자일 뿐이다. 그녀의 존재는 이 체계 안에서 언제든 철회 가능한, 임시 초대자에 불과하다. 


영화 <아노라> 스틸컷 이미지2


영화는 이 점을 ‘계약’이라는 형식을 통해 명확히 드러낸다. 이반의 파티에 참석한 애니는, 그와 하룻밤을 보낸 뒤 일주일간 그의 파트너가 되어 달라는 제안에 계약 형식으로 합의한다. 그 후 파티복 차림으로 이반의 저택을 나서는 애니는 분주히 움직이는 가사 노동자들 사이를 가로지른다. 이 장면은 그녀와 ‘직업 노동자’ 사이의 경계를 흐리며, ‘파트너(성노동)’라는 명명 아래 수행된 감정 노동이 실제로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압축한다. 애니가 이반과 맺은 관계는 일주일간 유효한 합의이며, 그 효력은 언제든 종료될 수 있는 불안정한 협상에 불과하다. 물론 이러한 불안정성은 ‘결혼’이라는 제도적 명명 아래, 마치 무기한 지속 가능한 관계처럼 위장된다. 그러나 그것이 제공하는 안정감은 실상 허구에 가깝다. 


이반의 저택에서 이루어진 계약은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 간의 합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노동력의 조건부 거래를 정당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특히 성노동의 맥락에서 ‘계약’은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노동을 제도적으로 승인하는 형식을 띠면서도, 그 승인 자체가 얼마나 취약하고 가역적인지를 드러낸다. 애니가 이반과 맺는 관계는 단지 정서적 결합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일시적 서비스 계약의 형태이며, 언제든 폐기될 수 있는 취약한 결합이다. 


영화 <아노라> 스틸컷 이미지3


이 지점에서 베이커는 성노동을 낭만화하거나 단순히 고발하지 않는다. 그는 성노동을 하나의 생존 전략이자 제도 바깥에서 작동하는 감각적 노동의 한 형태로 인식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신자유주의적 위계에 편입되어 있는지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즉, 그는 성노동을 도덕적으로 판단하기보다, 그것이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얼마나 쉽게 착취와 배제의 경계로 밀려나는지를 시각화한다. 계약 아래 체결되는 모든 관계—결혼, 연애, 가족—는 그 위에 쌓인 정서적 서사와는 달리, 자본의 계산과 교환 가능성에 기반해 있다는 점을 영화는 은근하면서도 집요하게 강조한다. 


이처럼 베이커의 윤리는 성노동자를 중심에 두는 동시에, 그들을 둘러싼 구조의 잔인함을 숨기지 않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그는 인물들의 선택을 존중하되, 그 선택이 실제로 얼마나 협소하고 구조에 의해 이미 예정된 경로인지, 그 자유가 얼마나 제한된 조건 안에서 작동하는지를 끝까지 캐묻는다. 그런 점에서 그의 영화 속 ‘계약’은 신자유주의 질서의 축소판이다. 그리고 그 맹점은, 자유로운 선택 혹은 선택으로 인한 구원이라는 환상이 자본의 언어로 얼마나 쉽게 전유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베이커는 이 구조의 내장을 뒤집어 보이듯, 애니를 다시 거리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영화는 유사한 처지의 인물들을 병치하며, 이 결혼의 파국이 단지 개인의 실패가 아닌, 구조적 배제의 표면임을 드러낸다. 결혼을 무효화하려는 이반의 부모와 그 대리인들, 그리고 이를 지키려는 애니의 사투는 서로 대립하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결국 모두 같은 체계의 반복된 연산으로 귀결된다. 즉, 이들의 행위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시스템의 상반된 작동 방식에 가깝다. 


그렇다면 애니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자유’라는 단어는 어쩌면 이 영화의 맥락에서는 과도하게 낭만적일 수 있다. <아노라>가 보여주는 것은 자유의 획득이 아니라, 자유를 요청할 수조차 없는 조건에 놓인 인물의 위치다. 베이커는 그녀를 다시 거리에 세워놓는다. 더 이상 ‘성’이 아닌 거리(그녀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구조가 허용한 유일한 자리다). 이 거리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자본의 위계에 따라 분할된 공간 속에서 배제된 자들이 유예적으로 머무는 지형이다. 


영화 <아노라> 스틸컷 이미지4


2부에서 전개되는 로드무비 형식은 인물들이 놓인 구조적 위상을 보다 선명하게 가시화한다. 토로스, 가닉, 이고르, 그리고 애니는 끊임없이 이동하지만, 그 여정은 어떤 도착이나 탈출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이들은 도달 불가능한 공간의 경계를 따라 배회하며, 그 어디에서도 완전히 정박하지 못한 채 유예된 삶을 이어간다. 구조는 이들을 완전히 포섭하지도, 완전하게 추방하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리를 갖지 못한 자들이자, ‘자리 없음’ 자체로 기능하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들은 하나의 불안정한 노동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집 없는 이들이 아니다. 언제든 호출되고, 언제든 대체 가능한 조건부 계약의 주체들이다. 자본은 이들에게 고용을 보장하지 않지만, 그들의 유예된 상태를 지속적으로 필요로 한다. 이들의 움직임은 탈주라기보다는, 정착할 수 없는 존재들이 허락된 틈 안에서만 순환하는 생존의 리듬이다. 


이때 성노동은 단순히 예외적인 노동이 아니라, 오늘날 신자유주의 노동 질서의 가장 날것의 형태로 부상한다. 애니의 위치는 감정이 거래되는 관계의 일환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는 유연 노동자의 초상에 가깝다. 거리 위의 성노동자는 자신의 감각, 몸, 정체성까지도 거래의 대상이 되는 존재이며, 이 노동은 언제든 호출되거나 폐기될 수 있는 전시적이고 가역적인 계약 노동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성노동은 신자유주의 노동의 구조와 밀접하게 닮아 있지만, 동시에 그것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노동은 도덕적 낙인, 젠더 권력, 도시의 공간 질서와 중첩되며, 거리 위의 성노동자는 단지 보호받지 못한 노동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사회적으로 문제화된 타자로 위치하게 된다. 이들이 서 있는 ‘거리’는 더 이상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누가 노동자로 승인받고, 누가 끝내 경계에 머물러야 하는지를 구획하는 공간적 분할의 선이다. 베이커는 거리 위의 성노동자를 통해 하나의 직업군을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자본주의적 질서 안에서 어떻게 위계화되고, 계약이라는 명목 아래 얼마나 쉽게 유통되고 배제되는지를 질문한다. 그리하여 성노동은 단순한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 오늘날의 삶이 어떤 전제 하에서만 가능해지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형식이 된다. 


영화 <아노라> 스틸컷 이미지5


그러한 맥락에서 2부의 로드무비는 이중의 구조를 갖는다. 하나는 탈주의 가능성을 가장하는 서사처럼 보이지만, 다른 하나는 그 탈주의 불가능성, 혹은 구조의 외부조차 온전히 도달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애니의 여정은 자유를 향한 진입이 아니라, 자유의 조건 자체가 얼마나 선택적으로 배분되고, 구조적으로 봉쇄되어 있는지를 폭로하는 서사적 곡선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베이커는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소비해 온 ‘선택’, ‘사랑’, ‘구원’의 서사들을 미세하게, 그러나 결정적으로 어긋나게 만든다. 


애니가 다시 도달한 그 거리는 더 이상 도피의 끝도, 낙오의 증표도 아니다. 그것은 한 번의 실패를 통과한 자만이 닿을 수 있는 장소, 구조의 윤곽을 감각한 존재가 다시 발 딛고 서는 현실의 바닥이다. <아노라>는 그 자리에 선 인물을 응시하면서, 감상이나 순진한 연민 대신 ‘순수한 시선’으로의 회귀 자체를 조용히 차단한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한 시선’이란, 인물의 감정을 구조적 맥락 없이 소비하거나, 동화적 구원의 도식에 아무 의심 없이 감응하려는 관습적 감상 태도를 가리킨다. 착한 여성이 사랑을 통해 계급을 초월하고, 보호의 언어 속에 안착하는 낙관적 환상은 베이커의 세계에서는 애초부터 허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 서사의 깊은 밑바닥—배제와 거래의 논리—를 끝까지 추적하면서, 관객이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기보다, 그 감정이 배치된 구조 자체를 감각하도록 이끈다. 


영화 <아노라> 스틸컷 이미지6


더구나 이러한 시선은 성노동자를 피해자이거나 낭만적 구원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이분법적 틀과도 맞닿아 있다. <아노라>는 이 도식을 의도적으로 붕괴시키며, 인물의 감정과 선택을 동정도 비난도 아닌, 구조의 감각을 통해 재배열하도록 강제한다. 그 ‘순수함’은 실은 한 번도 실재한 적이 없으며, 설령 존재했다 하더라도, 구조 바깥에서는 결코 기능하지 못하는 시선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어떤 말도 설명도 허락되지 않는 그 장면—는 결코 감정의 귀결이 아니라, 구조를 통과한 감각의 흔적에 가깝다. 엔딩 직전에 포착되는 이고르와 애니의 얼굴 클로즈업과 쇼트의 연쇄가 만들어내는 응시는, 감정조차 계약의 언어로 거래되던 세계의 이면을 통과한 자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미세한 진동을 품고 있다. 그 진동은, 말로는 명명할 수 없는 어떤 감각의 층위에서, 구조의 균열을 통과한 자들의 응시로만 발현된다. 


두 사람이 마주 바라보는 짧은 응시의 순간은, 이고르가 애니에게 반지를 건네는 직전의 장면과 공명한다. 반지를 돌려받은 애니는, 이내 자신의 신체를 통해 어떤 응답을 수행한다. 그 행위는 애정의 표현이라기보다는, 한때 파기된 계약을 다시 쓰려는 듯한 몸짓이다. 다시 말해, 감정의 이름을 빌려 또 한 번 계약의 질서를 복원하려는 시도. 한 번은 실패했던 제도적 관계를 이번엔 거리라는 경계 바깥에서 성립시켜 보려는 일종의 재협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복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반지와 섹스가 등가로 교환되는 듯했던 순간은 곧 무너지며, 두 인물은 그 논리로부터 미세하게 이탈한다. 


애니는 이고르의 품에 안긴 채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그 울음은 사랑도, 분노도, 구원도, 절망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언어도 아직 닿지 못한, 감정 이전의 감각이며, 구조의 언어를 이미 몸으로 통과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미세한 윤리적 떨림이다. 이 울음은 더 이상 계약의 논리로 포섭되지 않는 감각, 말과 제도의 바깥에서 겨우 출현하는 존재의 잔여다. 애니는 구조로부터 도피하지 않지만, 그 구조를 감각한 채로 잠시 머문다. 그리고 그 감각은, 마침내 도식화되지 않는 장면으로, 영화의 엔딩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암전. 와이퍼 소리만이 화면을 가로지른다. 그것은 세상의 흐름이 여전히 구조의 리듬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무언의 진술처럼 들린다. 

  

베이커의 카메라는 바로 이 지점을 끝까지 붙든다. 그는 구원의 확신을 말하지 않으며, 감정의 정명(正名)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대신, 끝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다시 거리에 발 딛고 서는 장면을 통해, 환상이 파열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감각의 윤리, 혹은 응시의 지속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아노라>는 단지 신데렐라 서사의 반전을 꾀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동화가 무너지는 과정을 끝까지 따라가며, 그 파열 이후에 남은 감정과 감각, 그리고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의 윤리에 대해 묻는다. 구조의 윤곽은 더 선명해졌고, 구원은 더 요원해졌으며, 감정은 말해지지 않은 채로 가장 오래 머문다. 


결국 영화는 “무엇이 가능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끝내 가능하지 않았는가?”를 되묻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 앞에 잠시 멈추어 선다. 애니의 눈물을 함께 감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눈물이 흘러내리는 구조의 온도를 이제는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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