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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곡된 존재 증명의 섬뜩한 결과 - 영화 <침범>이 날 세워 그린 순간들202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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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존재 증명의 섬뜩한 결과 – 영화 <침범>이 날 세워 그린 순간들
송아름(영화평론가)
*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라는 질문이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할 때가 있다. 아무리 오래, 어떤 수를 써서 생각을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선 오랜 경험도, 이성도, 판단도 무가치하다. 게다가 어떻게 해도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면 절망이 앞서는 것을 막을 방법도 없다. 영화 <침범>의 영은(곽선영)에게 닥친 현실이 그렇다. 의심의 여지 없이 사랑스러워야만 할 딸 소현(기소유)은 피곤함을 넘어 공포스러운 존재가 된 지 오래다. 유치원을 다니는 딸을 바라보는 영은의 눈은 경계와 불안을 오간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는 영은을 해하고 반응을 살피면서도, 친구들을 위협하는 행동으로 몇 번이나 유치원을 옮겨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면서도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다며 오히려 영은을 다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아이는 왜 이러는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얼마나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영화 <침범>은 ‘이미 그렇게 태어난 아이’ 소현과 이를 견뎌내는 영은의 지친 모습을 오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이 아빠는 아이가 무섭다며 떠났고, 영은은 하루하루를 그저 버텨내는 중이다. 아이의 행동으로 여러 피해자가 생기고 자신조차 피해자의 대열에 들어섰지만 영은은 ‘사랑하는 딸’에 대한 당위로 혹은 책임감으로 그 시간을 꿋꿋히 견뎌 나간다. 영화는 어디에도 소현의 성격을 영은의 탓으로 돌릴 여지도, 소현의 행동에 이해를 구할 이유도 남겨두지 않으면서 관객 역시 영은의 당혹스러움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도저히 소현을 감당할 수 없던 영은이 자신의 손을 놓고 뛰어 나가는 소현을 잡지 않았을 때, 소현은 바로 그 행동을 질타하며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않은 영은을 다그친다. 이 장면이 너무나 무서운 것은 바로 이것이 소현이 사랑을 갈구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끔찍한 일들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소현에겐 없다.
소현은 우리에게 혼란을 주었던 <케빈에 대하여>(2011)의 케빈이나 <소년의 시간>(2025)의 제이미를 떠오르게 한다. 케빈과 제이미, 그리고 소현은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자신의 논리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상대가 아플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는, 스스로가 아이라는 사실이 어떠한 알리바이로 작용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이들이 보여주는 섬뜩함은 그 이유를 알 수 없기에 그만큼 많은 이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과 소현이 다른 점이 있다면 소현은 성인으로 성장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케빈과 제이미가 자신만의 범죄를 완성하고 남은 이들에게 충격과 혼란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면 <침범>은 그 이후, 그러니까 그들이 사회에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겠다는 욕망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내는지에 집중하려 했던 것이다. 영은이 소현을 포기해버렸던 그때에서 20년 후, 영화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영화는 마음을 굳게 닫고 특수청소업체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민(권유리)과 이곳에 갑작스레 끼어든 해영(이설)을 등장시키며 두 사람 사이에서 과거 소현의 흔적을 찾게 한다. 영화 속 민은 동명의 웹툰 <침범>에서의 민과 성격을 달리하면서 폐쇄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인물로 분하고 타인에게 사근사근한 해영보다 훨씬 소현과 가까운 듯 그려진다. 그러나 민과 그를 둘러싼 이들에게서 민을 구하겠다는 이유로, 한편으로는 이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이유로 점차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해영의 행동들은 천천히 소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러한 혼란스런 힌트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위험한 인물로의 연결이 얼마나 피상적인 것이었는지를 짚어내면서 내면을 숨기며 누군가의 삶에 침범하려 드는, 아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섞이고 싶어하는 이들의 모습을 섬뜩하게 그려낸다.
영화의 후반에 접어들수록 해영의 악행은 강도를 더해가지만 해영은 이것이 자신이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반작용인 듯 움직인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자신을 그렇게까지 밀어내려 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과거를 파헤치지 않았다면 아마도 해영은, 그러니까 소현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는 완벽하게 소현의 알리바이이며 이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며 또 누군가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를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의 해결법일 뿐이다. 영화는 해영의 행동이 섣부른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민과 현경(신동미)의 고통을 배치하며 자신만의 논리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영화가 도달한 곳은 이러한 해영을, 그리고 소현을 개인이 결코 말릴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벽 앞이었다. 결국 누구에게도 녹아들지 못했던 소현은 큰 상처를 입은 채 이미 세상을 떠난 영은을 만난다. 환상이면서도 너무나 현실의 만남처럼 연출된 이 순간 영은은 마치 자신의 업보처럼 남은 이 아이와 자신의 운명을 함께 하려 한다. 나와 같이 가자고, 더 이상 사람들을 해치지 말자고. 그러나 소현은 그런 영은을 다시 한번 잔인하게 외면하며 끝까지 자신만의 존재 증명을 할 것이라는 암시를 남긴다. 이 영화가 가장 무섭게 그린 현실은 바로 이 순간이다. 가족이든 혈연이든 어떠한 개인적 관계로도 ‘이미 그렇게 태어나버린’ 이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것, 이제 여기에서부터는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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