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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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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샤 기트리 특별전 <세 개가 한쌍입니다>2019-03-06
Review 3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retrospective sacha guitry 사샤 기트리 특별전 2019.3.1(금) - 3.17.(일)

 

시작이라는 마지막

<세 개가 한쌍입니다> 

 

 

 

 

 

이상경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세 개가 한 쌍입니다>(1957)는 사샤 기트리의 마지막 영화이다. 마지막 작품은 한 작가의 일생이 집약된 걸작이 될 수도 있으며, 전성기를 지난 퇴락의 흔적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갑자기 만나게 되는 막다른 골목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기트리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 영화를 평가하는 데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영화의 제목을 빌면 둘이 한 쌍인 사정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 완성 얼마 후 타계하게 된 기트리의 건강 상태는 그가 온전히 이 영화를 감독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기트리는 이 유작의 상당 부분(어쩌면 대부분)을 제작자인 클레망 뒤우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트리는 이 영화에 자신의 존재증명을 기입한다. 기트리의 이전 작품에서도 자주 활용되던 방법이다. 그는 영화의 시작과 끝에 출연하여 영화의 지적소유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선포한다. 영화의 첫 신에서 감독은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형식으로 관객에게 말을 걸고 자신의 작품을 해설한다. 그는 영화와 소설(혹은 연극)의 유비적 관계를 언급하고 그의 이 작업을 시작이라고 한다. 짧지만 그의 해설은 웅변이자 명상으로 다가온다. 마지막 영화, 마지막 출연, 마침표가 주는 떨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감상적 조사에 걸맞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기트리의 음성과 그의 모습만이 활동하는 첫 번째 신이 끝나자마자 연속적인 신들은 장르를 인증하는 음악과 배경음으로 영화적 시공간을 채운다. 기트리의 장기인 두 분야, 역사극과 코미디 중 이 영화는 후자에 속하기 때문에 가볍고 경쾌한 음악은 코미디의 정조를 구축하고 무드의 톤이 처지거나 지루해지지 않도록 든든한 비계처럼 영화를 떠받치며 활력을 부여한다. 무성영화 시대의 코미디에서 볼(들을) 수 있는 기시()감은 기트리가 무성영화에 염증을 내고 한때 영화계를 떠났다가 유성영화의 발흥과 함께 되돌아온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라 할 만하다.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그의 특성은 토키와 유성영화와의 사이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유능한 소설가, 극작가, 연극연출가, 연극배우였던 그가 영화의 세계로 뛰어들었을 때 순수영화를 주창하던 당대의 평론가들로부터 그의 작품은 영화화된 연극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던 터였다. 앞서 언급하였듯 그는 마지막 영화에서도 예술 장르의 명확한 경계 대신 예술의 상호 참조라는 그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에서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있는 감독 역할의 기트리가 완성되지 않은 시나리오를 일컬어 시작이라고 하였겠지만, 배우나 대사, 드라마적 요소가 더 강화된 현대 영화나 TV의 경향을 고려하면 그 자신이 어떤 흐름에서 시작한 사람이라는 자기선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트리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문학적, 연극적 요소를 찾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날의 눈으로 이 영화는 연극적 요소가 강한 영화라고 보기 어렵다. <대학살의 신>(2011)이나 왕년의 속사포 같은 대사로 무장한 스크루볼 코미디에 비해 대사는 온건하다. 실내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실내극이라 이름 붙일 정도로 과하지 않으며 미장센 역시 극단적 단순함이나 화려함과 거리가 있다. 추격신은 없지만 로케이션 촬영한 거리가 나오고 주요 사건은 거리에서 벌어진다. 카메라는 실내에서도 종종 인물을 따라다니고 방 가운데에서 다양한 방향의 인물과 공간을 잡아낸다. ‘쇼트-리버스 쇼트는 기본적 촬영 기법으로 애용되고 있는데 프레임의 크기와 촬영 각도의 변화가 있어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다양한 장면 전환 기법은 전성기가 아닌 시기라 오히려 과해 보이나 코미디라는 장르를 고려해야 한다. 이 영화에만 국한시켜 말한다면 기트리는 시작과 끝에만 등장하며, 이전 그의 영화들처럼 사건이나 회상에 끼어들어 영화의 흐름에 개입하지 않는다. 영화의 투명성을 저해하는 연극적 기법의 사용도 자제된다. 기트리가 대외적 언사와 달리 비판자들의 의견을 수용한 것일까 아니면 미학적 동인에 의해 스스로 변해갔던 것일까. 결국 협업자(대리자)의 역할이 컸던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현재와 당대의 비평적 시각에서의 편차가 결정적인 것일까. 이 영화에서 보이는, 예상과 다른 낯선 익숙함을 설명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일견 연극의 편에 선 것처럼 보이는 서사야말로 이 작품을 담기에 더 우월한 용기가 영화라고 주장한다. 어떤 얼치기 건달이 갱단에 가입하기 위해 자신의 실력을 보인다며 살인을 한다. 하필 피해자는 영화 촬영 중인 배우이다. 경찰서장이 영화 현장에서 촬영된 필름을 보고 건달과 똑 닮은 쌍둥이 광대들을 용의자로 체포한다. 건달과 하룻밤을 보낸 똑똑한 매춘부는 얼굴만 보고도 그들이 범인이 아님을 알아낸다. 창녀에 의해 자신이 쫓기고 있음을 알게 된 건달, 그리고 이를 인지한 범죄조직의 운명은 우리들의 상상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 제목이 암시하는 셋은 당연히 두 쌍둥이와 범인을 의미하는데, 쌍둥이 둘 중 한 명이 회칠을 한 채 공연할 때를 제외하고 셋은 물론이고 맨 얼굴의 두 쌍둥이조차 같은 프레임에 들어서지 않는다. 연극과 달리 칼날처럼 날카로운 프레임은 같은 공간에서도 각자가 위치하는 공간을 억겁의 두께로 분리해낸다. 그리하여 한 명의 배우가, 한 명이지만 세 쌍인 용의자를 안전하게 연기해낸다. 서장실에서 매춘부의 눈이 된 카메라는 영리하게 방의 이쪽, 저쪽에 있는(것처럼 보이는) 배우를 잘라내서 스크린에 옮겨 붙인다.

영화 제목은 세 명의 닮은 용의자에 대한 영화라는 면에서 이해하지만 어딘지 괴상하고 촌스러워 보인다. 이유가 있다. 기트리는 첫 신에서 이어지는 세 신의 세 사나이를 소개하며 자신의 분량을 끝낸다. 세 사나이는 각각 건달, 경찰서장, 살해되는 배우이다. 서장은 세 명의 목격자를 소환하는데 그들은 영화감독, 영화 제작자, 촬영기사들이다. 그리고 서장은 형사 세 명을 시켜 사건을 조사시키는데 그들은 각각 쌍둥이 광대 한 명과 매춘부를 피의자 및 참고인으로 데려온다. 따라서 괴이한 제목은 기트리가 구축한 세계의 프랙탈 혹은 변주의 명칭이다. 기트리는 1930년대 영화들에서 속을 뒤집고 상황을 역전시키는 영리한 언설의 대가였지만, 툭툭 던지는 소박한 그의 코미디에 현대적이고 지적인 이야기 구조의 설계가 결합되던 (1950년대라는) ‘시작의 시기에 그가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닐까. 그의 마지막 영화에서 기트리의 부재설 대신 승천설을 더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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