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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으로 표현된 현실과 망상의 모호한 경계, <세입자>2024-12-17
영화 <세입자> 스틸컷 이미지



명암으로 표현된 현실과 망상의 모호한 경계, <세입자>



윤필립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여름’과 ‘겨울’처럼 사계절을 의미하는 단어를 떠올리면 마치 거기에 맞는 온도와 색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러한 느낌은 ‘도시’와 ‘해변’ 같은 특정 공간을 뜻하거나 ‘건물주’와 ‘세입자’ 같은 제3자 혹은 그러한 그룹을 지칭하는 단어 하나하나에도 담겨 있다. 전자는 인간이 대자연을 경험하며 터득한 것이라면 후자는 개인들이 현대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학습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대자연을 통해 배운 사실들은 후대에도 전달되어 삶에 도움을 주는 선조의 ‘지혜’로 축적되지만 현대사회 속에서 학습된 지식들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차별과 편견을 아로새기기 일쑤다. 바로 그러한 일상이 영화 <세입자>(윤은경, 2024) 속에 흑백필름으로 담겨 있다. 모두가 당하고 있음에도 나만은 아닐 거라 착각하며 사는 그 반전의 일상은, 지독한 공기질과 살인적 물가가 사람들의 아침을 더욱 피곤하게 만드는 근미래의 서울 어느 집에서 시작된다.


영화 <세입자> 스틸컷 이미지2


신동(김대건)은 오늘도 어김없이 벽에 붙은 해변 사진을 마주하고 눈을 뜬다. 그리고 아침 루틴처럼 생수를 따 마시고 이를 닦은 후 뿌연 공기의 회색 도시를 가로질러 출퇴근을 반복한다. 어느 날 어린 집주인(함상혁)이 계약 연장 파기를 알려오자 신동은 친구(신영규)와 고민을 나누고, 그러던 중 ‘천장세’와 ‘월월세’에 대해 알게 된다. 집을 옮기기 어려웠던 신동은 월월세로 작게나마 돈을 모으고자 반신반의하며 인터넷에 세입자를 구하는 글을 올린다. 운이 좋게도 글을 올리자마자 한 신혼부부가 신동의 집으로 들어오는데, 희한하게도 남자(허동원)와 여자(박소현)는 큰방이 아닌 좁고 냄새나는 화장실에 세 들기를 원한다. 이러한 모습에 신동은 어딘지 모르게 기괴함과 불쾌감을 느끼는데…….


영화 <세입자> 스틸컷 이미지3


이렇게 영화 <세입자>는 현대 도시사회에서 이름도 모른 채 있는 듯 없는 듯 무채색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기에 적잖은 공감을 산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도시’의 색깔을 상상할 때 총천연색을 떠올릴 사람들은 드물다는 점에서 <세입자>의 흑백영화 방식은 그렇게 새롭지 않다. 다시 말해서, 회색빛 도시를 흑백 화면으로 묘사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클리셰 그 자체가 될 수 있기에 오히려 진부한 표현 기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세입자> 스틸컷 이미지4


그런데 <세입자>는 그러한 진부함을 조명을 통한 명도 조절로 영리하게 극복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무채색은 색감과 채도 없이 오직 명도로만 색을 구분하게 되는데, 영화 속에서 그러한 명도의 차이는 작품에서 설정된 시공간적 배경을 구분할 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심리 묘사에 관여하게 된다. 일례로, <세입자>에서 ‘신동’이 거주하는 공간은 주로 어둡게 처리되는 가운데 카메라가 그의 집에 세를 든 세입자 부부의 얼굴을 포착할 때에는 유독 환하게 처리되어 어두운 공간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덕분에 전자를 통해서는 ‘신동’이 살아가는 일상의 암울함이 드러나고, 후자를 통해서는 ‘신동’의 의지와 관계 없이 흘러가는 일상의 기괴함이 극대화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이 작품만의 표현 기법이 되어 현대 도시인이 일상처럼 마주하는 현실과 망상의 모호한 경계를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데 성공한다.

글을 맺으며, 영화 <세입자>는 미시적으로 현대인의 주거 문제를 다루면서도 거시적으로는 계층이나 계급과 결부된 인간의 실존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기생충>(봉준호, 2019)이나 <비닐하우스>(이솔희, 2023) 등의 작품과 비슷한 결을 지니지만 <세입자>의 경우 그것을 근미래의 일상을 담은 SF적 상상력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비록 <세입자>는 <승리호>(조성희, 2021)의 우주선도, <외계+인>(최동훈, 2022/2024) 연작의 로봇도 등장하지 않는 SF물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이 영화 속 일상이 머지않은 우리의 미래일 수 있음에 깊은 공감이 간다. 그것은 아마도 주거공간으로 계급화되어 가는 사회 속에서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동시대인들에게는 미지의 세계로 인도해 줄 우주선도, 어려운 일도 대신 척척해 줄 로봇도 없을 것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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