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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위와 욕구 사이에서2025-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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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위와 욕구 사이에서
이시현 2023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빌 워>의 감독, 알랙스 갈랜드는 적과 동지를 나누어 반목하는 시대에 적합한 메시지를 내놓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그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태를 바라본다면, 적과 동지의 구분은 참으로 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진 속 피와 살점이 튀기는 풍경에는 선악의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를 적으로,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후적 판단에 불과하다. 당장 나에게 날라오는 총알에는 국적이나 진영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알랙스 갈랜드는 트럼프와 MAGA, 기타 레드넥 세력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못한다. 기름을 훔치려 했다는 이유로 이웃을 죽을 때까지 폭행하는 사람도, 마을 전체를 별다른 이유 없이 학살하려는 사람도, 나라 전체를 분열로 빠트리는 금발의 백인 남성 대통령 모두 현실의 특정한 세력들을 연상시킨다. 이렇듯 <시빌 워>는 명시적으로는 정치적 분열을 거부하면서도, 분열을 초래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분열에 일조한다. 주인공 두 명이 모두 여성이며, 주인공을 위해 희생하는 조력자가 거동이 어려울 정도로 늙은 흑인인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당위와 욕구의 충돌은 영화 내적 맥락에서도 일관되게 발견된다. 영화에서 당위를 상징하는 것은 베테랑 종군기자 ‘리’이다. ‘리’는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만으로 PTSD와 공황을 극복해내는 초인적 인물이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대통령을 취재하기 위한 여정을 떠나는 한편 안전과 규율을 강조하며 동료들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반면 기자 지망생인 ‘제시’는 욕구를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제시’는 좋은 장면을 찍겠다는 일념을 지나치게 앞세워 주변인들을 위험에 빠트린다. ‘제시’의 장난에 휘말려 동료들이 사망하기까지 하나 수습은 대개 ‘리’의 몫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제시’는 보다 흥미로운 광경을 찍기 위해 교전 중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고, ‘리’는 그런 ‘제시’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리고 사망한다. ‘제시’는 ‘리’의 시체를 뒤로 한 채 더 흥미로운 장면을 찍으러 전진한다. 사람들은 ‘제시’를 상황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인물이라고 비난한다. 그녀로 인한 불필요한 인명 희생이 극중 최소 2명은 있었던 만큼 이는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제시’를 비난하는 수많은 관객 중 어느 누가 ‘제시’와 본질적으로 다를지에 대해 고민한다. 베테랑 종군기자인 ‘리’의 시선에서 내전은 조속히 종결되어야 할 재난 상황에 불과하다. 반면 ‘제시’는 내전을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한 기회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며, 피와 살점이 튀기는 교전 역시 ‘제시’에게는 ‘Call of Duty’식 게임 상황에 더 가깝게 보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시빌 워>를 흥행가능한 영화로 만들어주는 것은 상황을 흥미 위주로 바라보는 ‘제시’의 시선이다.
영화의 카메라는 ‘제시’와 ‘리’의 입장을 오가며 관객에게 당신은 어느 편에 이입하고 있는지, 즉 당신은 현 세태를 진지하게 고찰하는지 혹은 그저 구경거리로서 받아들이고 있는지 묻는다. 대답은 자명하다. 우리는 폭력과 분열에 구경거리 이상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나는, 그리고 관객들은 분열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시빌 워>의 교전 장면에 미혹된다. 우리는 ‘리’의 당위를 찬미하고 ‘제시’의 욕구를 비난하면서도 상황을 건조하게 바라보는 ‘리’의 시선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입으로는 당위를 외치면서도 눈은 욕구에 솔직한 것이 ‘제시’와 우리 관객들인 것이다.
분열에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분열에 일조하는 감독도, 기자로서 진실을 알리고 싶다고 말하면서 흥미로운 사진을 찍는 것에 급급한 ‘제시’도, 그런 ‘제시’를 비난하면서도 사실은 흥미로운 광경을 보고 싶은 우리도 모두 위선자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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