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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영화사회학

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바다의 연인:여성적 상징 세계2018-02-22
세이프 오브 워터 스틸컷_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바다의 연인:여성적 상징 세계

 

* 일시 : 2018.02.22 (목) 19:00

* 장소 : 영화의전당 소극장

* 강연 :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 (철학박사)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대배경은 1962년도로 되어있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1962년 9월 17일(월)에서 10월 10일(수)까지 진행이 됩니다. 어떤 분들은 63년이라는 분들도 계시던데, 심지어 영국의 유명한 신문에서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달력을 찾아보니까 62년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조사를 합니다.(웃음) 그래서 안심하시고 62년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고, 다 아시다시피 우주개발과 핵전쟁 위기가 있던 시기입니다. 지난달에 아름다운 별이라는 작품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었는데 그것도 1962년를 배경으로 한 영화였습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을 원작으로해서 요시다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는데, 그때와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길게 말씀드릴 시간은 없지만 <아름다운 별> 같은 경우에는 외계인의 관점과 시선을 가져와서 인류를 바라보는 관점을 도입했다면, 오늘 영화 같은 경우에는 지구 외계가 아니라 지구 내부에 있는 혹은 지하에 있는, 물속에 있는 이질적 존재를 가져와서 그 시선으로 본다는점에서 굉장히 양극에 있지만 또 통하는 점이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태평양 심해에 있는 심연에서 괴물이 올라왔다는 영화가 있었죠. 바로 2010년에 개봉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퍼시픽 림>입니다. 곧 <퍼시픽 림:업라이징>도 개봉이 되는데요. 거기에서 괴수가 일본말로 ‘카이쥬(怪獣)’라고 발음하죠. 바다 밑 심연의 갈라진 틈에서 올라온 존재라는 말이고, 외계적 존재라는 거죠. 외계가 지구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곳, 지하, 해저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기는 상당히 양자택일 논리가 팽배해 있던 시기고 말하자면 양서류가 살기 힘들었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그때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을 그린 영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오늘낭의 소수 이민자의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트럼프 시대에 대한 알레고리라고도 볼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양서류 동물이 어디서 왔습니까? 아마존 강에서 왔잖아요. 현재 갈등이 많은 중남미 지역에서 온 거죠. 이민자를 제일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나라에서 온 거죠. 말하자면 저 친구 자체가 하나의 이민자 자체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겠죠. 그런 면이 있습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여러 가지 맥락이 중첩으로 깔려있는데,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만 들어보면, 첫 번째는 우리가 많이 아는 전설, 동화, 영화들이 많이 깔려있다는 겁니다. 전설, 동화 같은 경우 어떤 것들이 생각나셨나요?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그리고 신데렐라도 연관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보충 드린다면 이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던 것이 아마존에 있는 인어전설의 모티브가 중요하게 들어간 것 같아요. ‘엥칸타도(Encantado)’ 라고 하는 인어입니다. 그쪽에서는 인어를 그렇게 부르는데요, 아마존 강에 사는 핑크색 돌고래를 말합니다. 저 친구가 밤이 되면 사람으로 변합니다. 주로 남자로 변해서 찾아오는데,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언제나 모자를 쓴다는 겁니다. 왜 모자를 쓰는가 하면, 저 돌고래가 모든 부분이 사람으로 바뀌는데 머리꼭대기만 변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감추기 위해 모자를 착용하고, 또 다른 특징이 음악과 춤을 좋아하고 뛰어나 그것으로 많은 여성들을 유혹하기도 합니다. 오늘 영화에서도 춤, 음악이 굉장히 중요한 소통의 수단이 되잖아요. 그게 엥칸타도 전설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가져온 부분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불어로 ‘만나서 반갑습니다.’를 ‘앙샹떼( Enchanté)’라고 하잖아요. 스페인어 ‘엥칸타도(Encantado)’와 같은 말입니다. 지금은 만나서 반갑고, 기쁘다는 말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마법에 걸렸습니다.’라는 말이거든요. 마법에 걸려서 황홀할 만큼 기쁘다는 뜻이죠.

 

영화적인 측면을 본다면 여자 주인공 ‘엘라이자’가 빨간 구두를 쇼윈도에서 보다가 인어를 구출해서 욕조에 모셔놓고 있다가 신발을 어느 샌가 사죠. 마지막 부분에 가면 빨간 코트와 신발이 보입니다. 저 요소는 명백하게 라고 하는 1950년대 영화에서 가져온 모티브다. 왜냐하면 감독이 저 영화를 인생 베스트 3 영화로 보고 있는 영화인데다가, 저게 우리말로 <분홍신>이잖아요. 저 신발을 신으면 무도병에 걸려서 죽을 때까지 춤춘다는 것을 모티브로 한 발레영화인데,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엘라이자’도 인어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인어공주가 원래 안드레센 전설을 보면, 목소리를 잃는 대신에 춤을 잘 출 것이라는 축복을 주죠. 이런 부분이 <분홍신>과도 직결될 뿐만 아니라 조금 전 말씀드린 ‘엥칸타도(Encantado)’ 자체가 춤꾼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춤으로 대화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맺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편견이라는 것이 중요한 모티브로 많이 들어가 있죠. 사회적 편견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소수 약자들이 힘을 합해서 대항하고 연대하는 모습이 중요한 계기로 들어와 있고요. 그러면서 이 모두를 아우르는 주제가 세 가지가 있다면, ‘여성, 물, 사랑’이다. 이 세 가지를 또 하나로 아우르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물’ 같은 경우에도 물이라는 것은 고대 철학자 ‘탈레스’가 ‘우주는 물이다’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일까 생각을 많이 했는데요. 따지고 보면 물이라는 것은 고체, 액체, 기체 우주의 자연물이 갖출 수 있는 요소를 다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 것이 흔치 않잖아요. 달라 보이고 다양해 보이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 할 수 있는 원리는 물이다고 생각할 법도 한 거죠. 그만큼 변화를 하는 것이고 그리고 물방울들이 모여서 냇물, 강물 등 물끼리 모여서, 뭉쳐서 바다로 까지 갑니다. 그랬다가 증발해서 다시 비로 내리는 이 거대한 순환이 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모이는 ‘친화’, 모여서 ‘동화’가 되고 큰물을 향해가는 ‘귀화’ 이것이 중요한 테마이고, 오늘 말씀드린 ‘물’의 상징에서 한 축을 차지하는 것이고, 오늘 영화에서 보면, 어떻게 보면 목욕탕 문을 수건으로 막하서 물을 채우니까 물이 극장으로 내려가잖아요. 어떻게 보면 꿈의 세계 위에 집이 있었는데, 그 물이 다시 또 돌아가는 순환이 있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물을 그렇게 흘러가고 고정된 형태로 있지 않고, 서로 스며들고, 우리가 알 수 없는 깊이 있는 심연, 모든 것이 뒤섞여있는 혼돈으로 돌아간다. 이런 이야기가 물의 상징에서 중요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이고, 오늘 영화에서도 그런 테마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몇 가지만 나중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주제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전설, 사회적 편견, 소수자의 연대, 여성, 물 상징 모두를 아우르는 의미에서 사랑이 거론되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 속의 사랑을 두 가지 관점으로 크게 나누어서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Rumi’라고 하는 페르시아 시인이고요. 하나는 Luce Irigaray 라고 하는 벨기에 출신의 저서 『Marine Lover』라는 두 가지의 책을 가지고 영화 속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Rumi’라는 시인의 시 네 편을 인용하면서 오늘 영화와 곁들여보고자 하고, 『Marine Lover』에서 다섯 군데 정도를 인용해서 영화와 연결시켜보고자 합니다. ‘Rumi’라고 하는 분은 터키 쪽에 팔 양쪽으로 끝없이 뱅글뱅글 도는 춤이 있죠. 그 춤을 창안하신 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남아 있는 동상과 조각은 춤추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 영화에서 춤이 중요한 테마로 작용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Luce Irigaray’라는 사람이 지은 『Marine Lover(바다의 여인)』이라는 책은 부제목이 한마디로 말해서 ‘니체에게 보내는 사랑 편지’입니다. 철학자 니체에게 보내는 사랑편지인데, 내용은 어떤식으로 전개되는가 하면, 니체가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의 형식과 문체를 그대로 미러링한 책으로 같은 방식으로 쓰면서 니체를 비판한 책인 거죠. 굉장히 페미니즘 안에서도 독특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 중 몇가지를 뽑아서 나중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지막 대목에 나왔던 시를 한 번 보시죠.

 

시1

 

그대의 모양

무언지 알 수 없네

내 곁엔 온통 그대뿐

 

그대의 존재가 사랑으로

내 눈을 채우고

내 마음 겸허하게 하네

 

그대가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한국에서는 늦게 개봉되었지만 전 세계에서 이 영화를 본 분들이 이 시가 누구의 시인가 궁금하게 생각했어요. 영화에 끝날 때 보면 ‘자일즈’의 목소리로 내레이션이 나오는 데, 수백 년 전에 한 사랑에 빠진 시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수백 년 전 시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공부를 했는데, 결론은 저것과 똑같은 시는 없습니다. 그러면 뭘까 했는데, 감독에게 누군가가 직접 물었죠. 감독의 말이 몇 년 전에 서점에 서서 어떤 이슬람 시인의 시집을 읽었는데, 그 시를 자기가 따왔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그 이슬람 시인이 누구인가 하니, 기억이 안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답은 없는데, 제 생각에는 ‘Rumi’라는 시인일 가능성이 좀 있는 것 같아요. ‘Rumi’라는 시인은 통계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미국에서 인기 있고 가장 많이 팔린 시인 중 하나 입니다. 우리로 치면 고려 13세기 무렵에 활동했던 시인이고, 거의 남녀 사랑 시 형태로 글을 씁니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나 수피즘 명상의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 같으면 한용운 시인의 시, 인도의 타고르 같은 시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시를 쓰는 화자가 여자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여성적 글쓰기를 평생하신 분입니다. 굉장히 독특하신데, 2007년도에 탄신 800주년 기념으로 유네스코에서 세계 ‘Rumi’의 해로 선정할 정도로 미국에서 굉장히 인기 있는 시인으로 이분의 이야기가 마지막 대목과 상당히 통하는 것 같아서 보고자 합니다.

 

시2

 

Rumi <씨앗가게>

 

그대는 흙속에 묻히거나

바람에 날려갈 것을

두려워했다

 

, 그대 물머리 water bead 돌려

 

그것이 온 곳인 바다로

떨어지게 하라

더는 과거의 형상을

갖추지 못해도

물은 물,

본질은 같은 것

 

자기를 내어 던지는 것은

자신을 깊이 공경하는 것

 

바다가 연인으로 다가 오거든

곧바로 결혼하라

 

 자기가 사라질 것 소멸할 것을 걱정했다. 이게 지금 Rumi의 시에서 굉장히 중요한 테마인데요. 걱정하지 말고 확실히 소멸시키고 더 큰 것을 얻어라. 이런 테마가 굉장히 많이 나오고 그것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Irigaray의 책 제목과도 잘 어울리고, 오늘 영화와도 상당히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 시를 감독이 서점에서 보고 자기 식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나. 똑같은 시는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것과 연결되는 부분을 생각하면 버스타고 출근할 때 차창에 비가 치니까 물방울을 보고서 주인공이 손으로 건들이죠. 그때 물방울들이 모여서 음악과 함께 어딘가로 흘러가죠. 두 물방울이 큰 물속으로 퐁당 들어갑니다. 이것이 Rumi의 시와 통하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존재가 물속에서 모두가 물에 정화가 되어 버린다고 할까요. 물의 정령이 되는데, 마지막에 흉터가 아가미로 바뀌잖아요. 저게 참 묘한 장면이죠. 우리가 영화 앞쪽에서 양서류가 가지고 있는 치유 능력을 생각하면 살렸다고 볼 수 있는데, 조금 다르게 본다면 어쩌면 목의 흉터 자체가 아가미였는데 억압되고 닫혀있고, 눌러져 있었는데 잠재된 상태를 원래대로 드러나게 도와줬다고도 볼 수 있지 않는가 생각해요. 완전히 없던 것을 갈라서 아가미로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원래 이 사람이 가지고 있던 아가미의 정체성을 현실로 드러나게 해준 것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왜 그런가 하면 사실은 여자 주인공 자체가 어떻게 보면 남자 인어보다 더 과거가 신비스러운 존재고, 물속에 아기가 버려져 있고 그것을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스트릭랜드가 이야기 하죠. ‘목에 흉터가 잔뜩 있는데 성대를 끊은 건가?’ 그 질문에 말을 하지 못하죠. 아기 때부터 그랬다고 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엘라이자 자체가 인어공주가 아닌가 생각을 해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가능한데 그중에서 ‘바다의 흔적’이 집에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엘라이자가 바다에서 왔다는 흔적 말이죠. 대표적으로 가운데 창문을 보시면 자일즈 집과 시옷자처럼 붙어있어서 창문을 반쪽씩 나누어 쓰고 있죠. 창을 둥글게 쓰고 나무판자를 보면 대각선으로 되어있죠. 자세히 보시면 수직 직교가 되고 직각이 되는 것이 없고요. 전부 대각선 곡선 중심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이 여성적 상징체계이자 바다, 물과 통하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벽이 희뿌옇게 되어있고, 왼쪽에 나무로 깎아서 만든 조형물과 그 위에 벽화가 있죠. 벽은 감독이 미술감독에게 부탁해서 일본 그림인 ‘ 浮世絵(우키요에)’의 파도를 먼저 그려놓고, 나중에 희미하게 지워달라고 다시 부탁한거에요. 계속 지워나가서 마지막에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집니다. 최종적으로 전달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희미해서 영화를 두 번째 볼때는 보일지 모르겠지만 처음 볼 때는 저것이 파도라고 보기에는 약한 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에 나무로 깎은 것은 포스터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일본판화인데요. 물고기 비늘형태입니다. 집구조나 벽지, 벽에 있는 흔적들이 엘라이자가 바다에서 왔다는 어떤 흔적들을 보여주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 더 말씀드리면, 극장에서 영화가 동시상영으로 이루어지는데 손님이 거의 없죠. 거기서 상영한 작품 중 하나가 성경에 나오는 ‘룻기(Ruth)’죠. 여기서 어머니를 바다라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영화와 굉장히 잘 연결된 것 같고, 바다 그리고 나아가서 바다의 에센스, 정령인 저 존재와 함께 바다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말하자면 양서류가 시어머니 인거죠. 이야기를 짧게 말씀드리면, 한분이 아들 둘과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옆 동네를 갔는데, 신랑도 아들 둘도 다 죽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두 사람 총 세 사람만 남은 것이죠. 그렇게 되니 시어머니가 각자 살길을 찾으라며 보내죠. 그랬더니 한 며느리는 조금 망설이다가 떠나고, 한 며느리는 끝까지 함께 이스라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룻기(Ruth)’인데 교회에 다니는 한국 시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라며, 충직한 며느리의 표본으로 사랑받는 캐릭터인데, 저때 시어머니를 따라간 것을 바다로 간다고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장치다. 그것이 언제나 상영되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속 인물 유형을 바다와 연관성을 인정하는 자, 그것을 부정하는 자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르게 말하면 바다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양서류 인간과 양서류가 아닌 인간으로 오늘 영화에 나오는 인물을 크게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화면 이미지(amphibian man)는 양서류가 맞는 것 같고요. 오늘 괴물의 디자인 측면에서 영향을 많이 준 양서류는 영화 <검은 늪지대의 생명체>에 나온 괴물인데 저것을 감독이 어렸을 때 TV를 통해 보고 너무 좋아서 저런 영화를 꼭 만들어 보고자 한 것이 오늘의 영화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고요. <검은 늪지대의 생명체>에서는 양서류를 ‘아가미 인간(Gill-man)’ 이라고 불렀어요. 오늘 영화의 주인공도 양서류, 그리고 여주인공 엘라이자도 물과 이 세계를 오가는 양서류라고 본다면, 진짜 파충류·양서류라는 뜻이 아니고 이웃집 화가 자일즈 역시 남성과 여성을 오가는 그리고 러시아 출신 과학자인데, 미국에 와서 미국편을 들다가 잘못되어 러시아 사람 총에 맞고 미국사람 몽둥이에 맞아 죽죠. 그렇게 계속 연속해서 맞기도 힘들 텐데, 이리 맞고 저리 맞으며 양서류들이 살기 힘든 1962년대였다는 거죠.

 

그런데 이에 비해서 양서류를 미워하거나 양서류가 아닌 사람, 저는 ‘바다를 잊은 남성’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여성의 경우 그래도 그 끈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남성의 경우 놓치거나 부정하고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보면 인간의 조상은 물속에서 숨쉬고 ,수영을 위한 방광, 큰 꼬리, 불완전한 두개골, 암수 한 몸 이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 가설은 지금도 상당히 인정받는 가설입니다. 원래 암수한몸이었고, 물속에 숨 쉬는 존재였는데 우리 뿌리가 물속에 있다는 것이죠. 이런 측면에서 남자 양서류는 사실은 암수 한몸같은 측면이 있기 때문에 남자라고 이야기하기 애매한 부분은 있습니다. 여기서 Irigaray분이 조금 전 말씀드린 『Marine Lover(바다의 여인)』이라는 책에서 남성들이 ‘바다의 심령’을 망각했다는 점을 깊이 있게 책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비판합니다. 심연이라는 것은 등호로 볼 수 있는데, 생명이고 물이고 어떤 고정된 형태를 벗어나는 흐름이고 그것이 여성성을 갖고 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용하면 “단단한 지면이 지하와 해저의 삶에 바탕을 둔다는 것”, 아파트 밑에 극장이 있었다는 것도 하나의 비슷한 형식이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은 근원, 통일성, 최초의 유모에게 돌아가는 것”인데, 남성들은 이것을 계속 부정하려고만 한다는 겁니다. 그럼 부정함에 따른 결과는 사람들 사이에 장벽을 쌓고, 자기 폐쇄적 동일성 속에서만 계속 갇혀서 맴돈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온 기억들을 원 바깥으로 밀어내버린다. 그리고 어두운 기억들을 쫓아버리려고 하는데, 왜냐하면 어두운 기억은 다른 사람에 의해 받은 기억들은 다 밀어내고 좋은 기억만 강화해서 더 크게 원을 만들어 나간다. 영화에서 스트릭랜드가 생각보다 무식하지 않은 사람인데, 책을 열심히 보고 있죠. 저 책이 무엇인가 하면 적극적사고, 능동적인 생각이라는 책을 보고 있어요. 저 말 자체는 나쁜 말이 아니지만 만약에 어두운 생각이 타자의 생각, 타인의 생각이라면 그런 것들을 몰아내는 것이 긍정적인 생각이고 밝은 생각이라면, 저런 사고방식은 상당히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추락하지 않으려고 빈틈없는 원안에서 자기를 지키려고만 하고요. 원 바깥에 밀어내서 바깥에 놓여진 존재들이 영화에서는 여러 사람이 존재한다는 거죠. 청소하시는 분들 그리고 흑인, 자일즈가 사귀자고 말하는 동시에 뒤쪽의 흑인부부들이 이런 대사를 합니다. “성이 Esposito면 고아란 거지?”라고 할 때, Es는 바깥, Positus는 놓다라는 의미인거죠. 그런 존재들이 사실은 이 영화에서 엘라이자의 친구들이죠. 스트릭랜드의 반대편에 서있죠. 이 친구들이 대단히 인간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데, 스트릭랜드의 차가운 면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차가운 것들이 Irigaray가 말하는 남성적인 것과 많이 연결되는 거죠. 타인에 대해서 열어보지 않는 폐쇄성, 폐쇄적 동일성 그런것들이 바로 물에 반대된다는거죠. 물은 바로 그것과 반대되는 것이고 그것에 반해서 넘어가는 형태를 폐쇄적 자기 동일성을 벗어나는 형태를 넘어서는 물, 여성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신은 타자의 통로를 회피하고, 타자에 대해선 공포, 추락의 느낌, 지옥의 비전만 간직한다.” 양서류에 대한 적개심과 아픔을 간직하고, 그러면서 구획을 해야 하니까 공간적 재배치, 지배를 하면서 통제하는데 “들어오기 전엔 노크부터 해” “문 좀 닫아주겠나” 등 공간적인 구획이 반듯해야하고 닫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Irigaray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면 “당신은 나와 당신, 나와 나 사이에 댐을 만들기를 바란다.” 영화가 바로 그것이 넘어가는 때를 기다려서 마치 혼자 내보내려다 같이 나아가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Irigaray의 인용과 상당히 연결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Irigaray의 책을 또 인용하자면 “나는 ‘나’와 ‘당신’ 사이에 다시 통로가 열리고 삶과 죽음을 공유하길 바랍니다.” 하면서 저 둑이 빗물 때문에 넘쳐서 열릴 때를 기다립니다. 남성적 상징 세계과 상당히 다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소통할 것인가에 대해서 소리 없는 목소리로 절규를 하죠. “나도 그 사람처럼 소릴 못내요.”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소리를 못 낸다는 것이 소통의 엄청난 걸림돌인데, 평소에 말을 잘 안하고 다른 소통수단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양서류와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다. 그때 엘라이자가 하는 말이 그냥 눈만 보더라도 행복해하고, 나를 보면서 뭔가 부족하고 결여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분 없이 행복해 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Rumi의 시를 다시 인용하면 이 시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Rumi가 떠돌이 생활을 오래했는데, 인도사람 터키사람 언어와 종교가 다른데 그 상황을 지적하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지금 말하자면 다문화 상황, 종교 갈등 상황에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관용 정신을 이야기 한 것이죠. “서로 알아듣는 말을 쓴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가슴으로 하나 되는 것이 혀로 하나 되는 것보다 낫다. 라고 1200년대 사람이 이야기를 한 거죠. 소리 없는 목소리로 말하고 소통하기 시작합니다.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분이 웅변가가 되어 어떻게 보면 순진한 자일즈를 설득시키고 힘들게 만들지만 자일즈는 머리카락 일부를 얻었죠. 저 대사가 참 좋았습니다.”걔는 인간도 아니잖아“라고 하니까 하는 말이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런 것을 목소리를 쓰지 않고 웅변하죠. 그리고 소리 없는 목소리로 스트릭랜드가 성폭행을 하려고 시도했죠. 그러고 나서 분명한 의사표현을 하는 거죠. 다시 Irigaray로 돌아가면 남성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가장 고달팠던 것은 내 입술을 봉하고, 입을 막고, 사랑의 바깥에 놓여 있던 것이 가장 고달팠다. 그러나 당신들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가 있다는 걸 당신은 기억하지 못했을 겁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Irigaray도 이야기 하는데, 니체가 그래도 대화가 잘 될 것 같아서 대화를 하고 욕을 한데요. 다른사람들과는 전혀 대화가 안 될 것 같아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니체는 가고 없지만 니체의 연인이라고 생각하고 네가 똑바로 생각해줬음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당신들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을 이 영화에서는 집중적으로 많이 보여주는 것 같아요. 남녀가 거의 대사가 없잖아요. 음악과 춤이 중요한 언어로 소통되는 수단이었던 것 같아요. 버스 차창에서에서 물방울 만질 때 나오는 노래가 부르신 분은 미국에서 유명한 여자재즈가수가 불렀지만 가사를 보면 뜻으로 의역하자면 ‘내가 당신을 알기 전에는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냈어’ 라고 시작하는 노래이지만, 직역을 하자면 ‘당신에게서 바람이 불어오기 전까지 나는 입만 벌리고 살았어.’ 우리가 너무 엄청난 일을 만나면 입이 딱 벌어지고 아무 말을 못하는 상황이 있잖아요. 그렇게 표현을 하거든요.

 

소통과 관련해서 Rumi의 시를 인용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시3


Rumi <내 가슴이 사랑으로 불탑니다>

 

내 가슴이 파도처럼

열정으로 고동칩니다

 

어디든 내가 있는 곳이

내 집이며

연인의 방에서 눈을 감고

춤추는 아름다움을 봅니다

 

베일 뒤에서

사랑에 취한 나 또한

이 움직이는 세계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춥니다

 

내 연인의 세계에서

난 그만 넋을 잃었습니다

 

 

 

“동료들이 나에게 등을 돌리고 적들처럼 돌렸지만 나는 바람처럼 자유롭다.” 라는 구절이 있고 “어디든 내 집이고, 연인의 방에서 눈을 감고 춤추는 아름다움을 봅니다.” 굉장히 엄숙한 명상 시인인데 시를 쓰면 사랑의 시만 쓴 거에요, 참 신기한 분이죠. 자기의 의사를 전달한 수단은 전부 춤이고, 어떻게 보면 ‘제비족’같은 형태인데 이 메시지가 여러 층차를 가지는 것이죠. 참고로 이 대목에서 캐나다 국립 발레 안무가가 한 것이거든요. 영화 속에서 『you naver know』 가 나오잖아요. 노래를 부른 건 미국의 오페라 가수가 부르고 저 동작이 설렁설렁 카바레 댄스같이 보이지만 발레 안무가가 만든 춤으로 굉장히 공을 많이 들이고 미국의 예술가들을 보이지 않게 굉장히 많이 배치시킨 영화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거나 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어쨌든 춤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야 말로 꿈을 공유하는 최상의 방법이 아닌가라는 메시지를 던지듯이 저 장면이 진행됩니다.

 

다시 Irigaray를 인용하자면 양서류 인간을 물로 보내려고 하는데 스트릭랜드가 나타나 총을 쏘는데 조금 있다가 양서류가 다시 일어나잖아요. 거기서 인용하면 그 존재가 어떻게 일어 날 수 있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아요. “바다표면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서로 덮으며, 분리되지 않는다.” 저 존재가 바다와 같은 존재라면, 물은 총알로 해칠 수 없고, 칼로도 해칠 수 없죠. 그런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하는 거죠. 물에 사는 양서류가 아닌 저 아이가 바로 물이라는 거죠. 그렇게 볼 때 여성의 강함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예리한 칼도 소용없다. 칼이 들어가면 다시 닫히고, 칼날은 흔적도 남기지 못한다.” 남자들은 배를 타고 탐험을 하며, 발견의 시대라고 신나게 배를 저어서 갔는데 배가 지나가고 나면 바다엔 흔적도 안남는다며 Irigaray가 조롱을 합니다. “심연의 신비는 그대로 온전히 남는다. 한낮의 빛으로도 단일한 개념으로도 포착 되지 않는다.” 그것을 동그라미 속에 넣어 가두려 하지 마라는 겁니다. 그런것들을 벗어날 때, 여성성을 더할 때 사회가 인간관계가 더 부드러워진다는 것이 담긴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양서류 인간을 살려준 것은 엘라이자고, 엘라이자가 총에 맞은 것을 물속에서 살려준 것은 양서류이고, 그래서 물속에서 살려주면 어머니 같은 존재인데 서로가 서로에게 어머니가 되는, 성구분이 암수한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호해지는 그런 대목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깃 ‘상호생성’이다. 누가 누구를 생성시켰는지 모를 정도로 서로 생성시켜주는 관계이고 여기서 Rumi의 시를 마지막으로 인용하면 “연인들의 생명은 죽음 속에 있다. 네 가슴을 잃어버리기까지는 사랑하는 이의 가슴을 얻지 못하리.” 이것 또한 물에 뛰어드는 것이라는 겁니다.

 

총 결론을 내리면 <검은 늪지대에의 생명체> 감독이 저 괴물에게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말씀 드렸는데, 여자 한명이 헤엄을 치는 데 물 속에 있는 아가미 인간이 드러나면 놀라니까 좋아서 따라 가는데 제3자가 보고 있으면 섬뜩하지요. 저 장면을 보니 생각나는 게 없으세요? <죠스> 포스터가 생각나지요. <죠스> 포스터가 이 장명을 오마주 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저 장면에 대해 감독이 6살 때 느낀 점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무나 시적인 장면이다.” 저 장면을 보고 뭘 결심을 했는가하니까, “두 사람이 해피엔딩해서 결합하는 영화를 꼭 만들겠다.”고 한 것이 오늘의 영화입니다. 그리고 <미녀와 야수>와 비교해서 말하자면 <미녀와 야수>가 맞긴 하지만 새로운 <미녀와 야수>다. 왜냐하면 완벽한 공주가 아니고, 야수도 사랑 때문에 자기를 가짜 자신과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죠.

 

여성적 상징세계에 대해서 Rumi와 Irigaray의 이야기를 많이 인용했는데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결국 이 영화에 연결해서 중요한 것은 물은 닫힌 동일성을 벗어나 형태를 바꾸는 존재이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 모두 물에서 재탄생을 한다. 그럼 이때 물이라는 것은 무엇인가하면 생물학적인 물리적인 물을 넘어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바로 타인을 배척만 할 것이 아니라 환대할 줄 알고, 자신도 고정된 형상 속에서만 갇혀 살려고 하지 말고, 넘어서서 버릴 줄도 벗어날 줄도 아는 것이 물이 주는 교훈, 메시지가 아닌가. 이 영화 역시 남녀의 사랑을 통해 그런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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