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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일본 거장전 I : 임재철 영화평론가 2014-12-12(금)  - 시네마테크

12/12 <아리가토 씨> 특별 강연

 

 

* 강연 : 임재철 영화평론가

* 장소 :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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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철) 아무래도 국제적 인지도를 생각하자면 모두들 구로사와 히요시,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이렇게 세 사람 정도를 가장 유명한 일본 감독 거장으로 꼽습니다. 그들에 비한다면야 시미즈 히로시 감독은 일반적인 인지도로 따졌을 때 그들만큼 유명한 감독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살아있을 당시 일본에서 꽤 유명한 흥행 감독이었고 이후 다시 90년대부터 재조명을 받은 희귀한 경우의 감독입니다.

 

세계영화사에 있어 가장 흥미로웠던 시대가 아마도 1930년대 일본영화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일본영화사의 황금기로 불리던 그 때만 하더라도 일본 영화들이 할리우드를 넘어서 세계 1위 편수를 자랑하며 매해 570-600편 개봉을 했으니 규모가 어마어마했던 게 상상이 되시나요? 이렇게 상업적으로도 물론이고 미학적으로도 훌륭했던 시기가 1930년대 입니다.

 

영화감독이자 영화학자인 노엘 버치’는 6개월 정도 일본에 머무르며 1930년대 일본 영화 중 현존하는 작품들을 거의 모두 찾아보았다고 하죠. 이 시대와 관련된 저서에서 노엘 버치는 그 시대 영화들을 보면서 놀란 이유가 철저히 미국과 유사한 스튜디오 시스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들이 굉장히 대안적인 미화를 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 특히 노엘 버치가 중시했던 감독이 바로 우리가 오늘 이야기 나누게 될 시미즈 히로시 감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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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즈 히로시는 160여 편이 넘는 엄청난 수의 영화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항상 오즈 야스지로와 함께 언급 되고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되었는데요. 1903년생으로 동갑인데다가 쇼치쿠 스튜디오에 입사한 시기도 비슷하고, 1924년 감독이 된 시기도 같았으며 개인적으로도 서로 아주 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즈와 달리 시미즈 히로시의 세계적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이유는 대표작들의 시대적 차이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오즈 야스지로의 대표작들 <동경 이야기> <부초> 등의 작품들은 모두 50년대 작품들이죠. 반면 시미즈 히로시는 데뷔 초반의 걸작들에 비하면 유독 50년대에 들어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1212일이죠? 바로 1212일이 오즈 야스지로가 태어나고 죽은 날입니다. 시미즈 히로시는 오즈와 사후에도 여러 가지로 인연이 얽혔는데, 2003년이 오즈 탄생 100주년이라고 해서 일본 및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오즈 야스지로 감독 관련 행사를 많이 열었거든요. 반면 시미즈 히로시는 오즈와 동시기에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2003년에는 그를 위한 단 한 차례의 행사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다음해인 2004년도에 이르러서야 홍콩 영화제에서 시미즈 히로시 탄생 101주년으로 처음 국제 기념행사가 열렸던 웃지 못할 일도 있었죠. 

 

하지만, 실제로 1930년대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보다 시미즈 히로시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비록 그 이후 흐름이 오즈 야스지로의 예술성에 집중 되었긴 했지만... 하지만 오히려 시미즈 히로시는 쇼치쿠 스튜디오를 향해 오즈의 영화로 돈을 못 벌어도 좋다. 대신 내 영화로 돈을 벌면 되지 않은가.라는 말로 오즈의 영화를 진심으로 지지해 주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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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미즈 히로시와 오즈 야스지로의 막역한 친분 외에도, 이번 기획전에서 함께 소개해드리고 있는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 역시 이들과 함께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특히 오즈 야스지로는 야마나카 사다오가 도호 스튜디오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불러내어 술과 밥을 사는 식으로 뛰어난 후배 감독에게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후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의 사망 소식을 들은 두 감독 모두 굉장히 애석해 했다고 합니다.

 

야마나카 사다오는 현존하는 작품이 3작품 뿐이지만, 만약 전쟁 중에 요절 하지 않고 계속 살아 영화를 만들었다면 정말 굉장한 감독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뛰어난 감독이 요절한다는 사실 자체는 실제로는 성립되기가 굉장히 힘들거든요. 우선 젊은 나이에 빨리 영화감독이 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뿐더러, 짧은 기간에 걸작을 남기고 요절하는 것 자체가 보통은 쉽지 않은 운명일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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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즈 히로시 감독은 영화적 구성을 세밀하게 물고 늘어지는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시미즈 히로시 감독이 장 르누아르감독과 많은 점이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시미즈 히로시의 대표작으로 꼽는 <안마와 여자> <머리 장식핀> 같은 작품들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영화들의 놀라운 점은 플롯에 굉장히 무관심하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이 감독의 영화에는 기승전결이 없어요. 오늘 함께 보신 <아리카토 씨>의 경우는 그나마 예상되는 결말이 주어지긴 했는데 위의 두 영화는 그 정도의 결말도 없이 끝나버리거든요.

 

그리고 시미즈 히로시는 대본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아리가토 씨>를 보면 현장에서 즉흥적인 부분이 많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여인이 등장한 것도 역시 원래 대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맞닥뜨리게 된 상황을 영화 속에 녹여 낸거라 하죠. 이와같이 시미즈 히로시는 실제로 영화를 만드는 장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굉장히 개방적이었고,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게 영화의 흐름을 자유롭게 구상하는 영화를 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점이 시미즈 히로시의 큰 장점이라 할 수 있으며, 실제로 1930년대 일본영화사의 판타지를 갖게 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