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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외스타슈' 특별강연 : 김성욱 영화평론가 2015-04-03(금)  - 시네마테크

4/3 장 외스타슈 특별강연

<나의 작은 연인들>

 

 

 

 

* 강연 : 김성욱 영화평론가

* 장소 :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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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욱) 장 외스타슈 영화의 특징으로는, 프랑스 영화평자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다섯 가지 정도를 꼽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전통적으로 알려진 누벨바그(포스트 누벨바그 포함) 작가들 중 외스타슈가 계급적으로 좀 더 특별한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페삭에서 태어났고 1981년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는, 프랑스 영화 작가들 대부분이 중산층 부르주아 이상들 출신의 계급을 갖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 출신의 작가였다는 것입니다. 빈곤의 작가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영화 작업 자체가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려웠던 작가였습니다.

 

두 번째로는 프랑스 평론가 세르주 다네Serge Daney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대를 전사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외스타슈 자신도 뤼미에르 영화로 회기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이 사람에게 있어서 영화란 시대 안에 놓여 있는 특정한 역사 등의 사실들을 기록하는 특성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에서 외스타슈는 아카이브적인 작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세 번째로는 방금 말씀드린 특징에서 파생적으로 이야기 했을 때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왕래했던 작가라는 것입니다. <엄마와 창녀>, <나의 작은 연인들>은 그의 몇 안 되는 장편 극영화며, 그 외 작품들은 주로 다큐멘터리입니다. 저도 가장 처음 본 작품이 <엄마와 창녀>였습니다만, 이후 그의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극영화와는 확실히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는 외스타슈가 에릭 로메르Éric Rohmer의 느낌에 근접한 스타일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엄마와 창녀>의 경우가 이에 부합합니다. 물론 오늘 보신 <나의 작은 연인들>은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Roland Truffaut 영화와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어쨌든 그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이 많은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엄마와 창녀>는 러닝타임이 200분이 넘는데 말이 정말 많아요. <알릭스의 사진>, <불쾌한 이야기> 등을 봐도 이미지는 별로 없는데 말이 굉장히 많죠. 그의 영화 속에서는 말이 굉장히 중요하고, 그것은 영화를 좀 더 문학적인 경향 아래 놓은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외스타슈는 정치적인 성향의 작가였다는 것입니다. 보통 포스트 누벨바그라고 하면 68 혁명 이후를 살았던 작가들을 일컫는데, 특히 평단에서는 외스타슈에게 프랑스 사회의 비전이나 지방의 역사를 담아 낸 작가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의 영화를 단면적으로 봤을 때는 그다지 정치적인 점을 발견할 수 없을지 모르나, 동시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현상들을 솔직하게 담아낸 작가로 충분히 언급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2

 

장 외스타슈는 프랑스 영화사에서 기존의 누벨바그 감독들보다 훨씬 전투적이고 비타협적이었던 작가로 설명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보신 <나의 작은 연인들> 경우가 그런 와중에서 공식적인 극 장편 영화 중 마지막 영화라고 할 수 있겠는데, 1972<엄마와 창녀>를 만든 직후 1974년에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사실은 거의 동시에 두 작품의 시나리오를 작업하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극장편 영화를 제대로 찍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절박함을 가지고 <엄마와 창녀>를 먼저 만든 후 주목을 받으면서, 그 이후에 들어 <나의 작은 연인들>을 완성 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작은 연인들>을 보시면 프랑스 누벨바그 작가들의 몇몇 영화들과 비슷한 점을 발견하실 수 있을텐데요. 프랑수아 트뤼포의 <개구쟁이들>(1957)이나 모리스 피알라Maurice Pialat<벌거벗은 유년 시절>(1970)과 같이 작가들의 유년시절 경험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자전적 영화는, 상업적 영화 유통 구조 속에서는 좋은 조건의 영화가 아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영화는 1부와 2부로 크게 나뉘는데, 1부는 할머니와 함께 사는 유년기 시절이었고 이후 어머니가 사는 곳으로 이사 가게 되면서 이방인 같은 존재감을 느끼게 되는 시기가 2부죠.

 

<나의 작은 연인들>은 시인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의 시 제목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영화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성당 영성체 장면 또한 이 시와 관련 되어있습니다. 이 에필로그에서부터 소년의 이상한 행동이 드러납니다. 이 장면을 통해 이 영화의 전체적인 방향을 짐작 할 수 있는데, 우선 다니엘이 유독 접촉애호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년의 행동이 단순히 성적인 흥분이나 여성에 대한 강박적인 호기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자기 눈앞에 보이는 세계가 자꾸 사라져 가기 때문에 붙잡고 싶어 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구애를 하고 거절을 당하고 좌절을 맛보는 구조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데, 이 부분 역시 랭보의 시와도 비슷한 맥락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그래서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접촉하고 관계를 맺으려 하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모두 애매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꾸 손으로 취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 취하는 행동은 어떻게 보면 사실 영화를 찍는 행위 자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바라보던 세계는 어느새 사라지고 말죠. 그 시간을 붙들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런 식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었다고 풀이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누벨바그의 힘이었으며, 외스타슈의 경우는 더욱 절박했습니다. 왜냐하면 누벨바그 절정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외스타슈는 그 사라져버리는 누벨바그를 붙잡고 계승해야만 하는 작가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