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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로 포장한 마초적 상상력의 한계, <검은 수녀들>2025-02-07
영화 <검은 수녀들> 스틸컷 이미지



여성 서사로 포장한 마초적 상상력의 한계, <검은 수녀들>


윤필립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높은 수준의 젠더감수성이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시작이 언제, 무엇 혹은 누구로부터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지나온 과거는 당연시되어야 할 것이 당연시되지 않았던 시대였음이 명백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젠더감수성이 보편화된 우리 시대에는 대중문화 콘텐츠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 언젠가부터는 스토리가 여성 주도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여성 서사' 콘텐츠가 활발히 제작되고 있다. 그에 따라 이제는 여성 서사를 바라보는 일반 관객들의 안목 또한 높아지고 있기에 영화를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신중히 임하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다.

바로 이렇게 급변한 한국의 사회문화 맥락과 대중문화 콘텐츠계의 흐름 안에서 영화 <검은 수녀들>(권혁재 감독, 2025)의 제작 소식이 들려왔다. <검은 사제들>(장재현 감독, 2015)을 기억하는 관객들로서는 수녀들의 손 안에서 이뤄질 긴장감 넘치고도 통쾌한 구마의식을 기대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으로 분해 경이로운 연기를 선보인 배우 송혜교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탄력을 받으며 관객들로 하여금 개봉일을 고대하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개봉하고 나니 관객들의 관심은 급속도로 식어 갔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영화 <검은 수녀들> 스틸컷 이미지


사실 미스터리 드라마를 표방한 <검은 수녀들>은 킬링타임용 영화로는 충분히 제몫을 하고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한계가 되고 말았다. 남성 캐릭터를 여성 캐릭터로 바꿨을 뿐, 스토리에 큰 변화를 주지 못한 채 <검은 사제들>의 뼈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안에서 <검은 사제들>의 세계관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검은 수녀들>은 <검은 사제들>의 후속편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후속편의 미덕은 전편의 안일한 답습이 아니라 캐릭터와 스토리 변주를 통한 세계관의 확장이 아니던가? 그러한 점에서 <검은 수녀들>은 사실상 전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검은 사제들의 수녀들'로 머물러 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영화 <검은 수녀들> 스틸컷 이미지3


또 캐릭터 활용의 측면에서도 <검은 수녀들>은 적잖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제목에서 시사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수녀들'이라는 여성 캐릭터들이 주요 인물로 전면에 등장하고, 그에 따라 여성 캐릭터들의 주도적인 역할이 기대됐다. 그러한 기대는 송혜교와 전여빈이라는 스타 페르소나로 구축된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성에 대한 기대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한 기대는, 구마의식은 사제 서품을 받은 신부들만 가능하다는 종교적 현실을 영화적으로도 극복하지 못하면서 처참하게 깨지고 만다. 즉, 영화 <검은 수녀들>에서는 현실의 한계를 영화적으로 부여되는 캐릭터성으로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무속과 신부(이진욱)라는 부속 캐릭터에 의존한 채 두 수녀들은 그저 신당과 성당을 동분서주 바삐 이동시키기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장르 영화에도 어느 정도의 현실적 한계는 반영되어야겠지만 근본적으로 장르 영화의 쾌감은 현실의 전복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영화 <검은 수녀들> 스틸컷 이미지4


이와 같이 영화 <검은 수녀들>은 <검은 사제들>의 스토리를 답습하고, 악마를 내쫓는 수녀들의 캐릭터성을 구축하는 데 실패한 결과, 제목과 일맥상통하면서도 동시대의 눈높이에 맞는 여성 서사를 상실하게 되었다. 주도적으로 구마의식을 행해야 할 '검은 수녀들'은 남성의 조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검은 사제들의 수녀들'이었을 뿐이었고, 그마저도 자신의 자궁 안에 악마를 가둬 함께 불길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였다. 이렇게 남성의 도움 없이는 주도성을 갖지 못하는 여성 그리고 뚜렷한 이유 없이 희생을 강요당하는 여성은 가부장적 전통사회에서나 부여됐을 법한 보수적인 젠더성이다. 그것은 이 영화 <검은 수녀들>을 여성 서사로 포장한 마초 영화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검은 수녀들> 스틸컷 이미지5


한편, 이 영화의 주인공인 '수녀들'의 캐릭터성이 제대로 구축되지 못해 그들로 분한 배우들의 연기 또한 빛바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악마에 영육을 지배당한 희준 역의 문우진은 적은 나이임에도 이 작품에서 지금까지의 아역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벗겨내고 연기자로서의 깜냥을 충분히 증명했기에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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