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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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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불도저에 탄 소녀> 하드보일드 불도저2022-04-13
불도저에 탄 소녀 스틸

 

 

 

<불도저에 탄 소녀>

하드보일드 불도저

 

김나영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영화 <불도저에 탄 소녀>는 주인공 혜영(김혜윤)의 아버지 본진(박혁권)이 사라지고 난 후부터 마치 탐정 영화의 문법을 따라가는 것처럼 진행된다. 혜영은 아버지의 사고와 그것의 배후를 둘러싼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탐정처럼 동분서주하고, 사건은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처음 생각과는 달리 거대한 적과의 싸움이 되어 간다.

 

 

불도저에 탄 소녀 스틸

 

 

  흥미로운 점은 탐정 플롯 안에서 혜영의 캐릭터가 고전적 탐정보다는 비교적 하드보일드 탐정에 가깝다는 점이다. 불도저와 소녀 사이의 거리만큼 하드보일드 탐정과 여성 청소년 사이의 거리는 멀어 보인다. 고전적 탐정의 정형이 명석한 두뇌를 활용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것과 달리, 하드보일드 탐정은 직관과 본능에 따라 움직이며 폭력에 의존해 생존한다. 결말 역시 사뭇 다르다. 고전적 탐정 소설이 개인의 도덕적 탈선으로 인한 범죄를 해결하며 일시적 혼란이 봉합되면서 끝나는 것과 비교해, 하드보일드 탐정 서사는 사회적 맥락에 놓인 탐욕과 부패를 폭로하지만 그 해결은 미봉책이며 불완전할 뿐이다.1)

 

불도저에 탄 소녀 스틸

 

 

  직관과 본능, 폭력, 탐욕으로 부패한 권력과 같은 키워드들이 <불도저에 탄 소녀>에 부합하지만 하드보일드 탐정이 대개 세상의 불합리를 겪을 대로 겪은 냉소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혜영이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이라는 지점에서 혜영을 일종의 변형된 하드보일드 탐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혜영은 시종일관 거칠고 반항적인 성격의 소유자지만 성인 남성과 비교해 이중의 사회적 약자다. 이제 곧 스무 살을 앞둔 혜영은 청소년으로서 보호받는 위치에 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성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충분히 지킬 힘을 지니고 있지도 못하다. 혜영의 문신은 하드보일드 탐정들의 무기인 총에 비하면 누구도 위협하지 못하는 장난감 권총처럼 보일 뿐이다.

  영화는 하드보일드 세계관 속에 도저히 혼자서는 사건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인물을 주인공 탐정으로 내세운 셈이다. 혜영은 과연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예상할 수 있는 전개는 이런 것이다. 혜영이 결국 좌절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드보일드 탐정들의 씁쓸한 뒷모습을 떠올려볼 수도 있고, 하드보일드 영화가 건조하고 냉철한 시선 아래 세상의 비정함을 담는다는 점을 상기할 수도 있다.

 

 

불도저에 탄 소녀 스틸

 

 

  <불도저에 탄 소녀>를 하드보일드의 범주에 포함하기엔 곤란하게끔 만드는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영화의 온도다. ‘불도저에 탄 소녀면서 그 자신이 불도저 같은 인물인 혜영은 분노를 참지 않으며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다. 혜영은 영화 내내 문자 그대로 몸으로 부딪치며 사건의 진실에 다가간다. 영화 역시 혜영의 이러한 성격을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면서 보여준다. 혜영의 성격과 육탄전은 진실 탐색의 과정에서 혜영이 겪는 갖가지 좌절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마지막까지 유지된다. <불도저에 탄 소녀>가 지닌 매력의 상당 부분은 소위 이 뚝심에 있고 영화의 온도는 그만큼 뜨겁다.

  그 결과 영화의 결말이 추상적 사법 권력에 의한 정의 구현이 아니라 판타지에 가까운 물리적 타격이라는 즉물적이고 시각적인 구현으로 향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사건 해결은 어려울지언정 혜영이 할 수 있는 수준에서 가능한 가장 폭력적인 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의 진정한결말은 다소 당혹스럽기도 한데, 이는 혜영에게 주어진 보상이 얼마간 부수적이며 사적인 차원의 보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때문에라도 <불도저에 탄 소녀>를 여전히 하드보일드 영화라고 말하고 싶기도 한데, 한편으로 결말의 그 어마어마한 숫자들이 안겨주는 해피엔딩의 이면에 있는 건조하고 냉정한 세계야말로 진정으로 하드보일드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1) 토마스 샤츠, 할리우드 장르, 한창호, 허문영 옮김, 컬처룩,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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