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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앙드레 바쟁이 사랑한 영화들 <새벽>2018-12-14

 

죽음에 다가가는 삶-

마르셀 카르네의 <새벽>

 

이동윤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잘 알려진 대로 마르셀 카르네는 줄리앙 뒤비비에, 장 비고 등과 더불어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 계보 안에 속해 있는 감독이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기 전에 의문이 들었던 것은 시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불균질함에 대한 질문이다. 이를 테면 이런 것들이 맴돌았다. ‘리얼한 것이 시적일 수 있는가?’ 혹은 시적 표현들이 리얼리즘을 압도하고 있는 것인가.’ 와 같은 질문들.

 

    이번 특별전의 주최자 격인 앙드래 바쟁은 리얼리즘에 대해 존재의 영구적 보존과 그 영속성을 통한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잠재적 욕망미라 콤플렉스(le complexe de la momie)’에 의해 탄생했다고 밝혔다(영화란 무엇인가,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 그가 개념화한 용어들을 한 줄로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최소한 바쟁은 리얼리즘이 기존의 영화적으로 보이는 장치들이 현실을 거세시킨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한 장치들은 영화에 그럴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현실의 모순과 대립을 은폐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리얼리즘의 정의에서 마르셀 카르네의 영화들을 살펴보면, 바쟁이 말한 리얼리즘의 그 언저리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종종 이 같은 정의에서 멀어져 나가곤 한다. 특히나 그가 만든 <새벽>(1939)은 단순히 시적 리얼리즘의 자장 아래에 머문다고 말하기엔 머뭇거려져지는 지점들이 존재한다.

 

    <새벽>에서 가장 기이하게 여겨진 것은 제목인 새벽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에는 교차되는 두 개의 시간이 있다. 하나는 프랑수아가 살인을 하고 자신의 휴식처인 건물의 맨 꼭대기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시간. 그리고 프랑수아가 살인을 저지른 그 방에 홀로 앉아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이다. 연대기적으로 봤을 때, 영화의 시간은 반나절 정도로 추측된다. 그가 살인을 저지른 초반부는 이른 저녁과 한 밤중으로 묘사되고, 엔딩에서 경찰들이 들이닥치는 시간은 그 다음 날 이른 아침이다. 그 사이에 프랑수아가 떠올린 회상이 위치한다. 즉 이 영화는 한 남자가 새벽에 회상하는 이야기다. 프랑수아가 우발적이지만 중대한 행위를 진행 한 후,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것은 어쩌면 달이 지고, 해가 떠오르는 아침이 다가오는 것 과 같이 매우 숙명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카르네의 다른 영화에서 종종 묘사되었지만, 등장인물들의 기구한 삶은 더 이상 벗어나기조차 힘든, 음울한 공동체적 운명이다. 다시 말해, 카르네의 영화들은 여기서 다른 데로의 도약은 불가능하고, 단순히 여기서 끝나거나 혹은 그 종결을 받아들이는 순간들을 묘사해낸다.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카르네 영화에 등장하는 자유라는 단어, 혹은 자유를 갈망하는 인물들의 발걸음이다. 정처 없이 떠도는 가난한 이들에게 구체적인 삶의 행적과 여로는 찾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각자의 선택을 통해 스스로 자유를 구하려 한다. 다만 상기해 볼 점은 각각의 영화에서 자유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잠시 우회하여, 예컨대 <안개 낀 부두>(1938)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자. 지금 배는 베네수엘라로 출항 직전이고 주인공은 탈영병에서 화가로 자신의 신분을 세탁한다. (사실 그것 역시 보잘 것 없다. 옷만 군복에서 양복으로 갈아입고, 심지어 여권 사진은 출항 직전인데도 찍어 놓지도 않았다.) 이 주인공은 말 그대로 운명에 자신의 몸을 던진 상태다. 주인공의 말을 빌리자면 . 저는 자유거든요.” 이다. 그는 어떻게든 지금껏 겪었던 자신의 삶의 흔적을 지우고 재탄생하고 싶다. 과거에 대한 이 같은 태도는 <북호텔>(1938)에서도 등장한다. 주인공 연인은 북호텔에서 자살을 결심하고 총을 쥔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쏘고 도망치고 경찰에 붙잡힌다. 여자는 총알이 빗나가 살아나게 되고 이내 교도소에서 남자를 만나지만 그는 여자에게 매몰차다. 겁에 질려 도망쳐 나온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죽은 줄 알았던 그녀가 살아있다는 이상한 환상감이 남자를 옥죈다. 이와 같이 카르네의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설정들은 각자가 원했던 이상적인 목표들이 있던 반면에 예상치 못한, 돌출된 순간들이 발생하며 이들을 내면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이내 그 불안은 부두 가에 굽이치는 작은 너울들, 자욱하게 낀 안개와 뒷골목, 소란스런 카페의 풍광들과 같이 소시민들이 자리한 곳으로 카메라의 지위를 위치시킨다.

 

    다시 <새벽>으로 돌아가 보자. 이 영화에서도 다른 카르네의 영화와 유사하게, 과거로의 작별과 엄중한 현실이라는 숙명적인 정서를 공유하지만, 이는 대화를 통해 발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보다 시적인정서를 배가시킨다. 예컨대 프랑수아즈가 프랑수아에게 주었던 (이 연인은 이름이 같다) 일종의 표식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린다던지, 방 밖에서 총을 쏘는 경찰 무리를 방 안에서 장롱으로 막는 장면에서 장롱 안에 걸려 있던 프랑수아즈의 사진이 일순간 튀어나올 때, 프랑수아가 장롱의 문을 닫는 행위는 그 역시 현재 자신이 내딛고 있는 세계에 대한 자괴감, 음울함과 피로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결별하려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새벽>은 새벽 후, 이른 아침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다. 이는 새벽 시간의 잠깐의 소중하고 중요한 기억들이 이른 아침 다가오는 경찰 무리 때를 마주할 준비를 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이 구도는 다소 엄중하고도 냉혹해 보이기까지 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두 번의 회상은 경찰들의 총소리에 매개된다. 첫 번째 총소리는 외부에서 프랑수아의 방 창문에 상흔을 낸다. 두 번째 총소리는 프랑수아의 방과 장롱에 자국을 낸다. 이 때 카메라가 창문과 방 문, 장롱에 새겨진 총 자국을 상당히 오랜 시간 공들여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상흔은 외부로부터 새겨진 충격과 상태에 좌절하는 프랑수아의 현재의 상태를 대유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또한 이 두 번의 회상이 등장한 직후, <새벽>에서 대단히 돌출된 장면이 등장한다. 새벽녘은 지났고, 소동이 벌어진 프랑수아의 집 주위에 동네 주민들이 불구경 난 듯 지켜본다. 프랑수아를 알고 있던 이들은 그가 행했던 긍정적 삶의 태도를 반추하며, 그를 자수하라고 설득한다. 그러자 그는 독백하듯 주민들에게 소리친다. “뭘 보는 거지? 뭘 기다리는 거야? 살인마를 보니깐 재밌나? 하지만 나 말고 살인자는 많아. 사람은 누구나 작은 살인을 하지.”

 

    이 장면에서 주민들과 프랑수아는 크게 지리학적 위치에 의해 대비된다. 프랑수아는 건물 꼭대기라는 위에, 주민들은 건물보다 아래인 거리 맨 바닥에 있다. 프랑수아의 시선이 부감의 롱 쇼트를 형성하는 것과 대비되게, 주민의 특정시선은 프랑수아를 단독으로, 미디엄 쇼트로 포착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이다. 허나 이 규칙성이 깨지는 순간이 이내 발생한다. 위를 향해, 더 정확히는 프랑수아를 바라보던 주민들의 얼굴이 일순간 클로즈업으로 (더 정확히는 6명의 주민들) 잡히는 순간이다. 프랑수아의 눈은 매의 눈이 아니기 때문에, 그간의 시점쇼트의 맥락에서 이는 불가능한 쇼트이다. 허나 이 같은 규칙이 깨짐으로서, 프랑수아가 지녔던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절규는 주민의 얼굴들을 매개하여, 관객 자신에게 동일시되는 효과로서 기능하게끔 한다. 서두에 밝힌 것처럼 카르네의 시적 리얼리즘이 단순히 바쟁의 리얼리즘 개념 아래 머문다고 말하기에 머뭇거려지는 점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소격효과를 전면화하면서도, 잘게 쪼개어 카메라의 객관화를 뛰어넘는 쇼트를 구사하는 카르네의 연출은 아마도 소시민들의 삶이 더 이상 벗어날 길 없는 비극적 운명과, 거기에 상응하는 주인공의 숙명적 태도에 관객도 함께 동참하고, 감응하길 바라는 그의 전언처럼 들려오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감정적으로 굉장히 넓고도 음울하며, 옅게 스며든다. 그가 행했던 거의 유일한 자유행위로서의 자살은 공권력이라는 거대한 타인에게 저항하는 심리에서 발현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비극적인 숙명과 마주하였지만 끝내 삶에 대한 무력의 감각을 주인공 스스로 체화하고, 저항선 아래로 떨어지는, 일종의 자포자기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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