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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영화사회학

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다가오는 것들>- 누벨 엘로이즈 : 어느 프랑스 여인의 철학적 사랑2016-09-08
다가오는 것들 스틸컷

 

* 강 연 :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
* 장 소 : 영화의전당 소극장
* 일 시 : 2016.09.08

 

일상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삶속에서 헤쳐 나가는 방식은 비일상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과 문제가 생겼을 때도 굉장히 비일상적으로 다른 방법으로 헤쳐 나갔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저는 약간 새로운 관점, 제가 생각하는 관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나탈리는 고상하고, 고고하고 지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삶의 자세, 태도를 보여주었고 힘이 있으면서도 거칠지 않은 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굉장히 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힘이 있으면서도 이렇게 거칠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는데요. 이런 힘의 근원은 철학에서 온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런 힘의 근원은 철학


그림을 보시면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데, 생각이 많이 다릅니다. 거기서 나탈 리가 조용히 본인이 생각하는 철학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기획은 수수한 기획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다르게 생각해보면 나탈리가 생각하는 철학이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 생각하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생각하기라 한다면 여기서 그것을 돕는다고 했는데 말자체로는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혼자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을 돕는다고 하는 것은 말이 이상하지 않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혼자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와의 대화가 필요하고 파비앙과 나탈리가 견해가 다르지만 대화도 하고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옛날에 생각했던 사람과 대화도 해보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터득해 나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좀 더 생각해 보면 개인과 전체, 사회 이 세 가지의 단계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라는 것은 전체주의에 반대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전체에 반대한다는 것이죠. 전체가 여론이 어떻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휩쓸리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서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이때는 전체와 사회가 다른 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분을 해야 합니다. 전체에 반대한다고 해서 사회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 구분이 개인을 내세우면 흔히 당신은 사회성에 반대하는 것 아닌가하는 구분을 해 보자는 것이고, 참된 개인이라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가 참된 개인인데, 그런 존재가 전체주의에 반대하지만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모였을 때 건전한 좋은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것이고, 그때 개인은 사회와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사상가, 역사가들 쭉 많이 있었는데, 가장먼저 분명하고 적극적으로 이야기 한 사람이 ‘루소’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루소’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개인, 전체, 사회


오른쪽을 보시면 조그만 사진에 들어 있는 사람이 ‘루소’입니다. ‘장 자크 루소’는 1712년에 태어나서 1778년에 돌아가셨는데 우리로 치면, 조선 영조일 때 살았던 분이십니다. ‘루소’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지배할 천부적 권력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는 어떤 사람을 지배할 권력을 가지지만, 천부적으로 그런 권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죠. 그 누구도 누군가를 지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혁명적인 이야기를 ‘루소’는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내가 바르게 혹은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막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입니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가로막을 권리는 없다는 겁니다. 나한테도 하지 말고, 나도 할 수 없고, 하지 않겠다. 이런 관계가 모일 때 개인이 건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루소’라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 영화와 더불어서 할까 합니다.


감독의 말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얼마 전에 감독이 매체와 인터뷰했을 때의 사진인데요. 저 사람의 이름이 미아 한센-뢰브입니다. 덴마크 출신으로, 할아버지가 덴마크 출신이고,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셨고, 본인은 프랑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뢰브라는 말은 사자라는 말입니다. ‘뢰브’라는 말 자체에서 힘이 느껴지죠.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하고자하는 이야기는 힘있는 여인의 초상을 그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나탈 리가 힘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그리고 싶었다는 겁니다. 이 모델은 누구인가 하면 감독의 어머니입니다.그리고 ‘데마고기’ 민중선동을 말하는 것인데, 데마고기의 거부와 진실의 존중을 가정에서 배우며 자랐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도 영화인으로서 핵심 관심사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감독의 아버지, 어머니, 책


어떤 집안이기에 이런 교육이 이루어 졌는가를 살펴보면, 자료의 왼쪽이 어머니, 오른쪽이 아버지입니다. 부모님이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꽤 유명한 분입니다. 프랑스 전통에서는 고등학교 교사 중에서 학문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유명하신 분이 꽤 많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 같은 경우도 고등학교 철학교사였고요. 어머니는 영화 속에서도 교재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실재로 교재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칸트를 굉장히 중요시하는 분이었고, 빈 출신이어서 모국어로 독일어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책이 굉장히 많은 집안이었는데, 그 중의 절반은 독일어로 된 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루소주의자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루소를 좋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데카르트, 플라톤, 소크라테스 주의라서 칸트를 존중하고 쇼펜하우어 니체를 존경하는 아버지와는 성격이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리아 감독이 지난 주 영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분명히 밝혔는데. 본인이 35세이지만 20대 초반에 두 분이 헤어졌는데, 당시 어머니가 너무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멋있어서 어머니에게 바치는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밝혔습니다.


2012 프랑스 대선


루소이야기가 왜 나오는지에 대한 배경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이 영화는 2011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2012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문화계, 예술계, 철학계에서 이번 대선은 루소와 홉스의 대결이라는 이야기가 퍼져있었습니다. 왼쪽 그림을 오른쪽과 같이 패러디해서 그렸는데, 홉스가 말하자면 사르코지 대통령과 비슷하다는 이야기였는데, 실제로 홉스는 옛날 사람이지만 그 당시에 항상 시계를 가지고 다니고, 조깅을 했던 분입니다. 사르코지도 조깅을 좋아합니다. 루소는 산을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하고 산책을 좋아했는데,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라는 책도 유명하죠. 올랑드도 산을 좋아하고 산책을 좋아합니다.


장-자크 루소


루소가 한 이야기 중에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이 유명합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인가하면, 우리가 옷을 발가벗고 동굴 속의 곰과 뒹굴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연적 감성을 회복하라는 메시지라는 겁니다. 자연감성을 회복하라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에 대한 감성을 회복하는 것. 두 번째는 인간 마음속에 있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성을 회복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오른쪽 사진을 보시면 루소가 ‘샹베리’라는 곳에서 1736년부터 1742년까지 머물렀습니다. 24세에서 30세까지 머물렀던 것이죠. 알프스 산자락에서 꽃다운 시절을 보낸 것입니다. 지금도 루소 기념관과 동상이 있는데, 명소가 되어 지금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루소의 사상을 음미하고는 합니다.


자애심은 어떻게 사회를 만드나


두 번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 감성을 회복하자는 이야기는 이 단어가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바로 ‘자애심’을 회복하자는 겁니다. 자애심은 우리말로 하면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자애심이라는 것은 루소의 이야기에서는 이기심과 다른 것이고 반대되는 것입니다. 루소가 말하는 자애심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모든 동물과 생물이 다 가지고 있는 겁니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이것은 자연 상태에서 있었던 것이고. 그런데 이기심이라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지면서 왜곡되어 비뚤어진 형태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애심이라는 것은 굉장히 자존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루소 표현으로는 고독하고 자유로운 감정이고, 이기심이라는 것은 남의 눈을 의식하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남하고 비교해서 내가 더 이뻐야 하고, 돈이 많아야 하는데, 대접을 받아야하는데 이런 자기사랑이 이기심이다. 둘 다 자기 사랑은 맞지만 남의 눈을 의식하느냐 의식하지 않느냐의 차이가 크고, 이기심 같은 경우는 사회악의 근원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요즘 나오는 인류학적 이야기를 해 보면 루소가 말한 자연 상태라는 것은 아무래도 농업혁명 이전인 것 같습니다. 농업혁명이라는 것이 1만 년 전에 일어난 것인데, 현생인류가 태어난 것이 20만 년 전이잖아요. 20만 년 전에 태어나 1만 년 전까지 19만년동안 인류가 어떻게 생활을 했는가하면 세 가지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수렵, 어록, 채집.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고 채집을 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 시대를 생각하면 루소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때는 그렇게 많은 무리가 필요 없었고, 많은 무리가 있으면 안 되는 시대였습니다. 열매를 따먹고 살아야하는데 사람이 많으면 자연이 금방 고갈되잖아요. 남의 눈치를 많이 안 봐도 됩니다. 요즘 연구 결과를 보면 채집시대 사람들은 노동시간이 3시간 미만이었다고 합니다. 사냥 같은 경우도 사흘에 한번 이상 할 필요가 없었다고 하고요, 보관을 할 수 없으니까요. 1만 년 전에 농업혁명이 일어나니 이대부터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사회가 만들어지고 남의 눈치를 많이 봐야 합니다. 협업과 분업이 일어나고요. 그래서 농업혁명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문화가 남의 눈을 의식 많이 하는 문화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보면 농경문화의 부정적인 측면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결론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이기심 상태에서 벗어나서 자애심을 회복하자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문제가 이기심 상태라는 것은 사회 만연에 있는 것입니다. 이기심은 사회 상태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자애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사회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인데 그럴 때 이 자애심으로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것이 루소가 당면했던 문제이고, 모든 사람들이 루소의 대답을 기대했던 것이죠. 루소는 자애심을 회복해야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자애심을 확장하면 그것이 가능할 것 같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는가하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확장한다면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해서, 제일 중요한 것이 공감능력입니다. 공감능력을 확장한다면 가능한데, 이 공감능력이라는 것이 다행스럽게도 자애심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이기심에는 이것이 절대로 없다는 겁니다. 우리말로는 역지사지라고 이야기 하는데, 영화의 첫 장면을 놓치신 분들은 못 보셨을 수도 있을 텐데요. 오늘 영화에서 배에서 주인공이 리포트 채점을 합니다. 그 리포트 제목이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볼 수 있는가?“ 였습니다. 이게 바로 루소가 던진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게 가능하다면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거죠. 여기에 대해서 루소는 가능하다고 이야기를 했고, 그렇다면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는데, 성공사례가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냐하는 찰나 제시한 것이 사랑할 때는 그런 것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연애감정 때는 상대방을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의 감정일 경우는 극단적인 상황이기는 하지만 한 가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Julie ou la nouvelle heloise


그래서 나오는 소설책이 <누벨 엘 로이즈> 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줄리 혹은 누벨 엘로이즈다’ 라고해서 1761년에 발간이 되는데 이 책은 말하자면 편지를 묶어서 만든 소설이라고 말하지만 엄격한 소설은 아닌 편지를 주고받은 것을 묶어서 소설형태로 만든 이야기책입니다. 누벨이라는 말은 새롭다는 뜻이고, 엘로이즈는 그럼 뭔가? 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는데요. 저 책이 600년 전쯤에 중세 11세기일 때 중세 최고의 스캔들이자 로맨스 사건이 바로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벨라르는 굉장히 명망 높은 신학자이자 철학자였고, 엘로이즈는 수녀였습니다. 두 분의 사랑이 중세 최고의 스캔들이자 로맨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아벨라르가 엘로이즈를 만났을 때가 40세였습니다. 그때 학문적으로 유럽 최고의 학문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노트르담 성당의 운영위원회가 있는데, 그 중의 한 분이 자기의 딸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굉장히 덕망 높은 분이니 사람들은 안심을 했습니다. 당시 엘로이즈는 17세였습니다. 그랬는데 만나자 마자 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엘로이즈가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게 되니, 아벨라르가 임시로 수녀원에 엘로이즈를 피신시키게 됩니다. 그러자 엘로이즈의 삼촌이 아벨라르가 엘로이즈를 버리는 것으로 오해를 하게 되고, 아벨라르가 잠자고 있는 숲속에 해결사들을 보내서 아벨라르를 거세시켜버립니다. 그런 사건이 있은 후에도 아벨라르는 죽을 때까지 엘로이즈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순수한 플라토닉 러브를 계속해 나가는 겁니다.

 

여기서 왜 줄리를 제목으로 뽑았고 왜 하필이면 엘로이즈를 꼽았는가 하면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엘로이즈가 더 멋있었거든요. 엘로이즈는 만년에 참회를 합니다. 한때 육체의 욕망에 휩싸여서 임신까지 시켰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참회를 합니다. 그런데 엘로이즈는 죽을 때까지 참회를 안 합니다. 내 사랑은 무죄라고 이야기합니다. 본인은 순수하게 사랑을 했기 때문에 나를 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나중에 수녀원장까지 하셨는데 공식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심지어 나는 신을 사랑해서 수녀가 된 것이 아니라 아벨라르를 사랑하기 때문에 수녀가 되었다고까지 폭탄선언을 합니다. 그런 일들이 있어서 루소가 여자이름을 빼놓은 것 같습니다. 새로운 편지 묶음집을 <줄리 혹은 누벨 엘로이즈>라고 하는데 원래 제목은 <알프스 산자락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영화에서 파비앙이 살던 곳이 알프스 산자락이죠. 그리고 두 연인의 편지. 그림을 보시면 삽화인데요, 굉장히 자연이 많이 묘사되어있고, 물이 있습니다. 줄리는 어떻게 내용이 바뀌는가 하면, 이번에는 남자가 가정교사로 이 집에 들어가게 되는데 신분차이가 납니다. 남자는 평민이고 여자는 굉장히 잘사는 귀족입니다. 원작에서는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수도사와 수녀가 사랑할 수 없어 맺어지기 어려웠다면 이번에는 신분 문제로 바뀌었는데 이때 줄리의 남편이 대단히 철학적인 분입니다. 줄리의 아버지가 억지로 시집을 보낸 것이었고, 아무리 봐도 줄리가 본인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줄리를 탓하지 않고 가정교사를 집에 모시고 같이 삽니다. 셋이서 같이 살면서 둘은 계속 플라토닉 러브를 하는 그런 구조입니다. 남편과 줄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소설 마지막 대목에서 물에 빠집니다. 줄리가 거기에 뛰어들고 아기를 구하다가 며칠 뒤 저체온증으로 죽게 됩니다. 물이라는 것을 루소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루소가 연애 이야기에서 왜 물을 강조하고 사랑이야기에 물이 더 적합하다고 했는가 하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불을 쓰면 안되는가 입니다. 불이라는 것은 확 타오르고 재가 되어 회복이 안 되는 것에 비해, 물은 끊임없이, 그리고 고여 있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람이 삼키기도 하고, 굉장히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어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물이 더 적합하다고 루소는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영화에서도 물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테마로 차지하고 있고, 슈베르트 음악도 물의 노래죠. 영화 시작이 물가의 무덤에서 시작합니다. 샤또브리앙의 무덤입니다. 저 무덤은 밀물이 되면 섬으로 가는 길이 없어집니다. 루소의 소설책의 끝이 물의 무덤에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물의 무덤에서 시작합니다. 영화 끝부분은 아기를 안고 끝나는데 그때 불러주는 노래가 프랑스 민요 ‘맑은 샘물가에서’ 라는 노래입니다. 영화의 시작은 무덤에서 시작했다가 끝은 물의 탄생의 노래로 끝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원래 루소의 이야기 보다는 희망적인 물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누벨 엘로이즈와 비슷한 남녀인데, 오른쪽 그림에서 고양이가 있었죠. 고양이 의 이름이 무엇이었나요? 판도라 였습니다. 알프스 쪽으로 갔을 때 파비앙이 마중 나온 것이죠. 저게 뭐였습니까. 판도라의 상자죠. 저는 감독이 분명하게 메시지를 이야기 했다고 생각합니다. 판도라가 굉장히 호기심이 많은 여자인데 놀래서 닫았죠. 마지막에 남은 것이 희망이 남았죠. 마지막에 파비앙이 판도라를 데리고 갑니다. 이는 희망을 상당히 암시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기존 개념 : 행복은 욕망의 만족


행복하기 전까지는 행복하다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는 기존 관념과 루소의 이야기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때까지 보통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하면, 행복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 욕망이 만족될 때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조지 버나드 쇼’라는 사람의 생각을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오른쪽을 보시면 <맨 앤 슈퍼맨>이라는 희곡을 썼습니다. 연극인데요, 돈 주앙을 주연으로 한 연극입니다. 저 연극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삶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첫 번째 비극이 무엇인가 하면, 인간의 첫 번째 비극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두 번째 비극은 그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때 욕망한 것을 얻으면 행복해져야 하는데 그것도 비극이라고 말하는 점에서 버나드 쇼는 루소와 굉장히 비슷한 겁니다. 행복하기 전까지만 행복하다고 말한 루소와 비슷한 생각인데,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이라고 말한 점은 루소와 다릅니다.


기존 개념 : 행복은 욕망의 만족


두 번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라는 분은 욕망과 만족에서 각각 하나씩 이야기 합니다. 이 사람이 생각하는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여건과 기대치의 관계이다. 무슨 이야기 인가하면 객관적인 조건에 맞게 욕망을 기대한다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굉장히 단순한 공식입니다. 무슨 이야기 인가하면 욕망에 기대한다면 답은 뻔합니다. 욕망을 줄이면 행복해 진다는 겁니다. 객관적 조건에 맞게 욕망을 낮추면 행복해 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만족에 대해서 인류는 끝없이 기쁨을 추구하지만 만족을 모른다. 그래서 인류가 계속 불행한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루소의 생각과는 굉장히 다르다는 겁니다. 만약에 행복이 욕망 만족 관계로 결정된다면 이야기는 굉장히 간단할 수 있죠. 욕망을 줄이거나 만족을 높이거나. 욕망을 줄이는 것에 대표는 쇼펜 하우어 였고, 영화에서 보면 아버지가 쇼펜 하우어의 책을 계속 찾습니다. 루소는 굉장히 다른 겁니다. 루소에게서는 저런 것이 아니라 행복은 욕망 자체를 향유하는 것이다. 욕망의 달성 만족과 관계없이 자체를 향유하고 음미하고, 평가하는 것. 이것 자체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로 행복해 하는 것이 루소가 생각하는 행복이고,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개인들이 어떻게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인데, 행복의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고 루소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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