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영화와 인문학

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 ‘바르다의 '영화쓰기'(cinecriture)를 읽는 몇 가지 관점'2018-06-14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컷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 ‘바르다의 '영화쓰기'(cinecriture)를 읽는 몇 가지 관점'

 
*일시 : 2018. 06.14(목) 19:00
*장소 : 영화의전당 소극장
*강연 :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 (철학박사)
*주제 : ‘바르다의 '영화쓰기'(cinecriture)를 읽는 몇 가지 관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스토리도 그렇고 오늘 영화 같은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원숙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코미디 같은 유머러스한 장면 구성이 많아서 가볍게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 가벼운 점도 있지만 그런데도 사실은 뭔가 곰삭은 듯한, 잘 삭혀져서 나온 것 같은 그런 영화라는 생각이듭니다. 굉장히 원숙한 면을 보여주고 여태까지 과거에 바르다가 보여주었던 영화의 여러 가지 면모들을 이 영화 속에서 상당히 많이 모아서 제시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물론 이 영화는 JR과 공동으로 감독한 것으로 되어있고, 상당한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오늘은 바르다 감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 나중에 대화를 하면서 그 부분은 보충하도록 해보겠습니다.

 

‘바르다의 영화쓰기(Cinecriture)에 관한 몇 가지 관점’이라는 주제로 오늘 이야기를 할 텐데, 영화쓰기라는 말은 바르다 감독이 직접 창안한 단어인데요. 이 단어를 설명하는 것 보다는 저 단어는 남겨두고 어떤 식으로 했는지 보고서 마지막에 대화를 통해서 정리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는가 하면, 네 가지 정도의 범주로 여러분과 같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콜라주라는 것. 우리 미술시간에 배웠듯이 전혀 시간, 공간이 다른 것 등 이질적인 것을 누더기 혹은 보자기를 만들어 낼 때처럼 이어서 하나의 무엇을 만들어 내는 콜라주 기법이 굉장히 중요한 영화쓰기 방법이라는 점에서 감독자신이 <아녜스의 해변>에서 이 장면을 살짝 보여주죠. 오늘 영화 자체도 상당히 콜라주적이었죠. 어떻게 보면 일탈이 굉장히 심한 영화입니다. 심하면서도 하나의 엄청난 그림을 만들어 내고야 말죠.

 

이 분의 생애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면, 1928년 벨기에에서 태어나셨고, 나치가 침공해오자 39년 정도에 프랑스에 급히 이민을 가게 됩니다. 바르다가 초등학교 시절을 프랑스 해변 마을에서 보냅니다. 이 분에게는 해변이라는 것이 바닷가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원천적인 기억으로 되어있고요. 그랬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파리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에꼴드 루브르(ECOLE DU LOUVRE)’라고 하죠. 루브르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있는데, 우리처럼 평생교육원 또는 아카데미가 아니라 학부, 석사, 박사 과정이 다 있는 정규과정인데요. 거기에서 졸업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사진과 예술사를 공부하셨습니다. 소르본의 수업을 들었는데 당시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라는 철학자의 수업을 듣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고백을 합니다. 생애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은 분은 <아녜스의 해변>을 보시면 상세한 것이 나오니까 직접 보시길 권합니다. 학교를 다니다가 바로 사진사로 취업해서 활동을 합니다. 어디에 취업을 하는가 하니까 국립민중극장 TNP(Theatre National Populaire)에 취업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아비뇽 축제 다들 아시죠. 아비뇽 축제라는 것이 1947년도에 만들어지는데, 1948년도부터 바르다가 공식사진사가 되는 겁니다. 아비뇽 축제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인데,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약력에서도 사진사라고 하는 경력이 그 뒤의 영화 작업에서도 굉장히 뿌리를 이룹니다. 그리고 아비뇽 축제에서 12년 정도 직업적인 사진사로 활동하면서 극촬영과 이해들이 바탕을 이루고 있어서 1954년도에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 때, 대박이 난거죠. 흥행으로 대박이 난 것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뒤집어 놨는데, 그때 본인이 고백하잖아요. 그 영화를 찍기 전에 태어나서 25살이 될 때까지 본인이 본 영화는 4편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영화를 만들어서 엄청나게 사람들을 뒤집어 놨는데, 그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사진과 예술사 그리고 아비뇽에서의 경험이다. 그것은 그 뒤로도 이분의 작품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오늘 영화에서 사진작가와 공동감독을 해서 영화를 만든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생소한 것이 아니라 바르다의 경우에는 본인이 사진작가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사실상 JR이 바르다 감독의 손발이 되어서 움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진작가로 출발해서 영화감독이 되었다가 2000년도부터는 설치미술작가로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바르다 본인이 나는 세 가지 인생을 살았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사진, 영화, 미술 이 세 가지가 다 버무려져 있다는 점을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누벨바그의 어머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벨바그의 할머니다.’ 라고 하는데 누벨바그라는 것이 시작이 몇 년, 몇 월, 며칠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보통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 아니면 장-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59)를 보통 이야기 하는데요. 그것보단 사실상 <쿠르트로의 여행>이 원조라고 이야기 하는 것인데요. 왜 굳이 어머니다, 심지어 할머니다고 이야기하는가. 바르다가 고다르보다 2살 밖에 안 많거든요. 2살 많은데 무슨 할머니까지. 그것은 그 정도로 이분이 굉장히 앞서갔다는 겁니다. 이 영화는 1955년도 개봉 인데 1954년도에 촬영을 시작해서 해성같이 나타나 제작비도 없는 상황에서 획기적으로 협동조합을 만들죠. 그 협동조합이 ‘Cine-Tamaris’입니다. 저것을 만들어서 월급 받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돈을 내어놓고, 공동으로 제작한 것이고 그것이 지금까지 그 회사가 이어져 오는 것이고요. 그래서 사실은 바르다 감독이 뒤에 계속 이야기 하겠지만 자유롭고 독창적인 창작 활동을 계속하고 계신데,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한 근거가 협동조합 형태로 해서 독립적인 자본으로 출발하셨다는 것인데요. 정말 돈이 모자라서 10년 정도 영화를 못 찍은 적도 있으시고요. 오늘 영화 같은 경우에도 돈이 모자라서 우리로 하면 ‘클라우드 펀딩’같은 것을 하셨는데요. 영화 시작할 때 감사하다며 뜨는 이름이 출연자가 아니고 돈을 내준 사람들의 명단이었고, 프랑스에서는 ‘키스키스방방’이라고 부르는 클라우드 펀딩 회사인데, 여기를 통해서 633명 정도가 돈을 내어 주셔서 영화를 찍으셨고, 언제나 돈에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곳이라 영화가 굉장히 자유롭고 독립적인 색깔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재미있는 것은 세트(Sète)가 바로 바르다의 고향이죠. 벨기에에서 이주해서 정착해서 살던 곳이 프랑스 남부의 해안도시인데요. 우리로 말하면 세트(Sète)가 기장이라면 라 푸앵트 쿠르트로 (La Pointe Courte)는 일광정도, 기장 속에 포함되는 일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향을 무대로 해서 만든 영화입니다. 세트(Sète)를 찾은 파리에서 온 남녀커플과 그 주민들의 이야기가 병치된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두 가지가 있잖아요. 평행선을 이루어서 계속 달리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획기적인데, 전혀 어색하지 않고 완전히 평행선을 이루어서 따로따로 가는데 거기에서 뭔가 만나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죠. 이때부터 시작해서 이중구조로 가는 것, 이런 점이 바르다 감독의 재미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역 주민의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형식과 파리에서 찾아온 커플의 이야기는 팩션의 형태로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이 아니라 병치해서 간다는 것이 굉장히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오른쪽 사진은 장면 중 하나인데 90도로 마주보고 있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시는 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작품 특징을 정리해 보면 50편정도 만드셨는데, 그 중에 단편이 26편 정도로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장편도 픽션, 인터뷰, 다큐의 혼성 성격을 가진다는 것.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인가 하면 바르다 감독은 작품 자체가 다큐를 많이 찍었다기보다는, 모든 작품 각각이 픽션과 다큐의 성격을 혼성적으로 가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르다의 작품을 보면 어떤 작품도 현실의 성찰이라는 것이 있고, 거기에다가 감독만의 흔적, 시그니처, 자전적 요소가 배합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만의 독특한 콜라주를 만들어 내고, 그런 미학을 영화를 통해서 선보이는 것 같다고 정리해보았습니다. 오늘 영화만 하더라도 이 두 사람이 같이 카메라를 들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찍는 것인데, 그런 와중에 영화 초기에서부터 ‘선글라스가 맘에 안 들었다. 벗어라.’ 하더니 그 선글라스에서 고다르를 연상하게 만들고, 고다르를 만나러 간다고 하더니 알고 보니 자신의 신랑 ‘자크 드미’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구조가 동시에 진행된다는 거죠. 다큐와 자전적인 요소가 동시에 진행됩니다. 선글라스가 나오고 고다르에서 사라진 자크 드미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천의무봉의 솜씨로 만들어냈죠.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고다르가 일부러 안 나올지는 몰랐는데, 그것이 안나와 주니까 사라진 자크라는 테마를 더욱 더 살려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어버렸죠. 우연이라는 것이 콜라주 작업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며, 최고의 조력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화 찍는 서사 구조를 파괴하기 위해서 고다르가 안 나온 것이 아니냐고 했는데, 고다르가 안 나와 줌으로서 완성시켜준 것이죠. 영화 곳곳에 보면 상실과 애도 그리고 늙음과 같은 주제가 많이 나와 있었는데, 그런 것들과 바르다 감독 자신의 사라진 자크에 대한 애도와 본인의 늙음에 관한 문제 이런 것이 너무나 잘 같이 갔다고 생각합니다. 쇠락한 광산촌, 퇴직한 노동자, 그리고 기계의 도입으로 바뀌어 가는 농업형태, 염소뿔 자르는 집,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 더 이상 쓰지 않는 전쟁시절의 벙커, 바르다의 친구 나탈리 샤롯트가 살던 집 이런 것들과 굉장히 잘 어울려진다.

 

1. 여정, 방랑: 길을 걷는 여자
특징적인 것을 네 가지 범주로 생각해보면, 바르다의 영화에는 길을 걷는 여자의 모습이 상당히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어떤 방랑의 은유로서 여정이라는 것이 중요한 형식 내지는 테마로 자리 잡고 있다. <5시에서 7시까지 클레오>(1961)에서 7시가 되면 암 진단 결과가 나오는데, 기다리는 2시간 동안 클레오가 파리의 시가지를 정말 정처 없이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영화잖아요. 이게 한쪽 끝이라고 한다면 다른 한쪽 끝에는 <방랑자>(1985)에서처럼 정말 방랑자처럼 길 위를 걸어 다니는 모습이 중요한 테마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 영화도 어떻게 보면 그런 연장선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 JR과 공동 작업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여자, 지배할 수 없는 여자라는 컨셉이 나오는데, 실제로 보면 바르다가 온화하고 따뜻하지만 실제로 보면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죠. 예를 들어 어릴 때 대학교 입학시험을 ‘바칼로레아(Baccalaureate)’라고 하는데, 1차 시험을 치고 2차 시험으로 철학 논술을 준비해야합니다. 엄마에게 학원비를 다 받아 놓고는 그 돈으로 가출을 해서 대학시험을 치지 않고 석 달 동안 어선을 타고, 사진을 찍고 다닙니다. 다음해에 조금 전 말씀드렸던 에꼴드 루브르에 들어가서 다니다가 그만두고 정말 말을 안 들었었고, 영화를 봐도 본인 고집대로 가는 거죠. 그러면서도 온화하신 분인데, 어쨌든 이 캐릭터가 본인의 모습이기도 하고요.

 

오세종 오샤또(Ô saisons, ô châteaux)라는 루아르 지역에 강변을 따라서 성들이 많이 있거든요. 우리로 치면 관광공사라고 할까 거기에 의뢰를 받아서 용역으로 1958년 단편을 제작합니다. 직접 걸어가는 모습을 담기도 하고, 왼쪽을 보시면 우편엽서 같은 사람이 걸어가죠. 그 뒤를 할머니가 따라가는 모습을 담으면서 젊은 여자와 늙은 여자를 혹은 젊은 여자와 죽음의 문제를 바르다 영화 속에는 계속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여자가 걸어가는 모습이 바르다에게 중요한 상징인 것 같아요. 그래서 탁월한 여성성격을 많이 창조해 내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1976)입니다. 낙태금지를 반대하는 여성운동을 주요 주제로 담았던 영화죠. 두 사람이 친구인데 고등학교부터 약 10년간 우정을 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각각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데, 성격은 굉장히 다릅니다. 오늘 영화에서도 여성의 성격들은 군데군데 독특하게 잘 그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서 여성의 성격을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창출해 내는 것이 바르다 감독이 아닐까 라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굉장히 개성 있고 독특하며 현실에 정말 있을 것 같은 성격을 잘 잡아내는 감독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2. 아름다움과 죽음...애도
두 번째로 아름다움과 죽음, 애도라는 주제가 중요한 꼭지인데요. <아녜스 V에 의한 제인>(1987)은 제인 버킨을 배우로 써서 영화를 찍었던 작품으로, 보시는 것처럼 고전 명작의 구도를 많이 활용하고 있죠. 그런 의미도 나중에 볼 텐데, 저기에서도 30대의 버킨과 40대의 버킨이 등장하며 나이 든 다는 것의 문제를 중요 주제로 담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보시면 자코는 어린애를 부를 때 호칭으로 쓰는데요, <낭트의 자코>(1991)를 보시면 남편이었던 자크 드미의 마지막 시간을 담은 영화이죠. 두 분은 1962년도 정도에 결혼을 했다가 1979년에 헤어집니다. 헤어진 이유가 자크 드미가 본인도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동성애자라는 것을 깨달아 헤어지자고 합니다. 다른 남자와 살다가 1979년도에 자크 드미의 남자 남편이 에이즈로 죽고 그러고 나서 본인도 큰 병을 얻고 바르다에게 돌아오는 겁니다. 바르다는 자크 드미를 굉장히 따뜻하게 가는 날까지 만나고, 이야기하고, 마지막 모습을 담아냅니다. 자크를 지금도 잊지 않고 애도하고 있고요. 자크 드미가 당시 60세도 채 되지 않았었는데, 에이즈에 걸리니 빨리 사람이 노쇠해진 것 같아요. 원래 굉장히 이쁘게 생겼었고, 사실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여자역할이기도 한데요.

 

아네스 v에 의한 제인, 자크 드미

 

 보시는 장면의 포즈가 <아녜스 V에 의한 제인>에서의 고전적이고 여성적인 포즈와도 비슷합니다. 여기사 나오는 것이 신체와 풍경의 연결이라는 것입니다. 신체를 풍경처럼 확장시키는 것, 혹은 풍경에서 사람의 몸을 보거나 얼굴을 보는 것. 이런 관점이 바르다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저 장면을 찍을 때는 이렇게 바르다가 나중에 회상을 하는 거죠. “자크의 피부를 풍경처럼, 머리카락을 수풀처럼 촬영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거대한 풍경처럼 촬영했다.” “사람들이 거기서 산책할 수 있는 풍경처럼 촬영했다.” 는 겁니다.

 

바르다 감독 영화에는 클로즈업이 사실 그리 많지 않은데, 대신에 초 근접촬영이 곧잘 있고 그러면서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것이 곧 잘 있는 것 같습니다. Cross up이 영어로 거리의 가까움을 나타낸다면, 불어로는 Gros plan 말 그대로 화면 전체에 가득 차게 하면서 사람, 인물의 성격보다는 촉각의 성격이 더 강해지면서 어떤 물질성이 더 전면에 떠오르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이것은 바르다 본인도 이야기 하듯이 가스통 바슐라르가 이야기 하는 물질적 상상력에 영향을 많이 받은 방법론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슐라라 판화

 

바슐라라는 오른쪽 사진을 보시면 프로콘(Albert flocon)이라는 판화가가 있었는데, 저분이 사람의 몸과 풍경의 관계에 대해서 작업을 하셨습니다. 판화집에 해설을 쓰는 책을 발간했는데, 서문에 ‘인간적 긍지의 어처구니 없는 높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저 판화집을 보면 거대한 눈과 얼굴 같은 도시, 여자의 몸과 같은 전원풍경마을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아녜스 본인은 신체와 풍경과 여정에 관해서 직접 썼습니다. 어디에 썼는가 하니까, 『도시의 주름』 (Wrinkles of the xity, 2015)이라는 책인데요. 오늘 영화를 같이 만든 JR이 사진집을 만들었는데, 그것에 서문을 써줍니다. 그 서문에서 두 부분을 뽑아서 번역해 봤습니다.

 

내 주름은 내게 속한 것. 노인의 피부는 그의 여정을 이야기해준다.
손자 하나는 내 손을 잡고 “할머니의 풍경을 보게 해주세요”라고 말한다.
응. 푸른 강물, 작은 골짜기, 대지의 얼룩...
JR은 내 초상을 찍겠지. 세트 항구의 오래된 조선소,
갈라진 벽에 덧붙을 테지 서서히 쇠락해가는 그곳에...

 

JR이 도시의 어떤 노인들과 혹은 원도심이라고 할까 재개발이 들어가는 부서진 곳과 사진을 매치하는 그런 프로젝트를 많이 했는데, 전 세계 7-8군데 도시에서 작업을 했는데 그것들을 모은 사진집에 서문을 썼는데 저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노인의 피부는 여정을 말해준다고 하면서 풍경과 여정과 그리고 사람의 신체를 연결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JR이 언젠가 아마도 내 초상을 사진을 찍겠지, 세트 항구가 고향이니까 거기에 붙여 놓겠지 라고 합니다. 오늘 영화에서는 기차에 발가락 사진을 붙여서 했죠.(웃음)

 

세트 항구에 오래된 조선소가 어떤 것인가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큰 조선소가 아니라 나무로 배를 만드는 조선소입니다. 1950년대에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르다가 처음 정착했을 때에는 성행해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나무로 배를 만들면 고기잡이 배 같은 작은 것들만 만들었고 현재는 없어졌습니다. 2005년도에 프랑스 정부에서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해서 한 군데만 모범으로 억지로 남겨 두었습니다. 조선소의 규모가 이 소극장보다도 작을 겁니다.

 
3. 자유연상

신체를 풍경으로 연결시키고, 풍경을 여정으로 연결시키는 연상이 보통 상식적으로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인데 바르다의 경우엔 자연스럽게 잘 일어나고, 이 분의 영화를 보면 자연스럽게 잘 따라가게 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자유연상이라고 부릅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많이 활용했던 방법이고, 얼마 전에 바르다가 아카데미에서 명예상을 받았잖아요. 그때 상을 받는 것에 겸해서 하버드 대학에서 ‘시’ 강연을 부탁합니다. 그때 그 강연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어서 보니까, 거기에서도 초현실주의자의 자유연상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자유 연상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을 말하는데, 그냥 넘어가버리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넘어간 것이 다른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으면 그것이 멋진 예술가고 그런 것 같아요. 자유롭게 넘어가는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면, 왼쪽에 있는 분이 ‘포니’라고 하는 분이 대단한 철학자이시던데 예술가이시기도 하고요. 자기들은 별들의 자식이라는 거잖아요. “엄마는 달, 아빠는 태양, 나는 별그늘에서 태어나고 무대는 광활해요.”라고 하는데 그냥 광활한 정도가 아니고, 우주가 내 품속에 있고, 내가 그 우주의 품속에 있다고 하잖아요. 큰 우주, 높은 곳을 이야기 하셨어요. 그러면서 눈을 들어서 높은 곳을 약간 응시를 하는데 그 시선을 바로 받아서 고양이가 이어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높은 곳에 앉아있는 고양이였단 말이죠. 정신세계가 높은 곳에 있는 포니에서 바르다는 높은 곳에 앉아있는 고양이를 떠올린 것이죠. 이렇게 자유연상으로 넘어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장면이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영화에서 자막으로 “고양이는 지혜를 줘”라고 했는데 원래 말에서 빠진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하면 “높은 곳에 앉은 고양이는 지혜를 줘”입니다. 이런 의미가 앞에 말씀 드린 것과 맞물려 간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이미지가 이미지로 연결되는 것 있잖아요. 문장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게 바로 바르다가 말하는 ‘영화쓰기(Cinecriture)’입니다. 문장 서술구조 기-승-전-결로 연결되는 것이 일반 문학적 글쓰기라면, 이미지가 이미지로 맞아 떨어져가는 것, 논리적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납득할 수 있게 연결되면서 감동을 주는 것이 바르다가 말하는 영화쓰기(Cinecriture)라는 겁니다. 이미지로 연결되는 것이고, 이미지로 생각하는 겁니다.

 

<오페라 모프 (L'opéra-mouffe)>라는 1962년 단편영화입니다. 왼쪽 모습은 아기를 가진 임산부의 모습이고 아마 바르다 본인이라고 짐작이 되는데요. 바르다가 처음으로 임신한 상황에서 찍었던 단편영화이죠. 그때 낳은 딸이 오늘 영화에 나오는 ‘로잘리’라고 고다르에게 소개시켜주는 사람이 자기 딸 로잘리라고 하잖아요. 참고로 이걸 알면 더 유익합니다. 임신한 것을 알고 바르다와 원래 사귀고 있던 애인인 ‘앙투안’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남자가 도망가 버리죠.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절망에 빠져있다가 아기를 낳고 혼자서 기르다가 자크 드미를 만났고, 그가 같이 아이를 키우자고 해서 결합을 한 겁니다. 그런 심리적 갈등과 두려움과 모든 것이 담겨있는 그런 단편영화인거죠. 다큐형식인데요. 바르다와 함께 살던 마을 부근에 재래시장 같은 곳을 돌아다는데, 순수하게 다큐영화인 것 같으면서도 자기의 두려움과 공포 같은 것이 말씀 드린 것처럼 자전적 요소가 담겨있는 다큐인 것입니다. 본인이 임신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왠 시장에서 호박이 딱 나옵니다. 그 다음 장면은 거론하기 좀 그런데요. 왜 그렇게 잔인했을까는 조금 전 도망간 애인을 생각하면 짐작이 되실 것 같아요. 오늘 미성년자가 있을 것 같아서 더 이상은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오늘 아귀같이 생긴 생선을 보다가 바르다가 눈 수술하는 장면을 보여주잖아요. 본인을 저렇게 셀프로 디스하면서 영화를 촬영하는 창작정신을 높이 삽니다.(웃음) 이것 또한 자유연상이다. 생선 눈에서 본인의 눈을 떠올린 것이죠. 그리고 이것 또한 재밌는 장면의 한 부분이었죠. 염소를 보다보니 바르다가 1954년에 노르망디 지역에서 찍었던 염소가 생각이 났는데요. 저 염소가 노르망디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염소였잖아요. 그 사진을 떠올리게 되고, 오른쪽 장면을 보시면 벙커라는 것이 해안 초소를 독일 나치 들이 콘크리트로 지어 놓은 것이잖아요. 그것을 위험하니까 떨어뜨린 것인데요. 거기서 떨어진 것을 보니 떨어진 염소와 상호 맞아 떨어 진 것이고, 이것이 ‘영화쓰기(Cinecriture)’라는 겁니다. 이것이 연상되고 맞아 떨어지면서 거기에다가 노르망디에 자신의 추억이 담겨있던 사진작가 ‘디 부르낭’의 사진을 저기에 넣었는데요. 다음 날 11시 반에 와보니 파도에 씻겨서 사라지고 없더라는 거죠. 이 흐름이 자유 연상의 흐름이죠. 저 장면 다음에 어떤 것이 나왔는지 기억하시죠. 바다를 보고 난 뒤에, ‘바다는 언제나 옳아, 파도는 언제나 옳아, 그리고 바람, 모레는 언제나 옳아.’ 그렇게 이야기 한 다음에는 까르띠에 브레송의 무덤을 찾아가잖아요. 그건 왜 그런가 하니까 까르띠에 브레송이 어릴 때 노르망디에 외갓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서 자주 놀았다는 이유로 찾아갑니다. 위치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가 하면 평양에서 부산까지 정도 될 겁니다. 완전 대각선으로 프랑스 끝에서 끝이거든요. 노르망디에서 남쪽 끝 알프스 지역으로 가서 무덤을 보는 겁니다. 영화상으로 보면 매끄럽게 연결되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거리를 가서 연결시킨 것이고, 이런 것들이 기-승-전-결에 짜 맞추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이미지의 흐름으로 연결되는 것이 ‘영화쓰기(Cinecriture)’라는 것이고 그것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자유 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두에서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면서 대화를 나누죠. “우리가 최근에 승강기를 탄 것이 언제더라?” 이 이야기를 하죠. 그러더니 “루브르 박물관에 갈 때 탔잖아!”라고 합니다. 오른쪽 ‘소매치기 조심’이라는 글자가 보이세요? 근데 그 윗부분을 뜯어 놓은 게 보이세요? 저것을 뜯은 사람이 소매치기 같죠. 저 이미지가 너무 웃겨서 담아두었는데요.(웃음) 본인이 소매치기가 아니고서야 그걸 뜯을 이유가 없겠죠. 그래서 루브르 박물관 1층을 갑니다.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화가의 작품이 이었죠. 거기에서 고다르를 생각합니다. 고다르와 같지만 다르게 변형시켜서 나옵니다. 이 장면 뒤에는 어떤 것이었는가 하니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를 들어 올려서 콜라주를 만들죠. 왜 그런가하면 바르다가 ‘오! 오!’ 하면서 가다가 마지막에 세워달라고 해서 세우잖아요. ‘오, 여기, 여기, 여기 세워줘!’라고 해서 세운 곳의 작품이 뭐였는지 기억나십니까? 주세페 아르침볼드(Giuseppe Arcimboldo)의 작품입니다. 그의 작품이 과일, 채소를 콜라주 한 것이잖아요. 콜라주라는 것이 바르다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한 번 더 보여준 것이고, 그 방법으로 컨테이너 박스가 콜라주처럼 올라가는 것이죠. 흐름이 천의무봉의 솜씨로 원숙하고 잘 넘어갑니다. 이미지가 이미지를 낳는, 이미지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죠.


4. 다르게 보기

자유 연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엉뚱한 것을 연상하게 되니까 어떤 기존의 사물들을 다르게 보게 만들거든요. 아까 공장의 한 노동자가 저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예술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기도 하죠?” 굉장히 멋있는 말을 던지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하면서 착 걸어가는 저런 멋쟁이들이 한 번씩 있습니다.(웃음) ‘예술의 목표라는 것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에도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이야기 한 것이죠. 사람을 놀라게 한다는 것은 다르게 보게 만드는 것, 다르게 보게 만드니까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든다는 겁니다. 기존의 현실에만 갖혀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벗어나서 다르게 보게 만든다는 것은 또 다른 현실을 보게 만들고, 꿈꾸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때 자유 연상이라는 것은 작가의 개성 있는 자유 연상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라 작가의 내면적인 요소가 결합이 되는 것이죠. 현실의 예술화와 시그니처가 결합을 하는 것이다. 하나의 장면에서 다른 것을 본다, 떠올린다는 것이 동시에 중첩이 될 경우에 콜라주가 일어나는 것 이죠. 이질적인 시공간의 중첩이라는 것이 바로 고다르가 말하는 몽타주의 핵심이죠. 그런 점에서 고다르와 바르다가 통하는 점이 있는데요. 고다르는 성격이 안 좋고, 바르다는 성격이 좋고요.(웃음) 고다르 감독은 성격이 안 좋기로는 정평이 난 것 같아요. 일부러 그러는 것 같습니다. 문 앞에 써놓고 돌아가게 하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왼쪽에 보시면 예술가이자 철학자인 포니가 “뭐든 재료가 될 수 있죠. 아이디어만 있으면요.” 콜라주의 의미를 말해주고 있죠. 예술이라는 것은 다르게 볼 수 있는 눈만 있으면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되잖아요. 어디에서든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어떤 작품이던지 다르게 본다면 그것을 중첩시키면 예술작품이 된다는 겁니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이야기였습니다. 오른쪽 이미지를 보시면 “저기 봐.” 해서 본 것이 조금 전 말씀드린 아르침볼드의 작품이었죠. 콜라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필 저 작품 앞에 섰다.

 

실제로 보면 바르다가 수집광인 것 같아요. 오른쪽 먼저 보시면 동그라미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무엇인가하면 바닷가에서 신는 슬리퍼입니다. 바르다가 어릴 때 초등학교 때 신던 슬리퍼를 하나도 안 버리고 모아둔 겁니다. 어릴 때 신던 것을 다 안 버리고 저렇게 놔두기 힘든데요. 그리고 어릴 때 사진 같은 것도 한 장도 버린 것이 없어요. 못 버리고, 수집하고 모으고, 그러면서 주된 창작방법이 자유 연상을 통한 콜라주 방법이고 바르다의 영화세계, 작품세계와 맞아 떨어지는데요. 왼쪽은 <아녜스의 해변>에서 기차 수집광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고, 가운데는 어떤 사람을 찾아 갔는데 그 사람이 가족사진이 저렇게 많은 겁니다. 온 사방벽면을 다 채우는 것, 오른쪽은 의료용 마스크만 모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제정신이 아닌데요. 저런 것들이 예술과 통할 수 있는 지점이 있는데, 바르다가 그런 경지에 가 있는 것이죠. 오른쪽에 이삭줍기 2년 후, 영화에서 역사 같은 것도 엄청 모아서 가지고 있죠. 어릴 때 역사 같은 것도 버린 게 하나도 없어요. 실제로 보면 60년도에 다게르로 이동해서 지금까지 사시니까 거의 60년 동안 안 집에서 살고 있잖아요. 뭘 한번 가면 움직이지를 않고, 한번 모으면 버리지를 않는 그런 습성이 있다. 그런 것들이 콜라주와 맞아떨어진다.

 

예술은 어떻게 보면 ‘이삭줍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삭 줍는 사람 >이라는 영화는 사회적인 면에서는 바르다가 언제나 그렇듯이 주변부 사람을 찍는 것들이기도 하지만, 예술가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이삭 줍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예술론이 들어가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원래 제목이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이었잖아요. 나는 예술가고 예술가는 이삭 줍는 사람이다. 예술적 소재들을 발견해서 예술로 만드는 것인데, 그때 우연이라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아까 말씀 드렸듯이 어떤 것에서 다른 것을 보아낼 수 있어야 예술이 출발을 하는데, 또 다른 현실을 볼 수 있게 하는 눈이 일상적 생활에만 갇혀 있으면 안 나오는 것이고 마비되는 것이거든요. 그때 그것을 누가 깨줄 수 있는 사람이 치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게 우연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자아에 갇혀 있잖아요. 이걸 우연이라는 놈이 치고 들어와서 깨주길 기다리는 것이죠. 깨주면 그 순간 상식이 무너지면서 또 다른 현실에 대한 생각이 꿈이 싹트는 겁니다. 우연이라는 것은 최고의 조력자라고 하는 것이 농담이 아니라 바르다의 일관된 자유 연상과 콜라주에 연결되는 중요한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영화도 보니까 거의 짜 놓은 게 없다고 하더라고요. 고다르 같은 경우에도 만나러 실제로 간 거죠. 갔는데 안 만나주니까 오히려 더 작품이 완성 된 것 같습니다. 이러 예술가는 자기 생각을 깨뜨려주는 우연 같은 것을 버무려 가면서 예술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바르다가 생각하는 예술이라는 것은 기-승-전-결 서사구조를 미리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벽돌 찍어 내듯이 만들어 내는 예술이 아니라는 거죠. 인용이라든가 인용을 변형하는 것이 바르다 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기성 작품을 다르게 보는 것들이 많은데, 오늘 영화에서 나온 것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드리고자합니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그림인데요, 저 그림을 재인용했다, 변형 시켰다고 한 게 왜 그런가하면 나탈 리가 우산을 어떤 사람은 당기고 어떤 사람은 밀어내는 것을 골라냈잖아요. 그때 바르다가 “더 멀리!, 더 멀리!” 그랬거든요. 팔을 더 멀리하라고, 뻗으라고 하죠. 그림에 맞추려면 더 뻗는 게 맞습니다. 이런 부분이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고 생각한 것이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바르다가 다른 작품에서도 많이 인용합니다. 참고로 마그리트는 벨기에 사람이기도 하고, 고향하고 가깝기도 해요. 왼쪽 그림을 보시면 저 그림은 위의 젠칠레 벨리니(BELLINI, Gentile)의 그림에서 오른쪽 아래 부분에 사람들이 꿇어 앉아 있는 것이 보이시나요? 저 부분을 확대해서 바르다가 옆에 서 있는 것이거든요. 그것을 작년에 그 작품을 또 다시 인용하면서 스스로를 놀린거에요. 그 이유 중에 하나가 20대까지는 무조건 멋있어 보이려고 아래위로 까만 옷을 입었데요. 그땐 그게 멋있는 줄 알고 그랬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면서 지금은 꽃무늬가 좋아진다고 화려한 색깔을 많이 입으시죠. 그리고 앞부분에서 말씀드린 <쿠르트로의 여행>에 등장하는 90도 얼굴 배치를 말씀 드렸는데, 그것은 바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죠. 바르다는 미술 작품 중에서 르네상스 혹은 르네상스 직후, 15세기 작품을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러한 구도들이 예술사를 공부한 것이 곧잘 명시적으로 표현되는 것 같아요. 오른쪽 사진 보시면 바에서 구도를 잡아야 하니까 바르다가 안 웃고 진지한 표정을 지어야 하거든요. 하다 보니 본인도 쑥스러워서 웃음을 터트리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 <얼굴>을 정리해 보자면, 새로운 사람과 장소를 만나가는 다큐 형식을 통해서 감독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두 가지가 동시에 섞여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벽을 다르게 보는 시선도 놓여 있죠. 오른쪽 사진은 영화 시작할 때 언급되긴 했지만 1980년도 캘리포니아에 자크 드미를 따라서 같이 미국에 잠시 있을 때, 그때 LA에서 벽화를 그리는 사람들을 다큐로 만든 적이 있죠. 그 작품에서 벽을 찢고 나오는 그림이 있는데 이와 같이 벽의 상징성 전복은 이 다큐에서도 이미 선보인 적이 있지만 오늘 영화에서는 벽이 라는 것이 다른 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진, 영화, 설치 등 매체가 다양하게 이용이 되는데, 바르다 본인이 사진작가로 출발을 했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사진이라는 것은 정지된 이미지잖아요. 영화라는 것은 움직이는 이미지고, 바르다 영화의 움직임을 자세히 보면 정지된 이미지와 움직이는 이미지의 긴장을 통해서 멋진 장면들이 창출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거든요. 그런 긴장관계는 계속 가져가는 것 같아요. 오늘 영화 같은 경우에 사진작가와 처음으로 공동 작업을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시도와 발상 자체는 바르다 본인의 평생 고민과 연결되는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줄거리 상으로도 일탈되는 그런 것들을 볼 수도 있고요. 이런 것들이 버무려 지니까 곳곳에 사는 현실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꿈과 여행의 충만함을 보여주고, 놀라게 하며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결론 요약을 하겠습니다. ‘아녜스의 영화쓰기 관점’으로 몇 가지를 살펴보았는데요. 프랑스 영화감독 가운데 가장 친근하게 영화를 만드는 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유롭고 친근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증언 그리고 보편성을 확보한다는 기적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 두 가지가 같이 가지 쉽지 않은데, 같이 가고 있는 거죠. 본인 이야기를 엄청 섞으면서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는가. 다르게 말하면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다르다고 알고 있는데,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그런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거죠. 인문학적으로도 굉장히 재미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하면, 감독이 영화에서 나를 철저하게 기입하는 것이 구태여 보편성을 확보한다는 역설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이렇게 봤다. 나는 이렇게 봤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이렇게 봤다는 사례를 제시한다고나 할까요. ‘내 사례를 볼 때는 이랬어요.’ ‘난 이런 장면을 봤을 때 내가 겪었던 이런 일이 생각이 나요.’ 하면 그것이 분명히 큰 맥락에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보편적인 공감으로 확장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다큐나 픽션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현실적이다 객관적이다 이런 것을 과장하기 위해서 일체의 요소를 배제하는데, 이쪽은 주관적인 요소를 엄청 집어넣으면서 ‘내 영화는 주관적이야. 근데 나는 이 영화, 이 장면, 이 현실을 볼 때 이런 게 떠올랐고 생각이 났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라는 것을 던지는 것이죠. 그런 것을 통해서 공감대의 확장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오른쪽 그림을 보면 <아녜스 V에 의한 제인>(1987)에서 영화 속에서 계속 개입을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이 되는 거죠. 이쪽을 보면 바르다가 보이고 바르다가 버킨을 보면 자기얼굴이 거울에 비치고요. 감독의 경험을 일종의 사례예시처럼 사용하고 콜라주로 중첩시키는 ‘영화쓰기(Cinecriture)’ 방법을 사용하는 것 같다. 그래서 관객들은 각자의 경험 속에서 그것을 생각해보고 친근한 공감 속에서 보편적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는 겁니다. 왼쪽 사진은 2006년도 바르다의 전시작품인데요. 한 섬에 사는 미망인 14명을 모아서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증언하는 라디오 필름을 동시에 콜라주 형식으로 보여주고, 그 중에 한명은 자크 드미를 잃은 자신의 진술을 영상으로 해서 전시를 했습니다. 화면 배치와 같이 실제로 의자가 놓여 있는데요. 그 의자에 앉으면 영상에 해당하시는 분의 한사람씩 증언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거예요. 이런 것처럼 바르다는 주관성과 보편성을 역설적인 방식으로 결합시키는 그런 작업을 해 온 것 같다는 겁니다.

 

끊임없이 나아가고 모색하며 의문을 던지는 예술가가 바르다 아닌가 생각하고, 이 사진도 아주 초기 사진인데요. 시각 문법상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야 자연스럽게 전진하는 게 맞는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진한다는 것. 영화 <방랑자>에서 여자가 계속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거든요.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말로 ‘디비쪼은다’ 다르게 말하면 대세에 관계없이 내 길을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향성이죠. 바르다는 그런 고집 센 자기예술을 지켜나가는 멋진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다음글 <어느 가족>-‘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이전글 <버닝> - ‘하루키에서 포크너로: 퇴행인가, 재장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