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영화와 인문학

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잘리카투> - 지배의 세 지층 : 생태학·인류학·정치학2021-08-20
잘리카투 이미지

  

8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영화 <잘리카투> : 지배의 세 지층:  생태학·인류학·정치학

 

 

 

   <잘리카투>는 푸줏간에서 탈주한 물소의 행적, 그리고 이 물소를 추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 사회의 본질을 그렸다. 영화는 인도 남서부 케랄라 지역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서사는 간단해보이지만, 속뜻은 깊다. 인도 고전문학 <자타카>처럼 동물의 비유를 통한 서사 전개가 여러 겹의 지층으로 포개져 있다.

  이 지층들을 관통하는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카스트 계급’이고, 또 하나는 ‘낙살 극단주의자’(Naxalite)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는 최하층 계급인 불가촉천민(Dalit)의 이야기다. 또 영화는 인도 사회에서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낙살 극단주의자를 물소로 비유하고, 낙살주의자를 대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 ‘소 문화’와 카스트

 

  영화의 주인공은 ‘검은 물소(buffalo)’다. ‘흰 암소’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인도인들이 ‘성스러운 소’로 여기고 ‘어머니’(Mother Cow)로 부르는 소는 오직 흰 암소다. 다른 소들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그저 죽어라 일만 한다. 그러니까 인도에는 소에도 계급이 있다. 흰 암소, 적갈색 소, 황소(수소), 물소의 순서다. 그리고 검은 물소는 식용으로 도살될 수 있다.

  소 문화는 카스트와 직결된다. 흰 암소는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과 동일시된다. 브라만은 흰 암소의 다섯 가지 성물(=판차가비야: 우유, 응유, 기 ghi, 똥, 오줌)을 주관한다. 반면 최하위 계급인 달리트는 소의 죽음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한다. 소가죽 신발을 만들거나, 소가죽 북으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 예인들이 대표적이다. 요컨대 브라만은 ‘소를 가진 자’이고, 달리트는 ‘소를 죽이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도 카스트 제도는 소 문화와 연결돼 있다. 달리 말해 소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카스트 체제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검은 물소와 소 도살업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의미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카스트는 ‘바르나’와 ‘자티’로 나뉜다. 바르나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와 같은 계급 구조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과거의 명문 성씨를 따지는 것이 큰 의미가 없듯 바르나는 현재 인도에서 큰 의미가 없다. 반면 오늘날 인도에서 여전히 식사와 혼인을 비롯해 일상에도 작용하는 카스트는 직업과 연관된 자티다. 지역과 직업에 따라 2000개가 넘는 자티로 나뉜다).

 

  전 세계에서 사육되는 소 10억 마리 가운데 3분의 1이 인도에 산다. 이렇게 소가 많은 이유는 소 문화 때문에 소(=어머니)를 숭배하고, 소를 먹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의 80%가 이런 소 문화를 지지하는 힌두교를 믿는다. 그 결과로 대부분의 지역은 소 도살을 금지한다.

 

인도 케랄라 주

인도 케랄라 주 (붉은색  표시)

 

  그런데 영화의 무대인 케랄라 주는 인도 본토에서 유일하게 소 도살이 허용되고, 소고기를 먹는 곳이다. 인종적으로 다른 남부 지역과 비슷하고, 힌두교도의 비중도 50%를 넘는다. 그럼에도 이곳 사람들은 소고기를 즐겨 먹는다. 인구의 80%가 정기적으로 소고기를 먹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힌두교도도 소고기를 먹는다는 이야기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서 소비하는 육류는 하루에 5000톤인데, 자체 생산양은 200여 톤이라는 점이다. 육류 소비량의 대부분이 다른 주에서 반입된다는 말이다. 케랄라 주와 인접한 주들은 모두 소 도살을 금지한다. 따라서 불법적으로 도축을 위해 소를 들여오거나, 또는 소를 도살한 뒤에 케랄라 주에 판매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도입부, 깜깜한 밤에 트럭으로 소를 몰고 오는 장면, 또 농장주인 폴이 물소로 인한 민원을 제기할 때 “이 마히샤는 도축용으로 불법으로 가져온 것이며…”라고 말하는 장면을 생각할 수 있다.

 

• “낙살 극단주의자”

 

  케랄라는 여러 면에서 특별하다.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 20%를 차지하며, 인도에서 가장 비율이 높다. 특히 영화의 무대는 로마 가톨릭 신자가 많은 곳으로 설정됐다(영화에 나오는 교회는 이더키 지구, 메파라에 있는 ‘루르드 마타’ Lourde Matha 성당이다).

  또 이곳은 1957년, 선거를 통해 공산당이 집권한 곳이다. 1980년부터는 좌파/우파가 교대로 집권해왔는데, 현재는 좌파민주전선(LDF)이 집권한다. 영화는 한 청년이 수레를 밀고 가는 장면에서 LDF와 인도공산당(CPI) 포스터가 나란히 벽에 붙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대목에서 낙살주의자를 생각해보자.

  

  영화는 케랄라 지역 소설가 S. 하리쉬가 ‘말라얄람어’로 지은 단편소설 「마오주의자」(Maoist, 2018)를 바탕으로 한다. 소설가 하리쉬가 또한 영화 각본을 맡았다. 인도에서 마오주의자는 낙살주의자와 같은 말이다. 낙살주의자는 1967년 중국 마오쩌뚱의 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출범한 극좌 집단이다. 정글 숲을 근거지로 삼아 게릴라식 무장투쟁을 한다.

  그런데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마오주의자는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정치에 대한 언급 자체가 거의 없다. 다만 영화는 딱 한 번 ‘낙살 극단주의’를 언급한다. 은행 직원 두 사람이 프라바카란의 집에 찾아와 집을 압류하는 장면이다.

 

프라바카란 : 또 낙살 극단주의자냐?

            Playing with Naxal extremists again?

은행직원 : 은행 절차니 협조해 주세요.

 

  우리는 프라바카란이 어떤 인물인지 모른다. 다만 두 가지를 안다. 하나는 물소가 탈출한 날, 푸줏간 주인인 ‘바르키’가 그를 찾아왔을 때, 집안에 레닌의 그림이 걸려있었다는 것. 또 하나는 엔드 크레디트에 ‘낙살주의자 프라바카란’으로 소개됐다는 것.

  이로부터 그가 한때 ‘낙살 극단주의’에 참여했지만, 지금은 ‘정통’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그는 제도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인도공산당은 1960년대 소련과 중국의 이념 갈등과 함께 세 갈래로 갈라졌다. ‘마오주의’ 파가 탈당하고, ‘인도공산당-마르크스주의’(CPI-M)와 ‘인도공산당-마르크스 레닌주의’(CPI-ML)로 갈라졌다).

 

  따라서 앞의 대사(“또 낙살 극단주의자냐?”)는 ‘내가 한때 낙살주의자였다는 것 때문에 나를 또 탄압하는 거냐?’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영화는 매우 함축적인 방식으로 정치적인 내용을 표현한다. 그리고 ‘현역’ 낙살주의자는 사회에서 숲으로 탈주하는 물소로 표현한다.

 

잘리카투 스틸

 

• 케랄라 낙살주의

 

  케랄라에서 낙살주의는 한 번도 세력이 강한 적이 없었고, 지금도 세력이 약하다. 그럼에도, 소수의 낙살주의자들은 여전히 북부 ‘와야나드’ 정글에서 활동한다. 그곳은 3개 주가 만나는 교차점이다. 2014년, 케랄라 출신의 리더인 ‘루페쉬’ 부부가 체포됐다. 그 뒤로 2016년에서 2019년 사이에 케랄라에서는 7명의 낙살주의자가 경찰에게 사살됐다.

  이 일련의 사건을 두고 여론이 갈린다. 경찰은 낙살주의자들이 먼저 공격했기 때문에 사살했다고 밝혔지만, 상당수 언론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경찰이 일방적인 사살을 위장하려고 ‘가짜 교전’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을 충분히 생포할 수 있었는데 굳이 사살한 것은 지나치다는 이야기다(실제 경찰관의 ‘양심선언’도 있었다).

 

  또 낙살주의자들이 강세를 보이는 인도 중부에는 ‘살와 주둠’(Salwa Judum: ‘평화 행진’, ‘정화 사냥’)이 극성을 부렸다. 살와 주둠은 낙살주의자에 맞서는 ‘시민 자경단’(민병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정당방위 차원을 넘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마을을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일반 대중들도 이들을 두려워하게 된 이유다. 여기서 마을 청년 ‘산쿠’의 이상한 언급을 이해할 수 있다.

 

“가난하면 여기 살지도 못하나?”

“물소가 도망쳤어. 완전히 망했다고(Life’s become impossible here).”

 

  물소가 도망쳤기 때문에 삶(생활)이 불가능해졌다는 말은 일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말은 ‘앞으로 낙살주의자와 경찰, 그리고 살와 주둠이 들이닥쳐 마을을 쑥밭으로 만들 것’이란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이웃 마을에서 몰려드는 불량배, ‘푸말라 자식들’은 살와 주둠을 표현하는 것 같다. 이런 배경에서 <잘리카투>를 보자.

 

잘리카투 스틸

 

사회는 이미 폐허였다

 

  물소의 탈주는 마을-사회의 본질을 드러냈다. 그 본질은 바로 마을-사회가 이미 폐허였다는 사실이다. 마을에는 말도 안 되는 위계와 차별이 있다. 무엇보다도 카스트(세습 직업에 의한 자티)와 남/녀의 차별이 있다.

  안토니가 소고기를 배달하려고 어느 집 앞마당에 자전거를 세우자, 집주인이 소리친다. “뭐하는 거야? 거기 대지 마!” 불가촉천민이 ‘감히’ 집 가운데로 들어서면 안 된다는 거다.

 

  또 안토니가 “교회에 백단향이 왜 필요해? 사원이라면 또 몰라.”하고 너스레를 떨자, 옆 사람이 말한다. “닥쳐, 너 같은 버러지 자식 dung-worms이 이해하겠냐?” 자막에서 ‘버러지 자식’은 ‘소똥에 사는 벌레 같은 놈’을 말한다. 이것은 자티에 따른 차별, 모욕이다. 그런 한편 영화는 빈번하고 반복적으로 숲속의 벌레를 비춘다.

  실제 케랄라는 ‘지참금 살인’(신부의 지참금이 적다는 이유로 남편이 신부를 살해하는 행위)이나 카스트에 의한 살인 차별이 인도에서 가장 적은 곳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영화는 아직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토니는 호감을 주는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안토니는 외롭고 측은해 보인다. 이 마을에는 사랑이 없다(소피는 안토니의 사랑을 이용하는 듯하다). 이웃도 없다(그들은 모이기만 하면 다른 이웃의 험담을 일삼는다. 부자 농장주인 쿠리아찬은 딸 약혼식에 이웃을 초대하지 않는다). 동료도 없다(안토니는 동료를 모함해 마을에서 쫓겨나게 만든다).

  마을에는 형식적인 법(‘절차’만 수행하는 은행, 시민을 돌보지 않는 경찰), 손익 계산(물소가 난리인 데도 이자 타령을 하는 가게 주인, 교회의 재산 피해에만 관심이 있는 성직자)만 있다. 또 평소에는 바르키의 푸줏간을 좋아하던 마을 사람들은 재난이 닥치자 푸줏간에 책임을 다 넘겨씌우고 비난한다. 이처럼 이곳은 물소가 재난을 일으키기 전부터 이미 폐허였다.

 

  어쩌면 이 마을의 발생 자체가 그렇다. 마을 노인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원래 ‘코끼리, 고슴도치, 곰’만 살던 정글 숲을 이주민들이 개간한 곳이다. 달리 말해 이 마을은 숲의 폐허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 ‘코끼리, 고슴도치, 곰’은 어디로 갔을까. 마을은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중심’으로 세워졌다. 여기에는 ‘인간 / 다른 생물’, ‘마을 / 숲’, ‘이주민 / 원주민(정글 부족)’의 위계와 차별이 있다.

 

잘리카투 스틸

 

• 마히샤(아수라)

 

  영화는 사회와 숲의 긴장을 담고 있다. 농장주인 폴은 말한다.

 

“그 가엾은 동물은 내버려둬.”

“우주는 모든 생명체의 집이야. [사람만 사는 게 아니야].”

“녀석이 자유롭게 살도록 해줘.”

 

  우주는 인간만이 아닌, 모든 생물의 집이다. 숲은 ‘생명 공동체’다. 사회가 ‘지배, 의미규정, 질서, 통제’라면, 숲은 ‘공존, 규정 불가능=혼돈’이다. 숲은 사회를 에워싸고, 위협한다. 여기서 물소는 야생으로 변화하고, 사회에서 숲으로 탈출하려 한다. 그런 가운데 물소는 마을을 파괴한다. 흥미로운 것은 물소가 아무 것이나 파괴하는 게 아니라, 사회의 상징물을 차례로 파괴한다는 점이다.

 

  물소는 먼저 ‘불’을 밟아 꺼뜨리고, 농장을 짓밟는다. 불은 문명의 상징이고, ‘환금 작물’ 농장은 인위적인 농경과 부의 상징이다. 또 물소는 깃대를 부러뜨린다. 이때 부러진 것은 정당 깃발이다. 그것도 인도 공산당 깃발이다. 여기서 물소가 낙살주의자(=마오주의자)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부터 마오주의자들은 ‘선거를 통한 개혁’을 내세우는 인도 공산당을 ‘적’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물소는 은행과 교회 재산을 망가뜨린다. 은행은 손익 관계와 ‘계산 가능성’(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는 관점)을 상징하며, 교회는 정신적 지배를 상징한다. 물소는 사회 시스템의 최상위 인프라를 파괴한다. 이처럼 물소가 사회를 대표하는 상징물을 선택적으로 파괴하는 모습에서 영화는 물소가 낙살주의자란 사실을 표현한다.

 

  이 관점에서 물소는 ‘혼돈’이다. 사회가 정한 ‘지배, 의미규정, 질서’를 따르지 않는 ’규정 불가능성’이다. 농장주인 폴의 민원서류 작성 장면을 다시 보자. 말라얄람어로 물소는 ‘포투’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물소를 포투로 부른다. 그런데 대서인이 물소를 산스크리트어 ‘마히샤’로 부르자 폴은 당황한다. 마히샤는 곧바로 ‘마히샤수라’(Mahisha + asura = 물소 + 악마)를 연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막은 ‘마히샤(신)’으로 옮겼지만, ‘마히샤수라’는 힌두교의 악신(=아수라)이다. 물소와 악마 사이에서 태어난 마히샤수라는 사람, 사자, 코끼리, 물소로 형상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규정 불가능한 존재(=혼돈)이다. 신화에서 마히샤수라는 악신들을 모아 하늘 군대와 전쟁을 벌인다. 그 유명한 전쟁의 신 ‘인드라’도 패배한다. 마침내 혼돈을 물리친 것은 ‘두르가’(Durga) 여신이다. 두르가는 평화, 안정, 질서를 의미한다.

 

잘리카투 스틸

 

• 사회의 탄생 / 종말

 

  영화에서 물소=마히샤(아수라)는 사회에 혼돈을 유입하고, 사회에서 숲으로 탈주를 시도하지만, 결국엔 실패한다. 한편 안토니는 철저하게 <사회>의 시선으로 물소를 추적하고, 혼돈을 제어하며, 마을에서 으뜸가는 남자(’알파 메일’)가 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안토니도 실패한다. 엔딩 장면, 안토니는 인간 피라미드(=사회 위계) 최하층에 깔려 신음한다.

  인간 피라미드 장면은 사회 시스템 속 인간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서글프다. 한편으로 사회 위계는 엄존한다. 부자, 은행가, 정치인, 종교인이 위계의 꼭대기를 차지한다. 그런 반면 ‘하층민’들은 그 피라미드를 그대로 둔 채 자기들끼리 서로 때리고 짓밟으며 올라서려 한다. 이들은 물소를 둘러싸고 집단 감염 증세를 보이고, 동질화된다. 이런 가운데 사회의 내부에서 높은 단계로 상승하려 했던 달리트 청년은 좌절하고 마는 것이다.

 

  ‘원시 사회’ 장면은 이런 시각에 덧붙여진다. ‘사회는 탄생할 때부터 그랬다, 본질은 그대로다’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생물학적 진화의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다. 가령 인간의 동물적 본능은 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동물적 본능은 그리 나쁘지 않다. 동물들은 나름대로 공존하며 산다(영화는 숲속의 ‘미물’들을 크고, 아름답게 보여준다).

  다시 말해 어떤 동물도 인간처럼 독점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며, 다른 존재의 삶을 파괴하진 않는다. 그것은 동물이 아닌 인간의 본성이고, 사회의 바탕이다. 그래서 원시 사회 장면은 인간 사회가 진화하지 못했다는 점을 말한다(이 장면에서 인간들은 모두 횃불을 들었다. 불은 문명의 상징이다. 동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따지고 보면 브라만 계급도 소를 독점한 계급에 지나지 않는다. 고대 사회에서 브라만은 공식적인 제사를 독점했다. 일반인들은 브라만에게 제사의 대가로 소를 바쳤다. 소는 곧 경제력이다. 그 결과로 브라만 계급은 정신적 독점과 경제적 독점을 함께 누릴 수 있었다. 인도 카스트의 출발점이다.

 

• 시스템 외부를 보는 시선

 

  하지만 영화에서 주요 인물 가운데 사회 시스템의 외부를 보는 사람은 없다. 이 점에서 영화는 ‘출구 없음’에 가깝다. 다만 영화는 두 번의 가능성을 드러내는데, 두 가지는 모두 물소와 노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선의 만남에 관한 것이다. 하나는 우물에 빠진 물소를 들어 올리는 순간. 또 하나는 결말부 인간들이 물소를 놓고 싸울 때, 병든 노인의 집 앞에 나타난 물소와 노인 사이에서 일어난다.

  인간들이 각자 욕구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은 와중에 노인은 그 아수라의 프레임을 넘어 물소의 눈을 바라본다. 물소를 포획의 대상이 아닌 실존적 인격으로 보는 것이다. 본다는 것. 사람과 물소의 시선이 해후한다는 것. 브라질 인류학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Viveiros de Castro)가 말한 ‘관점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을 고쳐 말해보자.

 

  ‘소가 인간을 보면 인간이 되고, 인간이 소를 보면 소가 된다.’

 

  대등한 인격으로서 시선을 교환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물소, 동물, 식물, 공기, 물, 태양…). 감독이 생각하는 ‘사회의 외부’는 이 시선의 해후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이것은 곧 심층 생태주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노인이 침상 위로 늘어뜨린 밧줄을 잡고 몸을 일으키자 창밖의 수풀 사이로 물소가 보인다. 평소에 사람이 소를 볼 때는 밧줄을 묶어 끌고 가는 존재로 본다. 하지만 대등한 인격으로서의 시선이 만나면 달라진다. 소가 인간을 볼 때는 외려 인간이 밧줄로 묶여, 끌려가는 존재로 보일지 모른다. 실제 인간은 시스템에 묶여 있고, 죽음에 묶여 있으니 말이다.

 

  이때 물소가 인간을 보는 시선을 실체화한 것이 케랄라 지역 ‘칼란’ 상징이라고 생각된다. 칼란은 ‘죽음의 신’이다(힌두교 ‘야마’와 비슷하다). 우주에 사는 모든 생물의 목숨을 거둔다. 칼란은 검은 물소를 타고 다니며, 한 손에는 밧줄을 쥐고 있다. 이 관점에서 침상의 노인은 칼란의 소를 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칼란의 소가 자신을 보는 시선을 봤다고 할 수 있다. 시선의 해후다.

  영화는 여기서 존엄이 있는 삶/죽음을 보여준다. 노인은 아수라장 같은 사회의 외부를 응시하며, 그 세계로 다가갔다. 사회 외부에서의 죽음이다. 이 모습은 안토니와 대비된다. 안토니는 존엄이 없는 사회에서 살았고, 존엄이 없는 사회 속 죽음을 맞이한다(마을 사람들은 푸줏간 주인 ‘바르키’의 이름 앞에 ‘칼란’을 붙인다. 소의 목숨을 거둔다는 뜻이겠다. 극히 인간중심적 시선이다. 자막은 칼란을 ‘저승사자’로 옮겼지만 ‘염라대왕’에 가깝다).

   

잘리카투 이미지

 

• “우리는 혼돈 속에 있다”

 

  영화는 스토리보다 세계관을 그리는 작품이다. 세계의 구성과 작동 방식을 우화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세계관에서 핵심은 <혼돈>에 있다. 인도 <필름 컴패니언>(Film Companion) 지와 인터뷰에서 ‘혼돈에 관한 주제를 계속 다루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감독은 ‘우리가 혼돈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감독의 말은 단순히 인도의 현재 상황에 대한 생각이라기보다 ‘세계가 원래 어떻게 되어 있는지’에 대한 생각, 즉 세계관을 담고 있는 듯하다. 이처럼 ‘우리가 혼돈 속에 있다’는 발상은 혼돈이 언제나 질서를 에워싸고 있어, <혼돈이 정상적(일상적)이고, 질서가 일시적>이란 생각을 내포한다. 이 생각은 에밀 뒤르켐의 ‘아노미’(anomie)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뒤르켐은 <자살론>(1897)에서 놀랍게도 아노미가 “일시적 붕괴가 아닌 만성적 상태”, “항상적(상시적) constant이고… 정상적 normal 상태”라고 했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발상은 낯설게 느껴진다. 현대 사회는 ‘로고스’(질서)중심이다. <질서가 정상이고, 혼돈이 비정상>이란 생각 위에 세워져 있다. 이 같은 생각은 유대·기독교의 세계관이다. 반면 <혼돈=정상, 질서=예외>란 생각은 인도, 아시아에서 익숙한 것이다.

  아피찻퐁의 <열대병>(2004)이 좋은 사례다. 영화는 사회를 에워싸고, 위협하는 숲(=혼돈)을 그렸다. 또 <잘리카투>에는 숲의 상징으로 호랑이 대신 물소가 나왔다. 다만 <열대병>의 주인공은 호랑이를 추적하며 합체를 꿈꾸지만, <잘리카투>의 안토니는 물소와 합체를 꿈꾸지 않는다. 안토니는 끝까지 사회의 시점으로, 사회의 욕망으로 물소를 추적한다.

 

  그럼에도 영화 제목을 ‘잘리카투’로 정한 것에는 의미가 있다. 잘리카투는 군중 속에 풀어놓은 황소를 제어하는 놀이다. 하지만 이 놀이의 목적은 제어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제어를 이겨내고 벗어나는 강한 소를 찾는 데 있다. 결국은 ‘종자 소’를 찾는 놀이인 것이다. 투우 경기의 주인공은 ‘사람’이지만, 잘리카투의 주인공은 ‘소’란 점이 다르다.

  달리 말해 잘리카투는 주기적으로 사회 속에 혼돈을 불어넣고, 혼돈을 상기하는 놀이다. ‘혼돈 체험’이다. 이 놀이의 바탕에는 <혼돈=정상, 질서=예외> 세계관이 있다. 인간은 항상 자연을 통제하려 하지만, 자연과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난다는 생각. 또 세계가 원래 이렇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아야 오히려 건실한 사회가 성립한다는 생각. 이것은 곧 <잘리카투>의 세계관이다. 이 관점에서 <계시록> 인용을 생각할 수 있다.

 

• <계시록>, 공멸의 경고

 

  영화는 오프닝과 엔딩에서 <계시록>을 인용한다. 앞서 말했듯 유대·기독교 세계관은 ‘로고스’(질서)중심이고 <질서=정상, 혼돈=비정상>이다. 그런데 <계시록>은 약간 이질적이다. 창조 세계 내부에 악(惡)이 항상 잔존한다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오프닝 인용에는 ‘무저갱’을 비롯해 ‘잡다’, ‘결박하다’, ‘던져 넣다’, ‘잠그다’, ‘인봉하다’는 단어가 들어있다. ‘범죄자’에게 적용되는 단어다. 군중들이 물소를 대하는 관점과 같다. 또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물소를 밧줄로 묶어 구덩이에서 들어 올리는 장면, 물소가 탈출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계시록>에서 빛=밧줄=질서와 대비되는 용=뱀(마귀, 사탄)=범죄자는 물소=마히샤=혼돈=낙살주의자로 연결된다.

   

  하지만 혼돈은 절대 악이 아니다. 인용구를 기독교가 아닌 <혼돈=정상, 질서=예외> 세계관에서 보면 다르게 이해된다. 혼돈을 한시적으로 가둘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 혼돈은 사회 시스템 밑바닥(‘무저갱’)에서 ‘천 년 동안’ 잔존했다. 또 혼돈은 시스템의 경직화를 흔들고, 사회의 도덕적 해이에 경종을 울리는 순기능을 한다(잘리카투 놀이가 전승되는 이유다).

  이 관점에서 엔딩 인용구(“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또한 다르게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 구절은 ‘심판, 처형’으로 해석된다. 반란군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죽는 자는 누군가. 인간 피라미드와 원시 사회 장면은 ‘공멸’을 그렸다. 물소=혼돈을 죽이려다 모두가 공멸하는 장면인 것이다.

 

  따라서 엔딩 인용구는 ‘악마를 물리치고 질서를 되찾자’는 의미보다 ‘만물이 공존의 길을 찾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메시지로 볼 수 있다. 감독이 꿈꾸는 새 ‘천년왕국’은 이 같은 공존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 공존의 생태학

 

  영화는 이 공존을 생태계의 관점에서 표현한다. 공존이라고 하면 ‘다양성’이란 단어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생태계 관점에서 공존은 [ 다양성 / 전체성 ], 두 축으로 이뤄진다. 다양성의 축은 존재들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것인 반면, 전체성의 축은 각 존재가 다른 존재들과 균형, 조화를 깨드리지 않으며 전체 속에 통합되는 것을 말한다.

  환경윤리학자 캘리콧(J. Baird Callicott)의 말처럼, 다양성이 적어지면 생태계가 단조로운 환경으로 전락하고, 전체성이 무너지면(가령 국내의 경우, 외래어종 ‘배스’처럼) 배타적인 종이 생태계를 지배하며, 생태계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Earth's Insights, 1994). 따라서 생태계적 공존에는 다양성만큼이나 전체성도 중요한 것이다.

 

  영화는 생태계적 전체성을 공간적인 단위로 표현한다. 그 단위는 숲과 마을(사회)을 하나로 포괄하는 <장소>다. 영화는 ‘똑딱똑딱’ 시계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으로 시작하고, 연이어 숲속 벌레, 물, 식물, 태양, 구름, 하늘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깨어나는 모습을 마치 동물들의 행동처럼 묘사했다는 점이다. 스무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동물처럼 눈을 ‘번쩍’ 뜨며 일어난다. 이것은 동물/인간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한편, 바로 뒤에 이어지는 숲속 자연의 움직임과 함께 인간과 숲의 존재(생물, 무생물)들이 같은 장소의 자기장 속에 들어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는 이처럼 같은 장소의 자장 속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생태계적 전체, 즉 생명의 단위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소가 생명의 단위가 되는 것이다. 캘리콧은 이런 단위를 ‘생명 공동체’(Biotic Community)라고 불렀다. 생명 공동체는 동물뿐 아니라, 그곳의 토양, 물, 공기, 식물…, 즉 생물과 무생물을 포괄한다.

 

  여기서 물소를 구덩이에서 들어 올릴 때 물소와 노인의 시선이 만나는 장면은 의미가 깊다. 앞서 인류학 개념으로 그 시선의 만남을 이야기했다(‘소가 인간을 보면 인간이 되고, 인간이 소를 보면 소가 된다’). 그 대등한 시선 교환의 인류학은 공존의 생태학과 함께 간다. 이때 물소와 노인의 시선 교환은 한 장소의 생명 공동체가 싱크로(synchro) 하는 순간이다.

  이 관점에선 갑작스런 비 때문에 물소가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 과정에 사람 발자국과 소 발자국이 나란히 찍힌다는 것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장소의 생명 공동체가 공조(共助)하고, ‘싱크로’하는 것을 표현하는 알레고리다.

 

  농장주인 폴의 말처럼 한 장소의 생명 공동체는 ‘모든 생명체의 집’이지 ‘인간만의 집’인 것은 아니다. 생태계적 전체론은 공존을 해치는 독점적 패권에 반대한다. 어떤 종에도 특권을 주지 않으며,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전체론은 ‘탈-인간중심’이다. 생태계적 입장에서, 또 문화적 입장에서.

  실제 인간의 생존 활동뿐 아니라 인간의 문화가 생태계를 해치는 경우도 많다. 가령 인도 소 3억 마리가 배출하는 메탄가스는 환경 문제가 된다(소 한 마리가 한 해 동안 배출하는 온실가스양은 4t이다. 승용차 한 대가 내뿜는 2.7t의 1.5배를 넘는다). 또 인도에 이렇게 소가 많은 이유는 힌두교를 비롯한 ‘소 문화’에 있다.

 

  따라서 탈-인간중심 생태학은 탈-인간중심 문화와 함께 간다. 다시 말해 생태계적 공존은 문화적 공존과 함께 간다. 캘리콧의 말처럼 ‘문화적 분열’(고립, 상호 적대, 편협)은 인간·생명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다. 또 크리스천 퍼렌티의 말처럼 인도 낙살주의는 숲의 파괴, 또 기후변화에 따른 가뭄과 연결돼있다(『Tropic of Chaos』, 2011. 『왜 열대는 죽음의 땅이 되었나: 기후 변화와 폭력의 새로운 지형도』). 영화가 생태계의 관점에서 사회적 공존, 정치적 공존을 생각하는 이유일 것이다.

 

• 생태계와 정치

 

  낙살 극단주의는 1967년 웨스트벵골 ‘낙살바리’ 농민 반란에서 시작됐다. 핵심 목표는 ‘토지(농지)개혁’이었다. 이들은 ‘선거를 통한 개혁’을 내세운 인도 공산당(CPI)을 적으로 봤다. 영화에서 물소가 깃대를 부수자 몇몇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이 적대 관계에서 나왔다.

  

“녀석이 [우리의] 깃대를 부쉈어”

“그냥 넘어가선 안 돼”

 

  낙살주의자들은 한때 인도 면적의 40%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위세를 떨쳤다. 반면 케랄라에서는 약했다. 1963년 케랄라는 이미 토지개혁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963 토지개혁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토지개혁은 ‘토지 소유 상한제’를 실시하고, ‘토지 임대업’(=소작농)을 금지했다. 대지주들은 땅을 팔아야 했고, 돈이 있는 자는 땅을 샀다(이때 새 지주가 된 사람들 상당수가 다른 지역에서 온 이주민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원주민들은 땅을 살 수 없었다. 이제 땅이 없는 사람들은 소작농 금지법 때문에 소작 농사도 지을 수 없었다.

 

  많은 농민들이 생계를 위해 사투를 벌였다. 상당수의 농민들은 이주민들 아래에서 ‘달리트’의 삶을 살거나, 또는 이웃한 숲에 있는 낙살주의 집단에 합류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영화 속 마을은 이 시기에 이주민들이 정착한 마을로 보인다. 잡화점 가게 주인은 푸줏간 바르키의 과거를 말해준다.

 

“여기서 땅 살 돈이 없으니

물소 도축 일 시작한 거지”

 

  또 전통적으로 숲과 정글에서 생활하던 부족 집단들이 있다. 이들은 정부와 다국적 기업이 주도한 숲의 파괴로 삶의 터전을 잃었다. 관광 프로젝트, 야생동물 보호구역 설정, 천연자원 개발은 부족들을 쫓겨나게 만들었다. 숲의 개발에 사용된 엔도설판(살충제)의 후유증도 컸다. 2001년, 야생동물 보호구역인 ‘와야나드’ 인근의 부족 200여 명이 아사했다. 이 숲이 어째서 케랄라에서 유일하게 낙살주의 거점이 됐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로는 또 하나의 요인이 낙살주의를 부추긴다. 바로 ‘가뭄’이다. 가뭄이 들면 농민들이 숲으로 들어가 낙살주의자가 된다. 낙살주의자들이 ‘가뭄 반란군’으로 진화한 것이다. 이것은 인도 정부가 ‘기후 변화’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결과다. 인도는 아직도 국토의 50% 남짓만이 관개수로 정비가 돼있고, 나머지는 몬순에 의존한다. 기온이 높아지고, 지하수의 수위가 낮아지고, 비가 오지 않으면, 농민들이 가뭄을 이겨낼 수 없다(2018년 금융그룹 HSBC의 조사에서는 전 세계에서 인도가 기후 변화에 가장 취약한 나라로 꼽혔다).

 

  이처럼 토지를 잃은 농민들, 또 숲의 파괴로 전통적인 삶의 터전을 잃은 부족 집단들, 그리고 기후 변화에 따른 가뭄으로 기근에 허덕이는 농민들이 낙살주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렇듯 낙살주의에는 생태학(숲 파괴, 기후 변화), 인류학(전통적인 삶, 개발주의), 정치학(토지개혁, 카스트, 정당 정치의 한계)의 지층이 얽혀있다.

 

• 혼돈과 공존

 

  감독은 물소가 생존을 위해 탈주하는 모습을 통해 낙살주의자들의 ‘뿌리 뽑힌 삶’을 형상화했다. 현재 인도에서는 낙살주의 집단에서 나온 문서를 지니거나 읽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는다고 한다. 원작 소설과 영화가 동물의 비유를 든 이유일 것으로 짐작한다.

  또 감독은 인간 피라미드 최하층에서 절규하는 안토니를 통해 현재 사회의 외부를 상상하자고 호소한다. 그 외부란 것은 물소와 노인의 시선 교환으로 암시된 것처럼, 생명 공동체의 존엄이 있는 삶이고, 생태학·인류학·정치학의 관점에서 공존의 세계일 것이다.

 

  이 세계를 생각하는 것은 ‘혼돈과의 공존’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인간 피라미드의 군상처럼 물소를 죽이는 데만 열을 올리는 것은 모두가 공멸하는 길이다. 마치 가라앉는 배에서 자리다툼을 하는 것과 같다. 기후변화에서 오는 기근, 농민들의 상시적인 빈곤, 또 중앙 정부에 통합되지 않는 정글 숲 부족들의 존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낙살 극단주의는 마히샤수라처럼 형태를 바꾸며,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글 <바쿠라우> - 에로스와 타나토스
이전글 <오필리아> - 그린 셰익스피어, 그린 오필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