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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네마 XIII' 특별강연: 정성일 평론가 2016-04-09(토)  - 시네마테크

황금투구 특별강연 01

  

4/9  <황금투구>

 

* 강연: 정성일 영화평론가

* 장소: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전체 강연중 <황금투구>에 관한 일부만 요약되어있습니다.)

 

자크 베케르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아마 여러분들이 이 감독의 이름을 들어볼 기회가 별로 없거나, 비평가들이 거의 언급하지 않는 감독 중의 한 사람이죠. , 프랑스에서도 자크 베케르에 관한, 영화감독들에 관한 책이 많이 나오기로 유명한 이 나라에서도 이 감독의 책이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단행본으로 한 권 정도가 나와 있고, 베케르에 관한 산발적인 기사들이 카이에 뒤 시네마포지티프에 실려 있는 정돕니다. 영미권에서는 자크 베케르에 관한 책이 단 한 권도 나와 있지 않으며, 한국에 나와 있는 옥스퍼드 영화사 대사전, 크라운판 굉장히 큰 대백과사전 사이즈에다가 페이지가 무려 거의 1400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에서, 세계 영화사를 망라하면서 소개하는 이 책에서 자크 베케르의 이름은 딱 여섯 번 나오고, 단 한 번도 독립된 항목으로 다뤄져 있지 않을뿐더러 다른 감독들의 이름과 함께 죽 소개되면서 그 당시의 감독으로는하는 식으로밖에 소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아마도 자크 베케르가 그렇게 중요한 감독이 아닌데 오늘 왜 이런 자리를 마련했을까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크 베케르는 제 생각에 프랑스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이 이름의 중요함은 점점 더 커질 겁니다.

 

 황금투구 특별강연 02


<황금투구>에서, 이 첫 장면에서, 보마르셰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은 이 강가를 낀 카페에 춤을 추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앉아있습니다. 모두 모여 앉아있는 이 모습들을 보여줄 때, 이 모습들에서 한 가지 이 그룹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모두, 말하자면, 이 난잡하게 얽혀져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규칙은 모두 일대일로 남자와 여자가 짝을 지어서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골 카페에 그것이 유일한 질서입니다. 즉 일대일로 짝을 짓고 있는 것. 이 유일한 질서가 작동되기 시작하는 것은, 이 질서 안에 +1이 들어가게 되면 이 +1이 즉각적으로 이 질서에 카오스를 만들어내기 시작하고 새로운 조합이 시작되면서 이제부터 새로운 관계가 시작됩니다. 이게 보마르셰가 만들어낸 그 유명한 전통입니다. , 자크 베케르는 <황금투구>의 첫 장면에서 카페에 사람들을 막 집어넣지만, 집어넣었을 때 그들을 모두 짝지어 놓았습니다. 여기에서 여자가 없는 남자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다른 남자의 여자를 취해서 짝을 맞춰야 됩니다. , 말하자면 영화가 시작하고 짝을 지어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에, 망다가 들어오게 될 때, 짝 없는 망다가 들어왔을 때, 망다가 마리에게 이끌려 마리와 이 새로운 카오스를 만들어낸 것은 어쩌면 보마르셰의 전통 속에서, 그래서 망다가 이 세계 안으로 들어왔을 때, 사실상 그가 이미 이 규칙의 희생자가 될 운명을 안고 이 안으로 들어왔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걸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해낸 사람은, 흥미롭게 해낸 영화는 1939년 장 르누아르가 만들었던 <게임의 규칙>일 것입니다. 계속 하나 플러스, 마이너스 하나, 플러스 하나, 마이너스 하나 이러면서 계속 카오스가 벌어지죠. 자크 베케르는 그것을, 그 영화를 만들면서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 자크 베케르는 르누아르 영화의 형식을 흉내 내는 듯이, 상투적으로 롱 테이크로 찍거나 딥 포커스로 찍거나 많은 거장의 영화 현장에 가서 영화를 배우는 감독들은 종종 그렇게 형식을 배워갖고 돌아오죠. 형식을 배워갖고 돌아오면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그냥 영화를 카피하게 됩니다. 자크 베케르는 영리하게도, 혹은 어쩌면 본능적으로 장 르누아르의 미학을 배워온 대신, 이 규칙을 배워갖고 온 겁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영화 속에 이 규칙을 밀어 넣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보마르셰의 전통이 이 영화를 시작하는 하나의 시작 지점이라면, 자 또 하나의 시작지점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시작점은, 이 영화의 첫 장면을 보자마자, 그러니까 아름다운 타이틀롤이 막 올라가고 난 다음에 첫 장면이 딱 나오는 순간, 여러분들 즉각적으로 뭐가 떠오르셨습니까? 이 영화의 첫 장면을 보는 순간, 그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첫 장면에서 의도적으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그러니까 자크 베케르의 스승이었던, 자기가 조감독을 했을 때의 감독이었던 장 르누아르의 위대한 아버지, 인상주의 그림의 위대한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그 강변을 그렸던 19세기의 인상주의 그림이 즉각적으로 떠오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인상주의 그림의 세계를 재현하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여기서, 강변에서의 몇 개의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그림을 그대로 가져오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 남녀들이 막 뛰어와서 카페에 들어와 춤추는 장면이 있었을 때, 이 춤추는 장면도 똑같은 구도의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말하자면, 보트를 타고 노는 남녀, 시골의 카페에서 춤추는 남녀, 우리들은 모두 이것을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본 것입니다. 아예 차라리 이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인물들은 이미 르누아르의 그림 안에 있는 것입니다


 

황금투구 특별강연 03

 

망다는 가장 늦게 카페에 가서 나타납니다. , 카페로 넘어가기 전에 한 장면은 꼭 설명하기로 합시다. 대부분의 영화라면, 통상적인 방식의 영화의 진행이라면, 1950년대 영화의 진행이라면, 보트가 이 둑에 도착하고 나서 여자들과 남자들이 내리고 나면, 자 저기 카페가 보이네 하고 카페 안의 문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줄 것입니다. 구태여, 자크 베케르의 연출은, 내리자마자 황금투구가, 마리가 와서 얘기합니다. “우리 카페까지 달려갈까?” 하고 그 다음 막 카페까지 달려가는 장면을 찍습니다. 구태여 찍습니다. 이것을 영화의 운동감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훨씬 더 중요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자크 베케르는 영화 전체를 끌고 나아가면서 저 멀리 보트가 도착하고, 뛰어가고, 카페에 도착하기까지를 찍으면서, 구태여 뛰어가는 거를 찍으면서, 그러니까 걸어가기에 지나치게 쓸 시간을 압축시키면서, 뛰게 만들면서,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황금투구>가 이미 1950년대에 데드 타임을 복원시키는 방식으로 영화를 진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전혀 서로 교류가 없었겠지만,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자크 베케르가, 그리고 그때 막 영화를 찍기 시작한 이탈리아에서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이 데드 타임의 시간을 복원해서 영화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때, 이 노동자 망다는 이 카페에서 인상주의 그림 같은 이 카페 안에 맨 마지막으로, 보마르셰의 희곡의 전통으로 다 짝이 지어져 있는 그곳에 노동자 망다가 아무 짝 없이 혼자 나타납니다. 노동자 망다. 이때 의도적으로 자크 베케르는 르누아르의 그림과 같은 구도 속에서 처음 이 망다가 등장했을 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세로 서 있었을 때, , 조금만 더 그림에 관심 있다면 그래서 그림을 예로 설명하는 것을 받아들여주신다면, 베케르는 명백하게 구스타프 쿠르베의 그림 속의 노동자를 연상시키는 모습의 자세로 서 있는 것으로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베케르는 명백하게 질문합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그림 속에서 쿠르베의 그림은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인상주의 그림 속에서 쿠르베는 어떻게 견딜 것인가. 인상주의 그림 속에서 노동자 망다는 어떻게 견딜 것인가. 말하자면 이것이 사회주의자 자크 베케르가 향수를 끌어안고, 벨 에포크를 재현하고, 1930년대의 좋았던 시절을 재현하고 있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이 자기 세상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실패했던 인민전선이 벨 에포크 속에서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를 1950년에 뒤돌아보면서, <황금투구>에서 그 세계를 우리들에게 재현하듯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인상주의 그림의 시대,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찬사를 바쳤던 시대. <황금투구>의 배경이 되었던 바로 그 시대. 파리 코뮌이 끝나고 인민전선이 막 시작할 것을 목전에 두었던 그 시대. 그 시대에 노동자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걸, 해방 이후 개인들이 중심이 되어갔던 프랑스 사회에서, 실존주의 열풍이 몰아치고 있는 속에서, 사무엘 베케트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쓰고 있었던 그 시간에,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악마 같은 여자>를 찍고 <공포의 보수>를 찍으면서 실존이라는 문제를 질문하고 있었을 때, 브레송이 저 멀리서 한 시골 사제의 독백을 냉정하게 찍어나가고 있었을 때, 자크 베케르는 인민전선과 벨 에포크를 떠올리면서 1930년대의 향수를 1950년대에 무언가 환기시켜 주고 싶어 했습니다. 명백하게, 자크 베케르의 좋았던 시절, 그 시절을 왜 벌써 잊어버리십니까! 라는 이 질문이 <황금투구>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이것을 의도적으로 우리들에게, 물론 몇 개의 구도를 놓고 당신께서는 지나치게 과장하시는 게 아닌지 라고 저한테 맞받아치고 싶은 분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자크 베케르는 망다가 얼마나 이상한 인물인지를. 레이몽을 통해서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망다가 나타나자 망다의 이름을 조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같이 일하던 사람이 망다라고 부르자, 지금 뭐라고 그랬지? 하자, , 물어보지 마, 그런 다음 그동안 뭘 했지? 물어보지 마, 지금은 뭘 하는 거지? 물어 보지 마. 영화에서 망다를, 우리는 그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인물인지를 삭제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계에 난데없이 도착한 사람처럼 우리들에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망다에 대한 정보를 거의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레이몽의 친구였다는 것만을 희미하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무엇보다 <황금투구>에는 1950년대의 프랑스 영화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목마르게 기다렸던, 그렇기 때문에 누벨바그가 도착하자마자 일제히 열광할 수 있었던 그 모던 월드가 없습니다. 명백하게 <황금투구>에는 모던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치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그 시대에 만들어지지 않은 것처럼 영화에서 말끔하게 지워버렸습니다. <황금투구>는 어떤 점에서는 그 스스로 소외된 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베케르의 <황금투구>라는 영화를, 우리는 종종 영화를 보면서 마치 음악을 즐기듯이 영화가 순식간에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황금투구>는 동시대의 영화들이 인물의 심리나 대사를 쫓아가는 것에 비한다면 철저하게 이 영화는 그런 데에 아무런 관심이 없거나 혹은 그런 것을 쫓아갈 생각도 하지 않거나, 말하자면 그런 것을 찍어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질문할 것입니다. <황금투구>는 뭘 찍고 있나요? <황금투구>의 동선은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운동이 <황금투구> 전체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시종일관 반복되는 이 세 가지는, 마시고 춤추고 싸우는 겁니다. 이 세 가지가 <황금투구> 전체를 이끌고 가는 힘입니다 


 

 황금투구 특별강연 05


<황금투구>에서 이 가브리엘 천사의 시퀀스는 그러한 방식으로, 한편으로는 인물들의 동선을 통해서 전혀 다른 두 개의 계급이 한 장소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이 부르주아 귀족들은 절대로 저 창고로 오지 못합니다. ? 그들은 벨 에포크 시대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벨 에포크 시대에만 그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퀀스에서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시퀀스를 시작하기 위해서 가브리엘 천사의 간판과 문 앞을 보여주는 마스터 숏이 등장하고 마차가 등장하는 숏이 등장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가브리엘 천사 카페를 떠나지만, 괴이하게도 이 귀족 부르주아들이 이 공간을 나가는 장면은 찍지 않았습니다. 그 공간은 어떤 점에서는 시간이 응결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는 겁니다. 이 공간이 하나 있고, 그런 다음 저쪽에 황폐한, 1950년대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 같은 표현주의 공간을 공존시키는 방식으로 자크 베케르는 그 공간을 마련해 놓습니다. 이 베케르의 영화에서, 두 가지 더 말하자면 베케르 방식을 보여준 것은 베케르 영화의 여자들은 어쩌면 여러분들의 지금의 안목으로는 이것이 다소 거슬리게 보일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여자들은, 베케르 여자들은 종종 빛과 함께 나타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크 베케르가 장 르누아르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에게서 배운 방법이기도 할 것입니다.

 

베케르의 미장센은 <황금투구>에서는 그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투구>에서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이 영화에 거울을 보는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악당 르카밖에 없습니다. 정작 여자들은 거울을 보지 않습니다. 마리가 거울을 보는 장면은 단 한 숏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르카는 계속해서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거울을 들여다볼 때, 자크 베케르의 미장센의 방식 중 하나입니다. 이 인물이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러한 방식으로 영화 속에서 표현하곤 합니다. 그러한 표현 중에 한 가지 더 인상적인 것은 이 영화의 제목인 <황금투구>라는 제목은 명백하게 마리의 머리 모양을 얘기하는 것일 겁니다. 이 머리모양 황금투구는 동시에 마리가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는 갑옷의 역할일 것입니다. 투구는 자기 몸을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것을 뒤집어 써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 이 투구를 벗을 때, 영화 속에서 이 머리를 풀어헤칠 때 그걸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마리가 진정 사랑한 사람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난히도 마리가 뒤에 빛이 후광처럼 비춰 보이면서 소프트 포커스 처리되어 시몬느 시뇨레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들은 대부분, 망다의 얼굴과 숏 리버스숏으로 보여주는 클로즈업의 순간들뿐인 것을 생각한다면, 말하자면 어떤, 자크 베케르가 영화에서 화면 사이즈를 쓰는 방법을 여러분들이 한편으로는 넘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 <황금투구>에서, 그것이 인물들 개개인을 다루는 자크 베케르의 진행방식이라면, 그리고 사실상 <황금투구>가 먹고, 마시고 싸우고 춤추는 방식의 영화라면, 사실은 이 영화 전체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를 요구한다면, <황금투구>의 연출의 핵심은, 망다가 출현한다고 얘기했었죠. 말하자면 이 세계에 갑자기 출현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 영화는 계속해서 망다와 마리를 붙이고 찢어놓기를 반복합니다. 망다와 마리는 서로 계속 붙으려고 애를 씁니다. 영화는 계속 그 둘을 찢어놓습니다. 단지 이것이 영화의 줄거리로 이 두 인물을 붙여놓고 찢어놓기를 반복한다면 이것은 매우 따분한 연출이었을 것입니다. 영화에서 우리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은 망다와 마리를 보여줄 때에 이 두 사람은 계속해서 투숏으로 같이 있고 싶어 합니다. 한 프레임 안에 같이 있고 싶어 합니다. , 두 사람의 마음일 것이며 이야기의 요구일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이 같이 있게 되면 그 다음, 영화는 두 사람을 숏 리버스숏으로 계속 찢어놓는 방식으로 연출을 진행합니다. 그 둘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 매우 애를 쓰고, 그래서 둘이 애를 써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 결정적인 이 두 사람의 동선을 보여주는 것은 맨 첫 장면 카페 장면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저는 어쩌면 <황금투구>에서 가장 이 영화의 정수는, 마치 히치콕의 <사이코>가 어쩌면 그 샤워룸까지만 보면 다 봤다고 얘기할 수도 있죠. 다소 과격하게 얘기하자면. 그 샤워룸까지만 보면 사실상 <사이코>의 정수는 다 본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나머지는 그냥 이야기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붙어있는 굉장히 긴 에필로그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똑같이 <황금투구>는 앞의 카페 장면과 천사 가브리엘의 레스토랑 장면까지 한 시간을 보고 나면 나머지는 에필로그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앞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망다가 처음 출현을 합니다. 다시 한 번 환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망다를 처음 황금투구 마리가 보는 순간은 망다는 서 있고 황금투구 마리는 춤을 추면서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계속 돌아보면서 서 있는 망다를 보고, 보고, 보는 방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의 교환으로 영화를 진행합니다. , 우리들의 기대감은 뭡니까? 이 숏, 말하자면 숏-리버스숏. 한 쪽이 또 한 쪽을 보고, 한 쪽의 pov가 저 쪽의 pov로 계속 반복하면서 오갔을 때, 우리들의 기대감은 뭡니까? 이 두 개의 찢어진 숏-리버스 숏이 투숏으로, 두 사람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담는 투숏이 되는 것이 유일한 기대감일 것입니다. 이 유일한 기대감을 성립시키는 방법은 딱 한 가지뿐입니다. 두 사람이 같이 춤추는 것입니다. 이때 두 사람은 우리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라도 하듯이 두 사람은 가서 옆 자리에 앉은 망다에게 황금투구 마리가 가운데 앉아 있는 자기의 기둥서방을 무시하고, 말로 무시하고, 말로 지워버리고, 말로 페이드시켜버리면서 이 목수 망다에게 얘기합니다. ‘목수는 춤도 잘 추나요?’ 그러곤 둘이 나가서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춤을 추기 시작할 때에 우리들에게 자크 베케르의 연출에 대해서 탄복할 수밖에 없는 순간은, 처음에 두 사람을 어떻게 찢었습니까? 춤추는 마리와 바라보는 망다로 두 사람 사이를 찢었습니다. 두 사람이 춤추기 시작하면 마침내 투 샷으로 하나의 프레임에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계속 보고 싶어 할 때, 이번에는 춤추고 있는 이 두 사람과, 이 자리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으로 투숏이 이어지는 롱테이크의 숏을 조각조각 내버리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크 베케르는 이것을 드라마에 의지하는 대신, 시각적 구조 속에서,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시간을 계속 쪼개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제가 이 영화는 자크 베케르가 무엇의 미학으로 찍었다고 이야기했습니까? 데드 타임의 미학으로 찍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데드 타임의 미학으로 찍었다고 했을 때 데드 타임의 핵심은, 말하자면 그 숏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숏을 길게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그 숏을 길게 보여주는 방식에서 우리가 계속 보고 싶어 하는 그 장면을 조각조각 내버릴 때, 사실상 그들의 행복해야할 그 시간을 생략의 방식이라는 설명 대신, 영화는 그 시간을 잘라내는 방식으로 얘기를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단두대가 떨어져서 망다의 목을 자르고 나자, 추억에 잠기는 마리의 회상 속에서 망다와 마리가 춤추는 장면을, 그 간절한 소망이었던 그 장면을, 그래서 맨 마지막 숏에서 화면을 끊지 않고 롱 테이크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을 롱테이크로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자크 베케르는 이 두 사람의 동선을 어떻게 했습니까? 카메라 앞에서 저쪽 멀리로 계속 멀어져가는 것으로 찍었습니다. 롱테이크로 찍기는 했지만. 그래서 조각조각난 컷을 여기서 마치 복원시키기라도 하듯이, 더 이상 여기에서는 자를 수 없다는 듯이. ? 이것은 자크 베케르의 세계가 아니라 마리의 세계이니까, 마리의 세계를 자기가 손댈 수 없다는 도덕적 태도로 이것은 내가 가위질 할 수 없어 하고 내버려 두지만,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시간의 힘으로 그 두 사람의 기억이 지워질 터이니, 그 두 사람은 우리들의 시각 속에서, 시야 속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방식으로 그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 말하자면 이 마지막 장면의 거리감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황금투구 특별강연 06 

 

무엇보다도 <황금투구>는 이러한 것들의 시각적 표현도 있지만, 그러나 제가 아까 반복해서 한 번 더 얘기하겠다고 얘기했던 것은 배우의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제 생각에 장 르누아르의 가장 위대한 점은 통상적으로 얘기하는 롱테이크의 연출이나 미장센이나 딥 포커스 촬영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론에 놓여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아마도 그 지점에서 자크 베케르는 장 르누아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왔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저는 장 르누아르와 자크 베케르가 얼마나 닮았냐 대신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가를 설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얘기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만일 장 르누아르 영화를 많이 본 관객분들이라면 장 르누아르의 많은 배우들이 자크 베케르의 영화에 나온다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두 사람의 영화는 상당수의 배우가 서로 겹치고 있습니다. 이때, 장 르누아르는 연기를 시키면서 아마 이 얘기가 오늘 가장 중요한 얘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장 르누아르는 연기를 시키면서 무엇보다도 배우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 했습니다. 아마 이게 장 르누아르가 아버지 오귀스트 르누아르에게서 배운 방법일 것입니다. 장 르누아르는 오귀스트 르누아르에게서 뭘 배웠습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델들을 그리고 있는 과정을 배웠습니다.” , 구도를 배웠거나 색깔을 배웠거나, 어떻게 그리느냐, 어떻게 구도를 잡느냐를 배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있는 그 과정을 배웠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과정 동안에 모델과 아버지 오귀스트가 서로 감정적으로 교환하면서 그 감정적으로 느꼈던 것을 그림 속에 담는 그 인상의 방법을 배웠다고 얘기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장 르누아르의 연기 방법은 배우를 인물 안에 넣은 다음, 그 안에서 다시 배우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배우에 대한 연기 지도를 밀고 나아갔습니다. 일단 배우를 인물 속에 집어넣고 나면, 그 인물 속에서 이 배우가 자기의 배우의 어떤 흔적들을 드러낼 때 그때부터 배우의 초상화를 찍어 나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베케르는 그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자크 베케르의 영화가 장 르누아르의 영화와 결별하게 만든 어떤 대목일 것입니다.

 

베케르는 인물 안에서 배우를 다루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배우가 우선이 아니라 인물이 우선이었습니다. , 장 르누아르의 연기 방법에 대해서 정식화시켜놓은 비평을 읽다가 그 말 앞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습니다. 장 르누아르의 연기를 만드는 방법은, 이 말이 조금 무섭습니다. 장 르누아르는 무엇보다 배우를 인물 안에서 기형으로 만들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인물 안에 집어넣은 다음 어떤 부분을 막 잘라내기 시작하는 거죠. 우겨 넣기 시작하는 거죠. 그럼 배우가 어떤 부분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할 때 그럼 기형이 된 배우를 찍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물론 영화 속에서 영화가 겉으로 드러난 것은, 장 르누아르 영화가 따뜻하고, 관대하게 보이고 하지만 실제로 그 방법을 정식화시켰을 때의 정식화의 개념은 매우 끔찍한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이 방법과 완전히 반대 방식으로 배우에게 연기를 지도한 사람은, 연기를 지도한 적이 없죠. 그냥 배우에게, 그냥 그것이 되라고 요구했을 뿐이죠. 그게 브레송의 모델 방법론이었습니다.

 

자크 베케르는 자기 스승의 방법을 완전히 반대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베케르는 자기 배우의 연기의 방식을, 인물은 항상 하나의 이상, idée, idea, 어떤 이데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인물의 어떤 이데아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것이 자크 베케르로 하여금 제가 아까 얘기했었죠. 그 이유는 자크 베케르의 그 이유는 바로, 아까 얘기했었던, , 배우의 방법론을 정식화시킬 수 있는 베케르의 유일한 근거는 그 배우의 연기는 직업으로서의, 그 배우 인물의 직업으로서의 제스처를 통해서만 나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베케르가 이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적은 없습니다. 혹은 정식화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케르가 만든 직업으로서의 제스처에 대해서 베케르는 연기의 리얼리티는 배우가 맡은 인물의 직업의 제스처를 어떻게 살리느냐를 통해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하워드 혹스가 말하는 인물의 전문가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거나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혹스는 인물을 투명화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베케르는 철저하게 이 점에서 자기가 믿었던, 그러니까 인물은, 모든 인물은 자기가 서있는 토대로부터 나온다고 믿었던 생각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적어도 이것이 제가 자크 베케르 영화를 보면서 발견했던 것이고, 자크 베케르의 연기론에 대한 제 가설입니다. 즉 자크 베케르는 인물은 자기에게 주어진 계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아까 얘기드렸던 대로 브레히트의 연기 방법론과 자크 베케르의 연기 방법론의 유사점이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연기를 하기 위해서 저는 <황금투구>를 여러분들이 한 번 더 보시면,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황금투구>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1950년대 프랑스 영화를 보았던 제 경험은 말이 많다는 겁니다. 말이 굉장히 많죠. 아마도 그것이 프랑수아 트뤼포를 분노하게 만들었겠죠. 대사의 영화. 혹은 그 수많은 아름다운 대사들. <황금투구>에서 망다를 연기한 이 세르주 레지아니는 1시간 36분 동안 고작 76번 대사하는 게 전부입니다. 극단적으로 대사가 적습니다. 대부분 제스처로 자기를 연기합니다. 말하자면, 이 시기의 자크 베케르의 영화에 비하면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조차 수다스럽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황금투구 특별강연 07

 

<황금투구>는 영화사적으로 저는 이렇게도 한 번 바꿔서 설명해보고 싶습니다. 명백하게 <게임의 규칙>에서 시작한 이 <황금투구>는 동시에 마르셀 카르네의 <태양은 떠오른다>로 끝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39<게임의 규칙>이 나왔던 해에 또 한 편의 위대한 영화, <태양은 떠오른다>는 앙드레 바쟁이 이 영화가 처음 등장했었을 때 <게임의 규칙>과 겨룰 만한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장 가뱅이 주연인 영화. 영화가 시작하면 총소리가 들리고 이 총소리가 들리는 곳은 어떤 아파트. 아파트라고 그러지만 지금의 한국식 아파트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프랑스 영화에서 보는 그런 하숙집, 옥상방 맨 위에 방입니다. 총소리가 들리고 나자 경찰들이 이 집을 둘러싸기 시작합니다. 총을 쏜 장 가뱅은 자기가 왜 이런 살인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플래시백으로 영화가 시작합니다. 영화는 계속 설득하고 있는 경찰들과, 그 다음 이 플래시백이 계속 오가면서 이어집니다. 맨 마지막은 장 가뱅의 자살로 끝납니다.

 

만일, <태양은 떠오른다>가 없었다면,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도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플래시백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이 영화 <태양은 떠오른다>가 옥상방에서 맨 마지막에 자살하고 있는, 그리고 아래쪽에 경찰들이 둘러싸고 있는 이 상황에서 끝나는 이야기라면 자크 베케르의 <황금투구>는 길로틴에 끌려가는 이 망다를 내려다보는 황금투구 마리의 시선으로, 영화가 뒤집힌 시선의 방식으로 마지막을 끝냈습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에 의하면, 표현을 따르면, <황금투구>의 마지막 장면은 모든 영화들이 엔딩을 풀어나갈 때에 곤궁에 처했었을 때에, 어떻게 그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마지막 장면이라고까지 얘기했습니다. 명백하게, 자크 베케르가 이 세르주 레지아니가, 망다가 끌려 나와서 길로틴까지 가는 장면을 찍었을 때에, 벨 에포크 시대로부터 시작해서 표현주의 영화의 두 개의 축에서, 그 속에 있는 사실주의의 흔적을 쫓아갔었던 이 영화가 맨 마지막 순간을 찍었을 때에 자크 베케르의 방법은 어딘가 명백하게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어떤 그림자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자크 베케르는 냉정하게 찍었고 어떤 감상도 없이 어떤 망설임도 없이 그냥 마치 <전화의 저편>의 마지막이 진행되기라도 한다는 듯이, 마치 이 영화가 이제까지와는 상관없이 로셀리니의 영화이기라도 한 것처럼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고 이 영화는 마지막을 끝냈습니다.

 

자크 베케르는 1945년 이후, 그러니까 해방 이후, 프랑스 영화 속에서 프랑스 사회라는 것을 신화화시키고 어떤 판타지 속에서 벨 에포크라는 시간을 돌아보고 환기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물론 이 작업을 한 것은 자크 베케르 한 사람은 아닙니다. 만일 한 사람 더 이야기해야 한다면, 자크 베케르와 같이 시작했고, 때 이른 자크 베케르와 달리 누벨바그 감독들과 거의 동시대의 시간 동안 그 같은 작업을 계속 했던 또 한 사람의 이름은 장 피에르 멜빌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이야기해야 할 것은 장 피에르 멜빌이 아니라 자크 베케르의 세계이고, 이 자크 베케르가 <황금투구>에서 이루어낸 프랑스 영화의 이상한 사람, 혹은 이상한 프랑스 영화사의 흐름은 이러한 방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여러분들과 나눈 이상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