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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로컬 픽, 시간과 빛: 각자의 궤도를 따라> : 부산과 부산 사람들2025-04-30
2025 부산로컬시네마데이 <로컬 픽 시간과 빛> LOCALPICKBRIGHTTIMES 2025.4.25.(금) 19:30 인디플러스



<로컬 픽, 시간과 빛: 각자의 궤도를 따라> : 부산과 부산 사람들


김현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영화 <빛과 열: 부산 남구 유엔평화로> 스틸컷 이미지


<빛과 열: 부산 남구 유엔평화로>

오승진 감독의 <빛과 열: 부산 남구 유엔평화로>는 피란수도 당시의 부산의 기억을 만화로 그리는 만화가 남정훈의 작업기다. 남정훈 만화가의 작업이 1차 기록이라면 오승진 감독의 작업은 2차 기록, 기록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유엔묘지로 불렸던 유엔평화공원과 그 근처에서 뛰놀던 남정훈의 어린 시절은 이제 그가 가진 사진들로만 남아있다. 그 사진들 너머로 그때 사진이 미처 담지 못한 기억을 남정훈은 만화라는 매체로 붙잡으려 한다. 영감을 얻기 위한 남정훈의 발걸음과 멈춰 섰을 때의 드로잉 작업. 오승진의 카메라는 이 과정을 담아내며 부산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가보았을 법한 유엔평화공원에 대한 관객들의 기억과 추억을 건드린다. 남정훈의 펜이 텅 빈 태블릿 화면에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갈 때,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 관객이라면 아마 각자의 어린 시절 기억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구구맨> 스틸컷 이미지


<구구맨>

오나연 감독의 <구구맨>은 기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삶을 담은 TV 프로그램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비둘기와 함께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일명 ‘둘기 아빠’ 김현태 씨의 일상을 담고 있다. 앞서 언급한 그 방송과 이 영화의 차이점이라면 사람을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 방송은 방송에 담긴 기인에 대한 현재와 과거를 (시청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구구절절 설명을 한다. 방송 속 기인은 쉽게 말해서 우리가 ‘알아가야 하는’ 이해의 대상이다. <구구맨> 역시도 김현태 씨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설명을 하지만, 김현태 씨의 실제 삶이 그의 말대로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다만 오나연 감독은 김현태 씨가 비둘기와 함께 어울리며 행복해 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기인의 과거와 사연과 실생활이 궁금하신가? 감독은 그것을 부드럽게 차단시킨다. 그건 당신의 알 권리가 아니고 알 바가 아니라는 듯이. 그 덕에 김현태 씨는 뭔가 사연이 있는 이상한 사람이 아닌, 그저 남다른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남는다. 이 태도가 이 영화의 킥이다.


영화 <부산 소네트> 스틸컷 이미지


<부산 소네트>

정은섭 감독의 <부산 소네트>는 부산 곳곳의 재개발을 앞둔 철거 대상 지역과 번듯하게 곳곳에 들어선 아파트와 빌딩숲, 이 풍경들의 집요한 대조를 통해, 부산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철거를 기다리고 있는 텅 빈 공가, 곳곳에 써 있는 ‘철거’라는 붉은 글씨들, 이미 부서져 폐허만이 남은 원래의 모습이 영영 사라져 버린 동네들. 한편으로 어딘가에서 무심히도 계속 번듯하게 지어져 올라가는 아파트와 빌딩숲들. 이 대조된 풍경들 사이로 미분양 아파트들이 점점 늘어가는 부산, 인구소멸 위험지역으로 몰린 부산, 아이들은 점점 태어나지 않고, 젊은이들은 떠나며, 점점 노인들만 남아서 고령화되어 가는 부산에 대한 뉴스들이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고정된 카메라와 절제된 사운드, 간헐적으로 낮고 슬프고 무겁게 깔리는 음악. <부산 소네트>는 매우 차갑고도 엄정한 태도와 시선을 가진 다큐멘터리다.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따듯해 보인다. 그 시선에는 결국 겉보기에는 번듯하게 변해가는 것 같지만 점점 살기 힘들어지고 있는 도시 부산에 대한 깊은 근심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영화 <49재> 스틸컷 이미지


<49재>

정시연 감독의 <49재>는 감독의 외할머니의 49재의 과정을 담담하게 찍은 다큐멘터리다. 외할머니의 49재를 맞아 가족들이 모인다. 음식을 준비하고, 납골당에 도착해 49재를 지내고, 외할머니의 납골함이 담긴 자리를 모두 쳐다보고, 외할머니의 유품들을 정리한다. 가족들이 뿔뿔히 집으로 돌아가고 적막한 집 안에서는 외할아버지 혼자 TV를 보다 잠이 든다. 이 과정에 어떤 반전이나 의외의 순간이 끼어들 리가 없다. 49재는 매우 엄숙한 의식이다. 음주가무, 여행, 경조사 참여, 기타 즐겁고 재미있게 노는 일이 모두 금기시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화면도 상(喪)을 상징하는 검은색을 연상시키는 흑백화면이다. 이 영화는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전달할 의도가 없다. 다만 부재한 망자를 추모하는 산 자들의 시간에만 오롯이 집중한다. 아직 죽음과 부재의 의미를 알지 못할 나이인 어린 손자의 무표정과, 그 의미를 너무나 사무치게 잘 아는 노인 외할아버지의 무표정. 영화를 보고나면 이 두 무표정의 차이가 쓸쓸하게 기억될 것이다.


영화 <겨울 숲을 혼자 걸어간다> 스틸컷 이미지


<겨울 숲을 혼자 걸어간다>

배회라는 단어가 있다. 목적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이 단어를 쓸 일이 좀처럼 없다. 목적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닐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김종한 감독의 <겨울 숲을 혼자 걸어간다>는 이 배회란 단어가 잘 어울리는 영화다. 감독이 직접 출연한 영화지만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그가 어릴 적 성장한 영도구에 있는 청학동이란 동네 자체다. 영화의 대부분이 우선적으로 동네의 풍경을 크게 보여주는 구도로 촬영되어 있고 그 화면 안에서 작게 잡힌 그는 영화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고 느릿느릿 동네를 배회할 뿐이다. 그는 그 동네에서 전셋집을 구하려는 목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핑계에 가깝다. 그저 그는 동네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에 잠긴 것으로 보인다. 동네는 그대로 있지만 어린 시절의 친구들과 이웃들은 남아있지 않다. <겨울 숲을 혼자 걸어간다>의 배회는 이 막막한 감정의 지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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