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홍이> : 불행의 페널티를 넘어서2025-03-24
영화 <홍이> 스틸컷 이미지



<홍이> : 불행의 페널티를 넘어서


김현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이 리뷰 전체가 영화 <홍이>의 스포일러입니다. 영화를 본 이후에 이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영화 <홍이>의 주인공 홍이(장선 배우)와 홍이의 엄마 서희(변중희 배우)는 영화 속에서 내내 하나부터 열까지 서로 지독히도 안 맞는다. 사이가 안 좋아도 이렇게 안 좋을 수 있을까 싶은 모녀지만 공통점은 있다. 둘 다 그 사람의 진짜 본 모습이 어떤지를 알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홍이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곤경 때문에, 서희에게는 치매 때문에 그렇다. 둘 다 비유적인 의미로든, 실제로 그렇든 간에 맨 정신일 수가 없는 상황이다.


영화 <홍이> 스틸컷 이미지2


홍이에게는 크게 세 가지의 곤경이 있다. 첫째는 엄마의 치매다. 둘째는 5천만 원 남짓한 빚. 대부업체에게서, 다른 여자와 결혼한 전 남친에게서 돈을 빌렸고 갚으라는 압박에 주기적으로 시달린다. 셋째는 정규직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며 비정규직의 자리에 머물러있다는 점이다.

서희의 치매의 원인은 영화 속에서 정확하게 설명이 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남편과 시어머니에게서 결혼 생활 내내 받은 정신적 학대로 인한 스트레스, 혹은 자신에게 치매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는 스트레스일 것이다. 아니면 애초부터 타인에게 친절하고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서희는 딸에게 거침없이 막말을 하고 갈수록 정도가 점점 심해진다.

홍이는 구직을 위한 자기소개서에 ‘저의 장점은 매사에 솔직하고...’라고 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줄 수가 없다. 홍이에게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또래의 여성이 단 한 사람도 없다. 실제로 친구가 하나도 없진 않겠지만 적어도 영화 속에선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곤경에 처한 자신을 친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일 것이다. 친구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 홍이가 남들을 대할 때의 애매한 무표정과 종종 보이는 과한 미소는 자신의 본심을 숨기기 위한 것들이다. 이 외로움을 홍이는 충동적인 쇼핑이나, 전 남자친구와의 동침을 통해 해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또 다른 부작용을 부른다. 오픈채팅방에서 만난 남자와 데이트를 하며 평범한 연인들처럼 연애도 꿈꿔보지만 거기서도 홍이는 자신의 본모습을 보일 수가 없다. 홍이는 그만큼 외롭고 고립되어 있다.


영화 <홍이> 스틸컷 이미지3


홍이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는데도 상황은 좋아지질 않고 점점 나빠진다. 나는 나름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 세상이 나에게 자꾸만 휘슬을 불며 옐로카드를 준다면 어떤 기분일 것 같은가? <홍이>를 보면서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느낌은 바로 이 페널티들이 점점 누적되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이다. 이는 영화 속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서 수시로 홍이를 괴롭힌다. 홍이에게 주어지는 페널티들은 제3자가 보기에 억울할 법한 순간도 있으나 대부분은 홍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들이다. 잊을 만하면 오는 대부업체의 채무상환 독촉 문자, 전 남친의 막말, 자신이 일하던 곳에서 받게 되는 싸늘한 해고 통보, 시간 약속을 자꾸만 어긴 홍이에게 화를 내는 해주 이모(이유경 배우)의 분노 등등. 가장 아픈 것들은 당연히 엄마의 잔소리와 막말들이다. 그 말들은 듣기에 짜증스럽지만 대부분은 진실을 담고 있다. 엄마의 결정적인 유효타 한 방은 반박불가의 진실이라 더 뼈아픈 것이다. “내가 모르는 줄 아니? 너 돈 필요해서 나 데려온 거잖아.” 정곡을 찔린 홍이는 오열할 수밖에 없다. 애써 외면하려 했던, 나락까지 떨어진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그렇게 강제로 마주 하는 것이다.


영화 <홍이> 스틸컷 이미지4


진심을 담은 엄마와의 짧은 나들이와 헤어짐 이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홍이는 엄마가 바르고 싶어 했던 붉은색 페디큐어를 자신의 발톱에 바른다. 이 엔딩의 의미는 뭘까. 잘 모르겠다. 그저 윤동주의 시 ‘병원’의 마지막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홍이의 건강도, 이 세상 모든 홍이들의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영화 <홍이> 스틸컷 이미지5



다음글 <로컬 픽, 시간과 빛: 각자의 궤도를 따라> : 부산과 부산 사람들
이전글 <로컬 픽, 시간과 빛: 10%의 사건과 90%의 반응> : 초심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