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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비더'특별전 특별강연(2) : 허문영 프로그램디렉터 2015-03-14(토)  - 시네마테크

3/14 킹 비더 특별강연 (2)

 

* 강연 : 허문영 영화의전당 프로그램디렉터

* 장소 :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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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영) 624일에 시작한 킹 비더 특별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많이 보셨습니까? 이 특별전을 시작하면서 사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열렬한 시네필들에게조차 낯선 이름이기 때문에 몇 분들이나 킹 비더의 영화를 보러 오실까 걱정이 많았는데, 그래도 꾸준히 보러 오신 분들이 많이 계셨던 것 같아서 감사드립니다.

 

아마 여기 오신 분들 중 몇몇 분들은 킹 비더 영화를 그래도 꾸준히 봐오셨을 테니까 킹 비더 특별전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킹 비더의 영화세계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킹 비더는 사실 종잡을 수 없는 감독입니다. 과연 이 모든 영화들이 같은 감독의 영화일까? 예를 들어서 아름답고 로맨틱한 <위대한 바들리스>, 음침하고 난폭하고 공격적이고 비관적인 영화 <비욘드 더 포레스트>를 만든 감독이 정말 같은지 의심스러울 만큼 스타일, 주제, 캐릭터 이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아마도 킹 비더가 당대에는 누구보다 유능한 감독으로 존중 받았지만 후대의 영화학자나 평론가들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덜 언급된 이유 중 하나도, 킹 비더가 가지고 있는 도저히 종잡을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다양성이 어느 정도 기인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미국의 영화전문기자 레이먼 더그넷(Raymond Durgnat)은 일찍이 킹 비더의 영화가 비범한 영화들이고 존 포드, 하워드 혹스, 라울 월시 등의 당대 거장들과 당당히 겨룰 수 있을 만큼 풍부하고 심오한 영화세계를 갖추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1970년대부터 킹 비더의 영화세계를 탐구했으며, AFI에서 발행하는 필름 코멘트라는 잡지에 두 번에 걸쳐 킹 비더의 현존하는 모든 작품에 관한 영화 리뷰를 쓴 적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킹 비더 마니아죠. 이 사람의 책자 제목이 좀 재밌습니다. [KING VIDOR, AMERI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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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비더 할리우드도 아니고 아메리칸이라고 붙어있습니다. 그리고 킹 비더가 마치 미국의 황무지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 또한 독특합니다. 그런데 왜 그는 하필 킹 비더를 아메리칸 이라고 표현을 했을까요? 더그넷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킹 비더는 할리우드 감독인 것과 동시에 아메리카, 즉 미국의 감독이라는 것입니다. 할리우드가 미국 아니냐?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할리우드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간섭과 장르의 관습, 스타 시스템 등 할리우드의 규범적인 틀을 벗어나 영화를 만들 수는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레이먼 더그넷이 보기에, 그런 할리우드 시스템에 의한 구속적인 상호작용만으로 킹 비더의 영화 세계를 감히 정의 할 수 없었으므로, 이 사람의 영화 세계는 다양한 역사 및 정체성을 가진 미국이라는 넓은 범주의 틀로 바라봐야 하지 않나 하고 이 제목을 달았던 것입니다.

  


 

 

 

1894년은 유독 위대한 감독들이 많이 태어난 해입니다. 작년에 저희가 소개했던 존 포드조셉 폰 스턴버그이 두 감독이 1894년에 태어난 미국 고전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었고, 미국 밖에서는 장 르누아르1894년생이었죠. 그리고 킹 비더 감독이 있었습니다.

 

존 포드 하면 서부 사나이, ‘존 웨인이 떠오르죠. 의무와 복수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하지만 끝내 그 임무를 완성해내는 남성 영화를 만든 감독. 물론 존 포드가 남성 영화만을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윤리적 의무에 따른 남성 캐릭터를 평생 탐구한 감독이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조셉 폰 스턴버그는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바로 마를렌 디트리히. 실제로 마를렌 디트리히와 작업한 6편이 조셉 폰 스턴버그의 대표작입니다. 이 영화들을 떠올리시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는 속내를 짐작 할 수 없는 신비한 그녀의 표정일텐데요. 이 표정은 폭발 직전의 정념을 의미합니다. 영화 내내 마를렌 디트리히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지만, 영화 끝에서는 결국 초인적인 결과를 보여줍니다. 조셉 폰 스턴버그는 결국 여성 영화로 정념의 신화를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이렇듯 거장들의 작품을 통해서는 큰 키워드를 뽑아낼 수 있는 반면, 킹 비더는 어떤 사람인가? 했을 때... 저도 이번 기획전을 통해 그 동안 못 본 킹 비더의 영화들을 다 챙겨보았지만... 다 봐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영화들이 놀라울 정도로 훌륭합니다. 그렇지만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캐릭터만 놓고 예를 들어도 <라 보엠>의 청순하고 가련한 여주인공, <스텔라 댈러스>의 모성적 이미지, <비욘드 더 포레스트>의 난폭하고 공격적인 관능적 여인이 과연 한 감독에게서 나온 캐릭터가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남자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군중>의 유약하고 소심한 남성상, 그런데 반면 <위대한 바들리스><라 보엠>에서는 로맨틱하고 활기찬 남성상을 그렸죠. 그리고 후기작에 속하는 <마천루>에서는 나무토막이나 강철과도 같은 의지를 가진 남성이 등장합니다.

 

게다가 스타일은 또 어떻습니까. <군중>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다큐멘터리적 사실주의, <거리의 풍경><시나라>는 연극적 사실주의, 오늘 보신 <스텔라 댈러스>는 고전적 사실주의를 갖추고 있죠. 그런데 후기로 넘어가면 스타일이 정말 괴상해집니다. <비욘드 더 포레스트> <백주의 결투> <루비 젠트리> 같은 영화를 보면 칼라 표현주의의 극단을 보여줍니다. 이 복잡하고 다양한 주제의식, 다양한 스타일을 아우르는 킹 비더의 대표적 키워드는 이렇듯 찾기가 힘듭니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우리가 킹 비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기껏 해봤자 300년 역사밖에 안된 수수께끼로 가득 찬 괴상한 나라를 세운 청교도주의원시적 공격성초근대적 문명이 세 가지가 한데 모인 나라 아메리카에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었고, 그 중 한 사람이 킹 비더 감독인데, 다른 감독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킹 비더는 그 안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캐릭터를 붙들고 있기보다는 차라리 그 시대의 변화, 스튜디오의 요구, 자기의 표현 욕구를 맹렬히 뒤섞으며 항상 예상 할 수 없는 작품들을 끊임없이 만들어온 감독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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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비더는 예술가로서의 총체적 비전속에서 영화를 만들었다기보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와 상황적 요구 속에서 자신의 철학을 충돌시키고 융합시키며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즉 킹 비더의 영화는 일종의 반응’ response 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은 다르게 말하면, 제가 쓰고 싶은 표현은 위대한 모순의 작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만든 앞과 뒤의 영화가 다르고 심지어 다른 주장을 하고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될 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감독인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건 킹 비더 영화를 쭉 봐오신 분들 혹은 이제 처음 접하는 분들이 얘 뭐니? 좀 이상하다싶은 생각을 가지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정리하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킹 비더 감독도 시대에 따라 도저히 보기가 힘든 졸작들을 만들기도 했고 다른 거장들 역시 킹 비더 만큼이나 다양한 행보를 시도한 감독들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킹 비더가 무성영화시대에 <군중>이나 <빅 퍼레이드>가 이룬 성취, 유성영화시대에 <스텔라 댈러스>가 이룬 성취, 2차 대전 이후 그로테스크한 필름 누아르들로 이룬 성취처럼 이것들을 모두 동시에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킹 비더는 한 마디로 말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하며, 제가 그에게 위대한 모순이라고 언급 했던 이 특별한 성격은 앞으로 영화계에서 계속 탐구와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