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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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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새 Peafowl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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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새 Peafowl
정지혜(한국영화평론가협회)
이 영화를 ‘퀴어 영화’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관객은 스트리트 댄서 “해준”이 주연 배우로 출연한 데뷔탕트의 순간을 목격하러 온 것뿐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4:3 비율의 스크린이 화려한 왁킹 댄스를 추는 해준의 얼굴을 우리에게 각인시킨 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국내 퀴어 영화의 계보를 잇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새로운 시대의 퀴어 영화, 거기에 약간의 미스터리와 스릴러, 그리고 반전을 더한.
화려한 외모의 왁킹 댄서 신명은 우승상금 천만 원을 받기 위해 혼신을 다해 춤을 춘다. 그러나 최종 결선에서 아슬아슬한 차이를 두고 떨어져 눈앞에서 상금을 놓친다. 사력을 다했던 신명은 심사위원에게 자신이 뭐가 부족하냐고 따지지만, 돌아온 대답은 ‘넌 너만의 컬러가 없다’는 것. 하기야 왁킹 댄스의 기원이 퀴어 씬에서 나온 걸 떠올린다면 신명은 흔한 트렌스젠더 댄서에 불과할 수도 있다.
신명은 군입대 전 수술을 하기 위해서 당장 수술비용이 천만 원이 필요했고 대회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절망하기도 이른 시간 문득, 아버지 덕길의 부고가 전해져온다. 신명은 고향의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지낸 지 오래되었고 아버지와의 관계 역시 원수만도 못한 사이다. 억지로 돌아간 장례식에서 신명이 묵은 감정을 돌아보기도 전에 아버지와 신명 사이에서 관계된 인물들은 신명을 닦달하기 시작한다. 신명은 입고 온 검은 추모의상에서 삼베 상복으로, 다시 치마저고리 상복으로 갈아입게 되는데 이때 신명은 고향과 가족들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정체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건 오히려 외부인들이다.
신명을 대신해 상주역을 하고 있었던 우기는 ‘호창 농악 보존회’의 리더이자 호창 농악을 전수받으며 덕길과 아들처럼 가까웠다. 우기는 덕길의 유산을 언급하며 추모굿을 신명이 꼭 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덕길이 남기고 간 유산 때문인지, 자신을 품어주는 우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신명은 호창농악단과 함께 장단을 맞춰 나간다. 우기의 꽹과리 장단에 왁킹 댄스가 잘 어울리는 것처럼 농악 보존회의 사람들 사이에도 서서히 섞여 들어간다.
신명이 신임을 얻어갈 즈음 마을 사람들이 신명을 오해할 사건이 일어난다. 신명은 사촌 동생인 보석을 아웃팅(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이 강제로 누설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 주기 위해 오해를 받으며 고향을 떠난다.
신명은 자신과 아버지의 갈등이 순전히 자신의 존재로 인해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건 오히려 자신과 너무 닮은 ‘뜬쇠패’였던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신명은 이 암묵 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덕길의 추모굿을 치기로 결정한다. 우기의 장단에 맞춰서 공작이 깃을 펼치듯, 불사조가 불길 속에서 다시 태어나듯 새로운 시대의 춤을 이어 나간다.
최근 몇 년 사이 성소수자 인물을 다루는 영화들에서 보이는 특이점 중 하나는 더 이상 불행한 게이 서사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021년 개봉한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의 김조광수 감독은 인터뷰에서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언급했다. 요는 최근의 게이들은 예전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을 오래 붙잡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메이드 인 루프탑>에 등장한 새롭고 사랑스러운 퀴어 캐릭터들 역시 동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특별히 이 세계에서 격리된 구역에 있다기보다는 쿨하고 찌질한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청춘의 모습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새로운 인물은 새로운 언어와 담론을 끌어낸다. 그에 비한다면 ‘김조광수 사단’이란 명성이 외려 낡은 수사로 느껴질 정도다.
2022년에는 다큐멘터리 <모어>가 개봉했다. 무용가 ‘모어’와 드래그 퀸 ‘모어’, 양쪽에 동시에 존재하는 인물 모지민을 이일하 감독은 해부한다. 그는 전작 <카운터스>를 함께했던 사진작가의 스튜디오에서 ‘모어’를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고 한다. ‘기갈’ 넘치는 드래그 퀸의 모습에서 강렬한 저항(counter)을 발견한 그는 모어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모어’는 게이, 발레리나, 퍼포머, 순정파 국제커플 어느 하나로 정의 되지 않는다. 그의 춤이 하위문화의 범주에 속한 것인지 고급문화에 속한 것인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촌스럽다. 그는 끝과 끝, 극단에서 동시에 존재하며 그 스펙트럼은 그를 개별적인 지위에 올린다. 영화<모어>와 아티스트‘모어’는 컨템포러리, 동시대성 그 자체다. 모지민은 그의 육체, 움직임, 자신으로 존재한다. 감독은 이 다층적 도큐먼트를 통해 집요하게 모어의 꺼풀을 벗겨내면서 동시에 차별과 혐오의 이데올로기 혹은 관점을 해체한다.
2000년 이후 ‘퀴어’의 하위 장르라고 할 수 있는 ‘BL’은 웹 드라마 등의 매체에서 상업성을 확인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퀴어 영화의 계보에 이 스토리들을 연결하고 싶지는 않다. <공작새>가 계보를 잇는다는 건 새로운 흐름을 예고하며 동시대를 반영하는 퀴어 영화라는 점에 있다. 변성빈 감독은 우디 앨런 같은 유머는 없지만 꽤 냉소적인 펀치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의 펀치는 집요하리만큼 날카롭고 또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엄폐되어 있다가 튀어나온다.
변성빈 감독은 단편 <신의 딸은 춤을 춘다>에서 시작한 모티브를 장편 극영화 <공작새>까지 끌고 와 완성해 냈다. 사실 이는 여정을 완성했다는 말로는 부족할 것이다. 단편영화로 시작해 극장 개봉작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의 험난함과 확률의 희박함을 상기한다면 기적이라고 불러도 부족하다. 이 기적의 정점에 ‘신명’ 역의 해준 배우가 있다면 그 원천에는 김우겸 배우가 있다. 김우겸 배우는 변성빈 감독의 여러 단편영화¹)에서 출연하며 감독의 페르소나, 혹은 지원군으로 동행해 왔다. 김우겸 배우의 얼굴은 적의와 호의가 혼재되어 있다. 관객의 관점을 혼란하게 하고 감독이 관객의 생각과 마음을 뒤흔들게 하도록 유인한다.
변성빈 감독이 이 영화를 화해의 동력으로 삼기를 바란다고 말했더라도 나는 그를 평화주의자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는 적의 배후나 측면에서 기습, 교란, 파괴 등의 활동을 하는 비정규 부대처럼 움직이고 있다. 물론 관객도 서툰 교훈보다는 그런 게릴라전 같은 이야기를 원한다. 변성빈 감독은 기출 변형의 문제를 내고 있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 혹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화해를 제안하지만, 이 문제에는 함정이 있다. 그런 면에서 감독은 매번 작고 예리한 칼을 들고 일부의 사람들이 금기라 여기는 것들을 해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변성빈 감독은 금기의 경계선으로부터 우리 사회의 쟁점적 터부의 한가운데까지 관객을 끌고 들어간다. 상영시간 이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유연함 뿐인 듯하다.
영화는 몇 가지 맹점도 가지고 있다. 작은 규모의 관계 안에서 갈등이 중첩되어야 하다 보니 생긴 문제다. 성 지향성, 성 정체성이 유전적 영향이 있는 것처럼 오해가 될 수 있는 설정이다. 이것이 논쟁이 된다면 오히려 다행이겠으나 오해로 끝난다면 곤란하다. 또 가족 내에서 만들어지는 각종 갈등의 드라마들은 압축되다 보니 전반부에 비해 매끄럽지 않아 덜컹거린다. 신명, 우기, 보석이 극적 상황에서 보이는 정서 반응과 고모(황정민), 고모부(김진수)의 드라마 톤은 그 세대의 차이만큼이나 다른 장르로 느껴진다.
독립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은 사실 조금씩 비어 있는 이 틈에 대해 애정을 보낸다. 한국의 관객들은 이미 그 수준이 높다. 언론시사회에서나,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한 GV에서 비슷한 수준의 질문이 나오고 이 관객들은 각 장르의 특징과 미학, 제작 과정의 묘미를 즐긴다.
영화라는 매체는 다채로운 이야기와 가능성, 그리고 다층적인 관객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독립영화를 지지하는 한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한국의 관객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관객은 이 영화를 팝콘 무비나 타임킬링 용이 아닌 하나의 아트하우스 필름으로 받아들이기에 러닝 타임 내도록 매혹적이거나 친절하거나 치밀하지 않아도 그 틈을 직접 채우고 나선다. 극장에서 한국 독립영화를 보면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노련한 관객들이 한국의 독립영화계를 지지하는 1열에 있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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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감독의 전작 <손과 날개>는 장애인의 인권 그중에서도 성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는 너무 신성하게도 천박하게도 아닌 방식으로 주제를 다룬다. 그러나 그 양쪽의 의견을 부딪치게 하면서 고정관념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여기에서도 김우겸의 그 속을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은 관점을 흔드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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