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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남미 영화제 시네토크 <천국에 간 비올레타> 2015-03-24(화)  - 소극장

3/24 <천국에 간 비올레타> 특별강연

시네토크 : 남미 음악 여행

 

* 강연 : 우석균 교수

* 장소 : 영화의전당 소극장

 


  

 

 

 

 (우석균) 아타왈파 유팡키, 비올레타 파라 등이 부른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가수들의 목소리가 의외로 단조롭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합니다. 이들은 근대화와 도시화가 막 시작 되었을 때 시골에서 대도시로 상경 후 도시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부르던 민속음악을 채집하고 그 노래들을 불렀는데,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낯선 도시에 대한 외로운 심정이 담긴 노래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다 보니 분위기가 그런 식으로 전달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악이라고 할 법한 이런 식의 전통 노래들을 일컬어 뜻밖에도 그들은 새노래라고 부릅니다. 지역의 역사적 특색을 들어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아시아나 아프리카는 식민 지배 시기가 끝나면 침략 국가가 거의 다 철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라틴아메리카는 좀 달랐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사람들은 침략과 함께 상당부분 이주를 했고, 그러다보니 독립 후에는 많은 국가의 민족들이 섞이게 된 것입니다. 스페인어를 뿌리로 갖고 있지만 이후 미국 등의 영향을 받다보니 토착문화보다는 서구문화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된 것이죠. 이들이 노래 운동을 시작할 때 전반적으로 그들이 TV나 라디오를 통해 들을 수 있었던 음악들은 영국이나 미국의 팝 처럼 상업적인 색깔의 음악정도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라틴아메리카 지방에서 끈질기게 자생한 음악들이 채집되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고,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새 음악이라는 생각으로 이런 음악들을 중심으로 음악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쿠바의 누에바 트로바나 칠레의 누에바 칸시온과 같은 음악에는 새로운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런 음악 운동들은 상업적 의미가 아닌 시() 자체여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쟁점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노래가 갖고 있는 의미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도 아니고 즐기기 위한 수단도 아니라, 노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끼리 그룹을 만들고 악기를 다루면서 음악적 감성을 복원하고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1960년대 대대적인 성공을 이루었는데, 이 때 시대적 상황이 쿠바 혁명이 성공한 직후거든요. 쿠바 혁명에 대한 민족적 의의가 워낙 대단했어서 이 때의 음악 운동이 민족주의 운동만큼이나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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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함께 보신 <천국에 간 비올레타> 영화 속 주인공 비올레타 파라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겠습니다. 1917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녀는 기타를 특히 잘 쳤고, 만지는 악기마다 금방 배울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노래를 꽤 하셨다고 해요. 정식 가수는 아니지만 동네 잔치에서 노래를 부를 정도만큼은 되었다고 합니다. 가정이 부유하지는 않았는데 심지어 아버지는 한량이어서 어머니가 많이 고생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비올레타가 아버지의 유산인 기타를 건드리려고 하면 어머니가 굉장히 못마땅해 했는데,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 그걸로라도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해야 했으니까요. 실제로 비올레타는 7살 때부터 동생들을 데리고 기차나 길거리에서 기타치고 노래하며 동전 몇 푼 받아 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생계에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9남매 중에 큰아들인 니카노르 파라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1914년생으로 올해 101살이죠. 그 집안에서 오직 그만 공부를 시킬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랐을만큼 칠레를 대표하는 대단한 시인이 되었는데, 그는 특히 비올레타가 공부 할 기회를 놓치고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올레타는 이에 대해 반대로 답합니다. 내가 만약 공부를 했으면 음악을 본능적으로 대하지 못 했을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집안의 생계를 견디지 못한 비올레타 파라는 큰오빠인 니카노르를 따라 16세 때 큰 도시로 상경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계가 특별히 나아지진 않았고 결국 밤무대 가수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서야 음악이 나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결국 남편과 이혼을 하고 1953년부터 음악을 채집하는 작업들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그 해 라디오 음악 프로를 하나 맡게 되면서 음악들을 하나씩 소개해 대단한 히트를 쳤어요. 자기 인생이 35살에 시작되었다고 말을 했을만큼 예술성을 인정받았던 그녀는, 폴란드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유럽을 돌며 칠레 음악에 대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잃게 되었고, 결국 다시 이혼을 하게 되죠. 이렇게 억척스럽다고 여길 만큼 꿈을 좇던 그녀는 막바지에 이르러 음악의 전당과도 같은 음악 공간을 만들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결국 인생의 막중한 짐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결국 영화 제목과 같이 그녀는 안타깝게도 자살을 선택합니다. 당시 심각한 병을 앓고 있을 때였는데, 자살이 아니더라도 오래 살 수는 없었던거죠. 그 무렵에 만든 두 개의 노래가 있습니다. ‘열일곱 살로 돌아간다는 것은이라는 노래가 그 중 하나인데, 자신이 소녀 시절 꿈을 이루겠다고 도시로 상경했을 때 밤업소에서 꿈 하나만을 가지고 노래를 부를 때를 회상한 노래죠. 술 취한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힘들었을 때인데, 그녀가 그때부터 아마 억척스러웠던 것 같은데요, 술 취한 손님 머리를 들고 있던 기타로 내리치기도 했었다는데 그 때 기타를 여럿 부쉈다고 하죠.(웃음) 그녀에게 열일곱은 절대 아름다웠던 시절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발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녀가 평생을 들어 이 만큼 소녀적인 감성을 가지고 노래를 부른 적은 없었습니다. 노랫말은 굉장히 아름다운 반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한풀이 하듯 부른 명곡입니다.

 

그녀가 남긴 또 하나의 명곡은 생애 감사해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제목의 노래입니다. 삶을 찬미하는 이 노래를 만들고 큰오빠에게 들려준 후, 음반 취입을 하자마자 자살을 한 노래기도 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그 노래 속에 마지막으로 다 쏟아부었다고 평가 되는 그녀의 마지막 명곡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