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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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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Room Next Door 룸 넥스트 도어 2024202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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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om Next Door
룸 넥스트 도어 2024
정지혜(한국영화평론가협회)
이 영화는 페드로 아모도바르(Pedro Almodóvar Caballero) 감독이 영어로 만든 첫 장편영화로. 2024년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페드로 아모도바르 감독은 스페인의 국민 감독으로 스페인 뉴웨이브를 이끌었다. 49년생으로 감독이며 제작자이자 배우이기도 하다. 나이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스페인의 프랑코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이다. 프랑코 독재 시절의 검열과 통제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라 모비다 마드릴레냐(La Movida Madrileña)1)’ 반문화 운동은 감독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할 때 따로 떼어서 말하기 어렵다.2)
페드로 아모도바르 감독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욕망을 주제로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여성의 영화’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페미니즘 비평가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 정도로 그는 섹슈얼리티와 폭력을 적극적으로 묘사하고 또 분노와 치기가 느껴지는 도발적인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였다. 90년대 이후 이 강렬한 에너지는 이전에 비해 정제되었고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느껴지는 영화들이 시작된다. 대표작으로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 <귀향>, <나쁜 교육>, <내가 사는 피부>, <페인 앤 글로리>3) 등이 있다.
영화의 원작은 미국의 소설가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어떻게 지내요>(What Are You Going Through)이다. <룸 넥스트 도어>(The Room Next Door) 이 제목은 ‘죽음은 우리 곁(옆방)에 있다.’라는 관용적 표현이기도 하다. 페드로 아모도바르 감독은 죽음에 맞닿아 있는 강렬한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들을 자주 한다. 그에게 삶과 죽음, 사랑은 반복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틸다 스윈튼과 줄리안 무어가 각 암 투병 중인 ‘마사’와 유명 작가이자 마사의 전 동료인 ‘잉그리드’로 출연한다. 이 두 배우는 창조된 인물인 배역으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 자연인으로서의 배우와 그들이 전작에서 보여준 서사가 <룸 넥스트 도어>의 콘텍스트 안에 녹아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생략된 두 인물의 이야기를 상상력이 아닌 관객이 경험한 콘텍스트를 통해 채워 넣는 것이다.
풍부한 메타포를 가지고 있는 영화들은 표면적인 이야기 아래에 층층이 쌓여있는 심도 깊은 주제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 경계와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주제에 대해 언어와 배경을 뛰어넘어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은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각 인물은 죽음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마사의 죽음을 향한 여정을 통해 죽음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역전(극복)하는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프랑스에 머물고 있던 잉그리드는 신간 출간을 계기로 뉴욕에 다시 돌아온다. 그녀는 신간 기념 행사에서 옛 지인을 만나 동료였던 마사의 암 투병 소식을 듣는다. 80년대 뉴욕에서 함께 에디터 시절을 보낸 절친의 소식을 들은 잉그리드는 마사의 병문안을 간다. 한동안 서로 연락이 닿지 않았던 두 사람은 그때와는 조금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지만 서로 반대인 듯이 닮은 듯이 서로를 이해한다.
이미 암은 희망이 없는 상태이지만 마사는 무력하게 죽어가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생각 외에 어떤 방법을 찾지 못한다. 의료진의 권유에 따라서 치료를 시작한 마사는 항암치료를 경험한 뒤, 이 무의미한 치료를 멈추기로 마음먹는다. 모르핀에 절여져 모든 기억력을 잃어가고 자신답지 않은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싫었던 마사는 존엄사를 선택한다.
스스로 죽음의 방식을 선택한 뒤 약간의 열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마사는 자신의 죽음에 누군가 함께 해주기를 바라며 그 동행자를 찾는다. 마사는 미혼모로 어린 시절 낳은 딸이 있었지만 둘은 남보다 못할 정도로 사이가 나빴고, 몇 번의 퇴짜를 맞은 뒤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이를 부탁한다. 그리고 잉그리드는 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마사는 숲에 둘러싸인 저택을 한 달간 빌려 항암치료 사이의 휴식기를 보내는 것으로 위장한 채 죽음을 준비하고 잉그리드는 마사와 이 여정을 함께해준다. 마사는 잉그리드의 무죄를 입증해 줄 편지를 남기기로 한다. 그리고 잉그리드가 미리 그녀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도록 아침에 평소와 다르게 문이 닫혀있으면 전날 밤 자신이 죽음을 실행을 한 것이라 알고 있으라며 싸인을 정한다.
이후 잉그리드는 새벽이라도 잠에서 문득 깨면 두려워하며 위층에 있는 마사의 방문을 확인한다. 잉그리드에게 죽음은 여전히 알 수 없고 두려운 것이지만 다정한 위로와 동행으로 마사의 남은 시간을 지켜준다. 이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인생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눈다.
둘은 마사의 딸 미셸에 관해 이야기 한다. 마사는 첫사랑이었던 프레드가 베트남 전쟁에서 트라우마를 안고 돌아온 것을 보고 그를 위로해 주는데, 이때 미셸이 잉태된다. 트라우마를 안고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 애쓰던 프레드는 이 때 생긴 아이에 대해서 어떤 부성이나 책임을 느끼지 못한다. 마사는 역시 어렸지만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인다. 미셸의 탄생은 마사가 전쟁(죽음)을 위로한 결과다. 미셸은 자라며 부친의 부재에 대해 결핍을 토로했고, 이는 마사가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였기에 두 사람은 어긋나 버린다.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해 결혼하고 새로운 삶을 살던 프레드는 아내와 집으로 가던 중 우연히 불타는 빈집을 발견한다. 프레드는 도움을 구하는 환청을 듣고 말리는 아내를 뿌리치고 불 속으로 뛰어든다. 뒤늦게 도착해 불길을 진화하고 불타버린 집에서 프레드의 시체를 찾아온 소방관들은 프레드의 용기에 존경을 표한다. 이는 의례적인 위로에 불과하다. 불길에 뛰어드는 프레드를 지켜본 아내에게 이것은 용기가 아닌 편집증5)이 만든 허무한 죽음일 뿐이다.
어쩌면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이미 죽어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미셸은 부친의 부재에 대해 집착적으로 굴었고 프레드가 아마도 자신의 구조신호를 듣고 불타는 집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한다.
이 에피소드는 일종의 알레고리로 전쟁의 본질과 가부장에 대한 헛된 집착에 대해 은유하고 있다. 불타는 빈집은 상징적인 장면으로 베트남 전쟁이 죽음을 향해 무의미하게 달려가는 것이며 이 죽음은 헌신이나 사랑의 방식으로 이뤄진 죽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미셸이 아버지라는 존재의 결핍에 천착하는 것은 가부장제 혹은 왜곡된 남성주의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 미숙한 의존성 같은 것으로 느껴진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마사는 여전히 통증에 대해 괴로워하고 컨디션에 따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죽음 앞에서 무기력하지는 않다. 마사에게 죽음이 전쟁이라면 그녀는 이 전쟁터에 생명력과 생에 대한 찬미, 축복과 연대를 무기로 참전하고 있다. 마사는 다크웹에서 약을 구할 때만 해도 죽음을 범죄 형태로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은 죄의 삯’이라는 오래된 보수기독교의 관념으로 밖에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는 존엄사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여전히 죽음, 죽음의 때에 대해 운명적인 것, 하늘에서 정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잉그리드가 매일 아침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며 위를 올려다보는 장면은 마치 하늘이 내리는 운명을 기다리는 모습과 같다.
예정된 죽음과 목격자. 이 부분의 해석을 확장하면 죽음과 죽음의 증인이라는 이 둘의 관계는 예수의 서사와도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서사에서 예수는 죽음을 극복한 인물이다. 마사의 선택은 전적으로 그녀가 느낌이 왔을 때 실현될 것이다. 하지만 그 느낌이 어떤 성격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마사가 죽음과 통했을 때 이 사건은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다. 마사가 고통에 져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느낌이 왔을 때 마사의 죽음은 죄나 벌, 악, 저주, 후회의 형태가 아닐 것이다.
“죽음에서 삶이 솟아나고” - <그녀에게> 대사
마사가 죽음을 향한 과정을 전쟁처럼 여기는 것으로 보더라도 이 전쟁은 프레드의 전쟁과는 전혀 다르다. 그녀는 이 전쟁을 자신의 전쟁으로 여기며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마사는 잉그리드에게(자신이 종군기자였을 때처럼) 이 상황을 글로 쓰거나 책을 내도 된다고 허락한다. 마치 잉그리드가 마사의 전쟁(죽음)을 증언하는 종군기자인 것처럼 느껴지는 내용이다.
마사는 종군기자였기 때문에 전쟁터를 피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상징적으로 보자면 마사는 자신의 인생에 일어나는 어떠한 전쟁도 정면에서 이성적(객관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녀는 전쟁의 한가운데를 돌파해 본 사람은 아니다. 마사에게 종군기자란 업은 일종의 전쟁에 대한 증인이 된다는 의미다. 이는 대사를 통해 마사가 자기 죽음의 순간에 누군가 함께 해주기를 바라는 이유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녀가 뉴욕에서 에디터 시절 화려한 삶을 즐긴 것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삶, 젊음을 정면으로 맞아들여 기쁨과 파티, 즐거움을 만끽한 것이다. 그 시절을 함께한 잉그리드가 마사의 죽음을 함께하는 인물로 마지막에 남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듯이 마사와 잉그리드를 동일 인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마사와 잉그리드는 서로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대립하는 면이 있지만 대체로 중첩되는 인물이다. 이를테면 마사는 이성적인 인물이고 잉그리드는 감성적인 인물이다. 마사와 잉그리드가 옆 방이 아닌 위아래의 층을 쓰는 것도 이 중첩되어 합일되는 인물을 설명하는 설정이다.
마사가 숲의 집에서 지내는 시간은 ‘카니발 이론’과 연결되는 이미지들이다. 마사가 숲의 바람과 새소리, 선베드에서 맑은 공기를 쐬면서 보내는 시간은 점점 가까워지는 죽음의 시간을 전혀 다른 성격으로 바꾼다. 숲의 집은 영화의 설정상 뉴욕이지만 이것이 실제 촬영된 장소는 스페인이다. 스페인의 숲은 페드로 아모도바르 감독에게 생명 그 자체의 공간이고 무질서와 질서가 무한히 순환하게 하는 부활과 재생의 공간일 것이다.
이 영화의 미장센(화면구성)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컬러에 있다. 독특하고 선명한 색채는 이 영화에서 주요한 미학 요소다.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이 색의 향연은 인물과 배경(공간)을 통해 끊임없이 변주된다. 특히 마사가 있는 공간이나 두 사람의 의상은 인물의 성격이나 전사를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강렬한 시각적 언어로 사용된다. 파란색, 빨간색, 라벤더색, 녹색 등은 일관적으로 맥락에 맞춰 사용되니 색의 사용에 주의하며 영화를 보는 것도 관람의 재미가 될 수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지지 않는 강렬한 생명력은 영화의 사운드와 음악과도 연결된다. 마사는 테라스의 식물에 물을 주는 것으로 시작해 숲으로 둘러싸인 집으로 들어간다. 숲은 창밖에 있지만 다양한 사운드로 장면 안으로 들어오고 거의 모든 장면에 음악이 쓰인 듯 영화 전체에서 흐르는 음악들은 이 숲이 내는 소리와 함께 그녀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생명력을 함의한다.
마사는 아주 평화롭고 아름다운 날씨의 아침에 오늘이다, 지금이다, 라는 걸 느낀다. 이 때 마사의 감각은 생생하게 순간을 감지한다. 잉그리드가 외출하는 동안 죽음이 실행된다. 마사는 자기다운 죽음을 실행하며 계획할 때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그녀에게 이 완벽한 날씨와 두려움 없는 ‘어떤 느낌’은 생에 대한 찬미이자 축복에 가깝다. 풀장의 선베드에 누운 마사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날씨의 실체인 숲의 소리, 바람, 냄새, 습도와 하나 되어 죽음의 마지막 모습까지 생생한 에너지를 잃지 않는다. 그녀의 죽음을 포함해 생 전체가 생명력과 환희, 투쟁, 세계와의 합일, 평화로 종결되는 순간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외출에서 돌아온 잉그리드는 마사의 주검을 발견한다. 잉그리드는 나름대로 준비해 둔 시나리오에 따라 행동하고 경찰에 증언하지만, 모든 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극단적인 보수 기독교인인 경찰이 잉그리드를 범죄자로 단정 짓고 취조하자 잉그리드는 이 상황을 알고 있던 전 연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유능한 변호사와 미리 의논을 마친 그는 변호사와 함께 와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준다.
여기서 등장하는 전 연인은 마사와 잉그리드가 시간의 차이를 두고 사귀었던 인물이다. 잉그리드가 그에게 전화해 변호사를 요청하는 에피소드는 결말부에서 마사와 딸의 관계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잉그리드를 죄에서 구한 것은 그녀의 사랑(의 실천 혹은 경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아무리 죽음을 죄로 여기는 이의 심문도 이 사랑의 증인은 이기지 못한다는 이야기로 읽힌다. 미셸 역시 마사에게는 사랑의 증거다. 마사와 미셸의 관계가 모성애의 전형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셸이 마사의 얼굴을 하고 등장하면 이 살아있는 증거가 숨을 쉬고 말하고 걸어 다니며 증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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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5년 프랑코의 사망 이후 과도기에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스페인에서 일어난 반문화 운동은 대략 80년대 중반까지 유행했다. 프랑코 독재 시절 기혼 여성이 남편 없이 외출이 어려웠을 정도라고 하니, 그 반발 작용의 에너지가 얼마나 폭발적이었을지 추측해 볼 수 있겠다. 이때 표현의 자유, 금기의 파괴 마약 자유화를 주장했고 독재시절 억압당한 소수자 인권운동도 활성화되었다. 검열의 수위가 한층 자유로워지면서 직설적이면서도 과격해진 표현 수위의 문화적 흐름이 생기기도 했고 이때 문화 전 분야에서 인디문화가 활성화되었다. 이 시기를 스페인 영화계의 해빙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영화의 수위나 주제 역시 거침없어지기 시작했다.
2) 페드로 아모도바르 감독이 표현하는 사랑은 일상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자주 표현되는 사랑은 순수하지만 황당하고 뒤틀린 사랑이다. 특히 이 사랑과 욕망을 표현하는 데 성적 본능에 충실한 장면과 설정이 많아 관객의 욕망을 자극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기괴하고 뒤틀린 사랑을 인간적인 시선으로 풀어내는 것이 감독의 특징이기도 하다. 양성애와 동성애가 뒤섞인 애정 관계나 자살, 포르노, 웃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괴이한 유머 같은 것으로 이뤄진 감독의 영화는 얼핏 싸구려 에로영화의 줄거리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파격적인 성적 접근은 보수 세력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며 동시에 인간의 본능적인 측면을 솔직하게 대변하려는 그 작품의 한 경향성이기도 하다.
3) 틸다 스윈튼은 이 영화에 대한 일체의 정보를 노출 금지해야 할 당시 이뤄진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이상하게도 <페인 앤 글로리>의 자연스러운 후속작이 될 것이라고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Swinton said “The Room Next Door” is “a natural successor, strangely, to ‘Pain and Glory,'” in that it’s about mature friendships and how they sustain us and what we need them for at this stage in our lives.) <페인 앤 글로리>의 주연인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페넬로페 크루즈는 페드로 아모도바르 감독의 페르소나로 익히 알려져 있다.
4) 영화의 어떤 요소나 장면을 분석하는 것은 영화언어라는 일정한도 내에서 어떤 법칙이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분석을 기초로 하여 해석의 범위로 나아가는 것은 가지고 있는 정보의 양에 따라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이 영화는 여러 번 본 영화가 아니기에 분석과 해석에서 왜곡과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영화를 보고 개개인의 서로 다른 생각을 듣는 것은 여전히 즐거운 일이다. 이 부족한 원고의 목적도 이 즐거움을 나누는 데에 있다고 여겨주기를 필자는 바라고 있다.
5) 체계가 서고 조직화된 이유를 가진 망상을 계속 고집하는 정신병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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