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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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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인 무비 상영작 <헨리 5세> 포스터

헨리 5세(셰익스피어 인 무비)

GV6 Henry V
프로그램명
[시네마테크] 셰익스피어 인 무비
상영일자
2022-09-06(화) ~ 2022-09-18(일)
상영관
시네마테크
작품정보
137min | D-Cinema | color | UK | 1944 |
관람료
일반 7,000원 / 유료회원, 청소년(대학생 포함) 5,000원 / 우대(조조, 경로 등) 4,000원
감독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 로버트 뉴튼, 펠릭스 아일머
  • 중세 시대의 영국, 글로브 극장의 깃발이 올라가자 연주가 시작되고 관객들이 객석을 채운다. 연극의 막이 오르고, 캔터베리 대주교와 엘리 주교가 작금의 왕국 상황과 교회의 미래에 대해 머리를 맞댄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등장한 헨리 5세는 신하들과 함께 프랑스와의 관계에 대해 의논하는데, 마침 프랑스의 황태자로부터 도착한 선물은 모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선포한 헨리 5세는 직접 프랑스 북부의 아쟁쿠르로 향한다.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중 하나인 『헨리 5세』를 각색했다. 연출과 주연을 모두 맡은 로렌스 올리비에는 영화적 기법을 통해 좁은 연극 무대의 공간적 한계를 무너뜨렸다.


    * 1946년 베니스영화제 국제상 특별언급, 1947년 아카데미 공로상


    * 글의 무단 전재를 금함.(출처 표기: (재)영화의전당)


    *시네도슨트 영화해설*

    일시 : 9월 14일(수) 18시 30분 <헨리 5세> 상영 후

    해설 : 김필남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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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렌스 올리비에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
    셰익스피어 해석의 대가이며 이야기꾼이자 배우 중의 배우인 로렌스 올리비에 경은 무대 연출과 명석한 드라마 연기의 화신이다. 올리비에는 영국 국교회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엄격한 종교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머니는 그가 12세 때 세상을 떠났지만 아버지는 그가 연기자의 길을 추구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옥스퍼드의 세인트 에드워드 스쿨에서 초등교육을 받을 때부터 학교 연극 공연에 참여했고 이후 런던에 있는 센트럴 스쿨 오브 스피치 앤드 드라마에 진학했으며 그 후에는 버밍엄 레퍼토리 컴퍼니에 입단했다. 1930년에는 첫 번째 아내이며 역시 연극계의 떠오르는 스타였던 여배우 질 에스먼드와 결혼했고 30년대 중반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풍미 있고 세련되게 연기한다는 명성을 얻었다. 특히 1935년 런던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그랬듯이 존 길거드 등 다른 명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설 때 더욱 좋은 연기력을 발휘했다. 올리비에는 영화에서도 활동했지만 여전히 무대가 그의 열정의 중심으로 남아 있었고, 영화 연기에는 합리적인 상업적 동기가 담겨 있었다. 벌이는 영화 쪽이 좋지만 매 공연마다 실제 관객과 연기자를 연결해주는 살아있는 예술이 행해지는 곳은 바로 연극 무대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두 번째 아내(1940~1960)인 비비안 리를 만났고 부부는 할리우드를 정복해나가기 시작했다. 할리우드는 전적으로 남부의 캘리포니아에서만 씌어진 작품들에는 아쉽게도 부족한 세련된 감각과 장인정신과 전통이 영국인 배우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39년 리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히트시키며 두 번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중 첫 번째를 거머쥐었고 올리비에는 「폭풍의 언덕」으로 주연 영화배우로서 입지를 확립했다. 이들 부부는 「영광의 결전(1937)」와 「해밀턴 부인(1941)」 등 몇 편의 영화에서 스크린 상의 연인으로도 등장했는데 두 사람의 관계의 진실은 그들이 남은 생애 동안 자주 올랐던 연극 무대에서 더욱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40년대에는 「레베카(1940)」와 「오만과 편견(1940)」, 「헨리 5세(1943)」를 만들었고 전쟁 중에는 공군으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가 주연을 맡고 각본을 쓰고 감독까지 하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고 감독상 후보에 올랐던, 그의 최고의 성취 중 하나인 「햄릿(1948)」이 만들어졌다. 주인공에서 조연 배우로 50년대에 「캐리(1952)」와 「리처드 3세(1955)」, 「악마의 사도(1959)」 등에 출연했던 올리비에는 조울증에 걸린 비비안 리와 이혼하며 60년대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처음에는 런던에서 연극으로 공연했고, 이어서 대서양 건너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든 「엔터테이너(1960)」에 함께 출연한 존 플로우라이트와 결혼했다. 「스파르타쿠스(1960)」와 「엉클 반야(1963)」, 「오셀로(1965)」 그리고 「공군 대전략(1969)」을 보면 그가 점점 주연급에서 물러나 조연으로 자주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발자국(1972)」과 「마라톤 맨(1976)」, 「머나먼 다리(1977)」, 「잔혹한 음모(1978)」등 더욱 기억에 남는 역할들이 아직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세대에게 올리비에는 「타이탄 족의 멸망(1981)」에서 낮은 신들과 인간들 위에 군림하는 제우스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 이전에 행해진 모든 것들 뒤에 이런 이상한 기억이 한 자리를 당당히 지키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특히 올리비에가 텔레비전과 무대에서 이어온 유명한 경력을 감안하면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위대한 배우가 때로는 출연료 때문에 일을 하기도 했고 또 어린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단순한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올리비에가 연기한 제우스의 이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 신들은 버려지거나 잊혀진다 해도 별들은 결코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아카데미상 후보에 열한 번 올라 두 번 수상하고 두 번의 공로상을 받았으며, 에미상 후보에 여덟 번 올라 네 번 수상했고 골든글로브상 후보에 세 번 올라 두 번 수상하고 공로상을 한 번 받았지만, 로렌스 올리비에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은 아마도 '스타'라는 말일 것이다. 그 자체로 그는 불멸의 존재이며 결코 잊혀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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