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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살구>, ‘돈’에 얽힌 뱀파이어 가족2025-01-24
영화 <은빛 살구> 스틸컷 이미지



<은빛살구>, ‘돈’에 얽힌 뱀파이어 가족


김경욱(영화평론가)


장만민 감독이 연출한 <은빛살구>의 주인공 정서(나애진)는 낮에는 회사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하고, 밤에는 뱀파이어가 나오는 웹툰을 그리며 웹툰 작가로 살아간다. 정서는 정규직이 되기를 학수고대하지만 쉽지 않다. 그래도 한편에서는 행운이 따랐는지 경쟁이 치열한 서울의 아파트 청약에 당첨된다. 문제는 계약금이다. 약혼자 경현(강봉성)은 계약금을 반반씩 부담하기로 했으니 더는 어렵다고 난색을 보이고, 정서는 할 수 없이 엄마 미영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미영은 이혼한 정서의 아버지가 9천만 원의 돈을 빌리면서 써준 차용증을 내밀며 아버지에게 빚을 받아오면 계약금을 해결해주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정서는 동해시의 ‘벌교 횟집’을 찾아가고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 영주(안석환)와 그의 가족을 만나게 된다. 정서를 대하는 아버지 가족의 반응은 다양하다. 영주는 예고 없이 나타난 딸을 크게 반기고, 그의 재혼한 아내는 친절하게 대하면서도 경계하는 눈치며, 이복동생 정해는 진짜 언니를 만난 듯 좋아한다. 정서는 이들 모두가 불편하지만, 아파트를 포기할 수는 없다. 프리미엄이 확실한 아파트는 곧 목돈을 챙길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영화 <은빛 살구> 스틸컷 이미지2


정서가 돈이 필요해 억지로 동해시까지 이동하게 된 것처럼,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가족 관계로 얽혀있음에도 그들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건 돈이다. 경현은 아파트에 대한 집착으로 정서의 방문을 응원하고, 영주가 부르자 지체하지 않고 동해시로 달려온다. 그는 정서가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었기에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영주는 건물을 새로 지어 횟집을 확장하고 카페 같은 공간을 마련할 계획이라며 정서와 경현에게 그 일을 맡아달라면서 9천만 원의 빚을 은근슬쩍 퉁치려 한다. 그의 아내는 정서에게 한 푼도 줄 수 없으니 단념하고 떠나라고 단호하게 종용한다. 정해는 거액이 든 통장을 정서의 눈앞에서 흔들며 자신을 도와주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결국 정서는 아버지의 치부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한 끝에 영주에게서 돈을 받아낸다. 동해시를 떠날 때 정서는 다시는 그곳을 찾아올 일이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채권자와 채무자로 가족을 이어주었던 돈이 이제 그 역할을 다했기 때문이다. 정서가 돈을 가져오자 엄마는 그 아파트에 자신의 방을 달라고 요구하고, 정서가 거절하자 계약금을 갚으라며 차용증을 쓰도록 한다.


영화 <은빛 살구> 스틸컷 이미지3


이 영화에는 뱀파이어 장면이 정서의 상상이나 꿈의 형태로 오프닝씬에서부터 모두 세 번 나온다. 첫 번째 장면에서는 뱀파이어 정서가 피를 마시려고 경현의 목을 깨문다. 두 번째 장면에서는 영주가 잠든 정해의 팔을 깨물어 피를 빠는 장면을 뱀파이어 정서가 목격한다. 세 번째 장면에서는 정서와 영주에게 물려 모두 뱀파이어가 되었는지, 정서와 영주뿐만 아니라 경현과 영주의 새 아내도 뱀파이어이다. 이때 영주의 새 아내는 영주에게 업힌 채 영주의 목을 문다. 사실주의 스타일로 잔잔하게 전개되는 영화에서 이 뱀파이어 장면은 어떤 활기를 불러일으키면서, 이 영화의 주제를 환기한다. 가족이라도 피가 필요하면 물어뜯는 뱀파이어처럼, 이 영화의 인물들은 가족이면서도 돈을 매개로 해서 서로 착취하는 관계다. 


영화 <은빛 살구> 스틸컷 이미지4


그렇다면 정서에게 돈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정서가 정규직이 되려고 온갖 수모를 견디거나 아파트를 소유하려고 악전고투하는 이유는 모두 돈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과정을 거치면서 정서는 점점 더 회의감에 사로잡힌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정서의 회의감은 분노로 폭발하게 된다. 라이더들이 정서의 회사 앞에서 ‘라이더 보호법 제정’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펼치며 정서가 그린 ‘라이더 구인 광고 포스터’를 불태우자 회사의 부장은 소화기로 끄라고 강압적으로 명령한다. 라이더들의 요구와 행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비정규직의 정서는 그들에게 냉소를 보내는 부장과 정규직 직원들을 향해 소화기를 분사한다. 그러자 경현이 말리려고 나선다. 경현이 정서를 껴안으며 설득하려고 할 때, 정서는 첫 번째 뱀파이어 장면처럼 그의 목을 물어뜯는다. 여기서 뱀파이어 장면의 의미가 공격성의 표출로 바뀌면서 착취를 나타냈던 원래의 의미와 어긋나게 된다. 경현은 피가 나는 목을 손으로 감싼 채 아파트를 포기하지 말라고 집요하게 애원한다. 그의 모습은 입에 피를 묻힌 채 아파트를 포기하기로 결심하는 정서보다 더 뱀파이어처럼 보인다. 정서의 주변 인물들과 그녀가 겪은 사건과 소동은 한국 사회가 그야말로 배금주의가 판치는, 돈에 굶주린 뱀파이어 사회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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