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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 : ‘우리’라는 서사의 가능성202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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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 ‘우리’라는 서사의 가능성
장지애 2024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반박지은 감독의 <두 사람>은 36년 동안 독일에서 함께 살아온 김인선과 이수현의 삶을 담아낸다. 영화는 그들이 걸어온 길을 단순한 과거 회고로 환원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몸과 시간 속에서 되새긴다. 파독 간호사, 이민자, 레즈비언 커플이라는 정체성의 층위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특정한 서사로 한정 짓지 않은 채, 정체성의 문제를 넘어 관계의 지속성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윤리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한다.
영화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손을 살짝 맞잡은 두 사람의 사진이다. 반박지은 감독이 처음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색색의 목도리와 단정한 코트를 차려입은 두 사람은, 나란히 선 어깨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거리 속에서 겨울의 냉기를 무색하게 할 만큼 은은한 온기를 품어낸다. 감독의 내레이션이 흐르는 가운데 영화는 사진 속에 응축된 시간과 관계를 서서히 풀어내는 과정처럼 감각된다.
두 사람의 일상으로 자리를 옮긴 영화는, 담담하지만 결코 무심하지 않은 시선으로 두 얼굴을 응시한다. 익숙한 공간 속에서 반복되는 몸짓과 시선, 나직한 대화가 흐르는 동안, 영화는 얼굴을 통해 관계의 축적된 시간을 더듬는다. 주름 하나하나, 표정의 미세한 흔들림, 빛에 따라 달라지는 피부의 결까지. 화면 속 얼굴은 단순한 초상을 넘어 삶의 흔적을 품은 풍경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화의 중심에 선 두 사람의 얼굴엔 모든 것이 축적되어 있으나, 정체성을 결정짓는 요소들은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실상 <두 사람>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갈등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며, 이들의 정체성에 관해 치열하게 해명하지도 않는다. 특정한 사건도 극적인 변화도 없이 흘러가는 두 사람의 일상 속에서, 영화는 마치 어떤 핵심적인 이야기가 의도적으로 삭제된 듯한 인상을 풍긴다. 다만 이것은 기존의 퀴어(Queer)영화가 정체성을 드러냄과 인정받음의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관점에서 비롯된 인식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내포한 정체성의 문제는 특정한 언어로 정의되지 않은 채, 몸의 흔적과 함께한 세월 속에서 자연스럽게 감각된다. 결국 영화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퀴어영화에서 기대해 온 특정한 가시성의 방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영화 <두 사람>은 오히려 정체성이 아닌 관계를, 선언이 아닌 지속을, 사건이 아닌 시간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퀴어영화의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이 지점에서 느슨하게나마 한국 퀴어영화의 흐름을 짚어보자면, 한국 영화에서 퀴어 정체성은 종종 부재하거나 은폐된 채로 존재해왔다. 1990년대부터 형성된 독립영화의 퀴어 서사들은 ‘드러남’과 ‘지워짐’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는 방식으로 구축되었으며, 정체성은 직접적으로 발화되기보다 특정한 기호와 은유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되곤 했다. 이러한 경향은 퀴어 주체를 사회적 억압과 갈등의 구조 속에서 정의하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많은 경우, 퀴어 주체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거나 사회적 편견과 충돌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이야기’가 된다. 즉, 정체성은 경험되기 이전에 설명되어야 하는 것, 혹은 타인에게 인정받는 과정 속에서만 서사화될 수 있는 것처럼 기능한다. 이는 퀴어 캐릭터를 존재 자체로서 다루기보다 끊임없이 정체성을 입증하고 증명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정체성의 문제는 가시성과 은폐의 긴장 속에서 형성되며, 영화 속 퀴어 주체는 서사적 갈등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 서사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영화는 이미 함께 살아온 두 사람의 시간 자체를 보여줄 뿐이며, 그 관계는 증명될 필요 없는 소여(所與)로 자리한다. 물론 영화는 두 사람의 과거를 사진으로, 기록으로, 스스로의 발화로 채집하는 데에도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순히 ‘그땐 그랬지’라고 과거를 추억하는 회상의 도구가 아니라, 지금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영화 속에 자리한다. 즉, 영화에서 과거의 흔적들은 기억 속에서만 머물지 않고 현재의 삶과 직접 맞닿아 있으며, 두 사람이 여전히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대신, 영화는 늙음과 돌봄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가 포착하는 것은 돌봄이 법과 제도의 언어 속에서 어떻게 요구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 관계의 지속성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에 대한 문제다. 인선이 암을 진단받은 후, 수현이 보호자로 인정받기 위해 결혼을 선택하는 과정은 제도의 필요성을 드러내지만,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그 너머에 있다. 결혼이 관계를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관계가 지속된 결과로써 제도가 요구된 것임을 보여준다. 돌봄은 단순히 법적 권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며, 법적 승인이라는 맥락에 가두기에는 더 깊은 윤리적 층위를 내포한다.
<두 사람>은 법적 승인이라는 틀을 벗어나, 돌봄이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방식을 조용히 응시한다. 인선과 수현에게 돌봄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아온 유대이자,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감각이다. 두 사람은 단순히 한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모색하고, 서로를 돌보는 윤리를 확장하는 삶을 지속해 왔다. 그 돌봄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는 방식이 된다. 영화는 관계가 특정한 규정이나 역할 속에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의 실천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결국, <두 사람>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감각이다. 관계는 지속되며, 지속된다는 것은 서로를 돌보고, 돌봄을 통해 다시 자신을 지탱하는 일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모습을 응시하면서 ‘우리’라는 단어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친밀한 관계를 넘어, 돌봄을 통해 확장되는 연대의 방식으로 자리한다.
전통적인 퀴어영화가 정체성을 선언하고 인정받는 과정을 통해 서사를 구축해 왔다면, <두 사람>은 그 바깥에서 관계가 지속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 관계는 단지 두 사람만을 ‘우리’로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돌봄이 더 넓은 공동체로 확장되는 과정 자체를 이끈다. 갈등을 부각하지도, 선언하지도 않지만, 관계는 그 자체로 지속된다. 영화는 그렇게 ‘우리’라는 단어를 두 사람의 삶이 쌓인 시간 속에, 함께한 공간과 몸짓 속에,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는 화면 위에 조용히 새겨 넣는다. 말로 규정되지 않지만 감각되는 것, 정의되지 않아도 이어지는 것. 그렇게 두 사람은,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연대를 써 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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