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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루비치 특별전' 특별강연 : 허문영 프로그램디렉터 2016-03-05(토)  - 시네마테크

에른스트 루비치 2-1


3/5() <메리 위도우>


강연: 허문영 프로그램디렉터

장소: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전체 강연중 일부만 요약되어있습니다.)


 

어떤 진지한 숭고, 사회적인 윤리 의식 혹은 영화 형식에 대한 치열한 탐구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놀자고 만든 영화입니다. 동시에 놀랐던 것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만든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세상에 재미있는 영화가 오죽 많겠습니까. 극장에 걸린 천만영화도 수두룩하고 다 재미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루비치 영화의 재미라는 것은 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루비치 영화가 주는 즐거움에 특별함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만, 사실은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재미나 유머 같은 것은 제일 이해시키기가 어려운 것일 겁니다. ‘밀란 쿤데라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규범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은 유머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규범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유머를 던졌을 때 그래서 뭐?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물어보면 유머를 구사한 사람은 할 말이 없습니다. 루비치 영화는 규범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러움을 줄 만한 영화 일 겁니다. 루비치의 이런 유머는 그의 영화 인생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고 봐도 좋습니다. 물론 사이사이에 정말 루비치 답지 않은 진지한 영화 혹은 비극적 영화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1929년에 만든 그의 마지막 유성영화인 <영원한 사랑>은 루비치 영화답지 않게 매우 비극적이고 유머는 없으며, 아주 침울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내가 죽인 남자>라는 영화는 1차 대전 끝나고 나서 자기가 전쟁 때 살인을 했다는 그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병사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비극적이고 침울한 영화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할 것 인가. 루비치가 진정으로 이 영화들을 자기의 정전으로 생각하고 있는가는 약간 회의할 수 있습니다.

 

루비치는 환대 받지 못한 감독입니다. 환대 받지 못했다는 것은 대중들로부터 소위 영화 전문가들로부터 환대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오스카상을 받지 못 했습니다. 3번의 후보에 오른 적은 있지만 29년에 첫 오스카상이 만들어진 이례로 수많은 걸작들이 만들어진 30년대에도 한 번도 받지 못했고, 결국 그가 받은 것은 죽고 나서 받았던 일종의 예술공헌상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작품성, 질이라는 것에 기준을 두고 선정하는 미국의 제일 대표적인 영화평론가 대상인 뉴욕 비평가 협회상도 한 번도 받지 못 했습니다. 루비치라는 사람은 뭔가 진지한 영화 전문가들에게는 그냥 오락거리였을 뿐입니다. 상대적으로 할리우드 고전기에 많은 감독들이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엔터테이너라고 생각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성취를 이루어내서 영화 전문가들로부터 마침내 승인을 받는 경우는 사실 흔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존 포드같은 경우 아카데미상을 5번 이상 받았죠. 존 포드도 당대의 상업적인 감독이긴 했습니다만, 존 포드에 비하면 루비치가 받은 당대 전문가들로부터의 평가는 과혹한 겁니다. 핵심은 루비치의 영화는 너무 가볍고, 웃기 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섹스에만 몰두한다. 쓸데없는 농담, 겉치레 외모 이런 것에만 몰두하는 얄팍한 코미디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루비치는 아직까지도 단행본 분량의 루비치 연구서가 단 한 권도 없는, 단 한 권도 없다는 건 과장입니다. 왜냐하면 1968년에 루비치 터치라는 제목의 책이 나오긴 했습니다. 그 책을 쓴 저자는 영화사상 영화 비평계나 학회에서 존중받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좀 마이너 한 작업이었고, 그토록 많은 위대한 비평가들이나 훌륭한 영화학자들이 루비치에 대해서 뭔가 한 권 분량의 연구서를 낸 적이 없다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루비치는 어떻게 보면 당대에서도 전문가들로부터 외면당했지만 지금까지도 전문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이 외면은 단순히 비평가들이나 학자들이 몰라보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그것보다 루비치는 다루기가 가장 까다로운 루비치의 영화를 진지하게 한 권 분량의 문서로 다루기에는 굉장히 까다로운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에른스트 루비치 2-2

 

루비치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프랑수와 트뤼포입니다프랑수와 트뤼포가 루비치에 대해서 특별한 평가를 내린 적이 있습니다트뤼포가 했던 말 중에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루비치 영화의 플롯은 절대 종이 위에서 작성될 수 없다또한 루비치 영화의 플롯은 영화를 보고 나서 재작성 될 수 없다아마도 당신이 한편의 루비치 영화를6번 본다고 해도 한 시간만 지나면 그 영화의 플롯을 작성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루비치의 영화의 플롯은 오직 당신이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에만 구성된다이런 식으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말은 복잡하고 거창한 것 같지만 간단합니다루비치 영화는 보고 나면 영화 자체가 증발해 버리는 느낌입니다다르게 말하면 루비치 영화는 기체 같은 겁니다어떤 영화를 보고나면캐릭터장면 혹은 심각한 주제아주 진중한 대사들강렬한 화면 등이 기억에 남는데루비치 영화는 그냥 사라져버리는 느낌입니다그런데 이것이 바로 루비치가 원했던 것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자기의 작품이 세상에 오래도록 남아서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 대우받는 것 보다는 본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쾌락희열을 주고 사라지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그런데 왜 그런 루비치가 <영원한 사랑><내가 죽인 남자>와 같은 심각하고 침울한 영화를 만들었는가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코미디 작가들이 만든 세상으로부터의 평화 무시 같은 것이 있습니다코미디를 만드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코미디가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세상에 말하고 싶게 만드는 어떤 상식과 편견 같은 것이 있습니다아마도 그에 대한 반작용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만든 나도 진지한 영화를 만들 수 있어!‘라고 해서 전혀 루비치스럽지 않게 만든 두 편의 영화,사실 저는 <모퉁이 상점>과 같은 후기작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모퉁이 상점>도 코미디고 로맨스이긴 하지만 이상한 침울함 같은 게 있습니다루비치 답지 않은 어떤 끈적끈적한 감정의 흔적 같은 것이 있습니다이런 영화를 기가 막히게 잘 만듭니다루비치 좀 잡기 힘든 사람인 것 같습니다이 사람의 영화의 분류는 이번에 내세운 제목으로 말하면 사랑과 웃음의 마스터인데 사랑이란 표현은 사실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루비치는 섹스와 유머의 마스터라고 할 수 입습니다섹스 장면을 전혀 그리지 않습니다만 사랑이 아니라 섹스라고 말하는 이유는루비치는 사랑의 감정정념을 다루지 않습니다.

 

루비치의 영화를 보신 분들은 공통적으로 느끼실 수 있는 것이연인은 눈이 맞으면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오늘 본<메리 위도우>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 언제 이루어집니까보는 순간 사랑에 빠집니다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기 때문에 사랑을 다룰 필요가 없습니다그다음 문제는 뭡니까결국은 섹스를 하느냐 마느냐입니다여기서는 결혼을 하느냐 섹스를 하느냐 선택의 문제로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선택에 관련된 갈등이 루비치 영화를 이끌어가는 소재들입니다루비치 영화는 사랑의 감정을 다루지 않고 표현으로서의 섹스만 다룬다는 것직접 그리지 않더라도 루비치 영화의 섹스에 대한 암시는 넘칠 만큼 많고 놀랄 정도입니다우리가 영화에 나오는 중의적인 농담을 일일이 다 알아듣기 힘들어서 그렇긴 합니다만 가끔 다시 볼 때는 이전에 느끼지 못 했던 굉장히 야한 농담들끈적끈적한 제안들이 넘쳐납니다그리고 유머웃음루비치의 유머가 왜 다루기 까다로운가 하면유머 자체가 까다롭기 때문입니다유머는 전적으로 표층 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진지하게 다룬다는 게 어렵습니다비평가들이 지금까지 웃음을 다루는 방식이 늘 웃음은 다루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웃음을 이야기합니다웃음을 해부해석했다기보다 그것이 얼마나 까다로운가다루기가 힘든가에 대해서 주로 쓰게 됩니다루비치란 사람은 심층적인 것에 대해서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관심이 없다기보다도 심층에 어떤 것이 자기 영화를 오염시키는 것에 대해서 필사적으로 완강하게 저항하는 상황을 만든 사람인 것 같습니다그 점이 저는 루비치 영화의 특별한 재미인 것 같습니다한국에서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를 떠올려보시면 바로 동의하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모든 코미디는 코미디 스스로 뭔가 자기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 다른 데에서 의미를 끌어들입니다가족을 끌어들이고 가끔 민족을 끌어들이고 혹은 인간의 동정인류애 같은 규범적 가치 혹은 긍정적 의미의 세속적 가치 등을 자기 코미디에 끌어들입니다하나같이 빼놓지 않고 넣습니다저는 무한도전을 좋아하는데무한도전을 보면 그런 짓을 안 하기 때문에 좋아합니다쫄쫄이 옷을 입고 목욕탕 물을 퍼내는 일은 어떤 세속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정말 소모적이고 낭비적인 행위입니다이를테면 루비치의 유머는 쫄쫄이 입은 무한도전 멤버가 목욕탕 물을 퍼내는 것과 마찬가지의 완전히 잉여적인 어떤 것을 꿈꿀 수 있습니다부분적으로 언급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루비치라는 사람의 전기적인 사실이 아니라 루비치라는 사람의 어떤 특별한 점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메리 위도우 1

루비치 영화의 모든 남자들은 등장하기만 하면 모든 여자들이 환호하죠. <메리 위도우>에서도 난리가 나죠. 마을의 모든 여성들이 비명을 지르고, 맥심이라는 카페에 나타나니까 모든 맥심걸들이 환호하고 자지러지고 합니다. 재미있는 유머 중에 섹스에 관련된 유머가 많기는 하지만 심지어 소냐라는 과부의 하녀들도 다닐로의 방에 한 번씩은 들어갔습니다. 정확히 주소와 층수, , 호수까지 알고 있는 것으로 봐서 한 번씩은 다 가본 겁니다. 맥심의 모든 여자들과 다 잤습니다. 어마어마한 남성적 매력으로 가득 찬 주인공. 이 과장은 곳곳에 다 나옵니다. 모든 루비치 코미디에 나오는 장면이라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들고양이>라는 작품에서 한 장교가 다른 부대로 옮기게 되자 마을에 있던 천 명 정도 되는 여인들이 몰려나와 통곡을 합니다. 그러다 나중에 햐얀 손수건을 흔들어줍니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에는 500명 정도 되는 아기들이 아빠 하며 깃발을 흔들며 달려 나옵니다. 말도 안 되는 유머이지만 루비치 영화의 약속 같은 겁니다. 루비치 영화에는 멋진 남자가 나오면 무조건 여자는 반하게 되어있다는 일종의 약속입니다. 루비치 관련한 연구서는 없지만 평전은 있습니다. 스콧 아이만이라는 사람이 쓴 평전이 있습니다. 루비치는 되게 영리하고 자신감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콤플렉스가 심했다. 콤플렉스을 보완하기 위한 판타지가 영화에 투영되어 있다는 평가를 인용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식의 분석은 재미가 없습니다. 콤플렉스라는 것이 창작과 연관될 수는 있겠죠. 근데 세상에는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사람들이 다 훌륭한 창작품을 내지는 않습니다. 자기만의 콤플렉스는 누구나 있겠죠. 그 콤플렉스와 창작의 질과는 아무련 관련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방향을 만들어 주는 정도겠죠


소냐가 맥심의 특실에서 다닐로와 만날을 때 나폴레옹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다. 다만 일찍 공격한 것이 문제였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으로 루비치가 스스로에 대한 자기 유머인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의 키가 뒤져보니 설이 여러 가지인데 제일 작게는 157cm~165cm 사이라고 합니다. 대충 루비치와 키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루비치는 자기 신체 조건을 가지고도 이렇게 은밀한 유머를 구사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광경 자체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루비치의 특별한 점 한 가지는 루비치의 영화적 국적입니다. 루비치의 영화적 국적은 사실은 약간 애매한 문제입니다. 공식적으로는 독일 국적을 가지고 있다가 미국으로 이주해서 미국인이 되긴 했습니다만, 영화적 국적이 굉장히 애매합니다. 많은 연구가들이 프리츠 랑은 독일 감독이지만 루비치는 가장 덜 독일적인 감독이라고 했습니다. 프리츠 랑과 루비치의 공통점은 둘 다 독일 표현주의의 원산인 우파 스튜디오 출신으로, 시기는 다르지만 할리우드로 가서 자기 영화 인생 목록의 반 이상을 채운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츠 랑은 독일 감독이고 루비치는 미국 감독이다.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루비치는 독일의 유일한 미국인이다 이런식 으로 표현합니다. 굉장히 이상한 표현이죠.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영화사의 황금기 고전기에 보면 자기 국가를 대표하는 감독들이 한 사람씩 있습니다. 이를테면, 프랑스는 장 르누아르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존 포드입니다, 일본은 오즈 야스지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미조구치 겐지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독일은 프리츠 랑입니다. 그런데 프리츠 랑과 비교하면 루비치는 전혀 독일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독일적이지 않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생성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흔하게 하는 오해는 시정하고 갈 필요가 있습니다. 독일 표현주의라고 하면 보통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나 표현주의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1919년에 만들어진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같은 영화입니다. 혹은 F.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 프리츠 랑의 다른 영화인 <마부제 박사>라고도 합니다. 이런 영화들은 어둡고, 음침하고 기괴하고 삭막하며 건조합니다. 그것이 독일 표현주의의 시각적인 어떤 컨벤션인 것처럼 모두들 알 수밖에 없습니다. 




메리 위도우 2


그렇다면 루비치는 우파 스튜디오의 이단아인가 혹은 독일 표현주의의 이단아인가? 하고 물어본다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메리 위도우>에서도 보셨듯이 루비치의 어마어마한 군중심리들 사실은 필요 없는 저게 꼭 필요한가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군중들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대사관에서 두 사람이 춤출 때 군중들이 쏟아져 나와 같이 춤을 춥니다. 사실은 이야기 전개상 전혀 필요 없는 부분이죠. 둘이서 춤을 추며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면 되는 건데 굳이 사람을 때려넣고 거대한 움직임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우파 스튜디오의 방식입니다. 고대한 군중을 동원해서 그것이 빚어내는 어떤 활동성, 혹은 집단주의적인 모습이 우파 스튜디오의 단골 기법이기도 했고, 다른 하나는 무대 활용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무대, 공간은 전부 세트로 만들어진 겁니다. 나라 자체도 마쇼비네라는 가상의 국가이지만 무대를 완전히 가상의 어떤 거대한 세트로 꾸민 것이 우파 스튜디오의 기법입니다. 분명히 F.W. 무르나우는 우파의 아들입니다. 다만 독일 표현주의 주류가 어둠, 음모, 정신병, 광적인 집착, 살인 이런 소재에 집착했던 반면에 루비치는 우파 스튜디오의 시각적인 기법들을 코미디에 사용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 독일 표현주의의 두 아버지가 있다고 하는데, 한 아버지는 막스 라인하르트라는 베를린 국립극장의 책임자였던 이 사람은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활달하고 몽상가적인 어떤 연극 활동을 오래 했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제자이기도 했던 프리츠 랑, F. W. 무르나우, 에른스트 루비치이며, 나중에 워터 플레닌저 같은 감독까지 포함됩니다. 루비치가 가지고 있는 거대하고 과장된 유머 세계는 독일의 표현주의의 돌연변이라거나 이단이라기 보가는 독일 표현주의가 낳은 또 다른 변형이라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프랑스 영화가 상대적으로 프랑스의 평단과 1930년대 프랑스 영화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약간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독일 영화의 1910년대 말부터 무성영화의 마지막 시기까지의 독일 영화는 굉장히 훌륭합니다. 그리고 저는 미국 영화의 고전기를 만들어 낸 것은 프랑스 영화가 아니라 두 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아버지가 D.W. 그리피스죠. 그리고 다른 아버지는 독일 표현주의입니다. 독일 표현주의에서 받은 어떤 풍부한 기법과 영감이 미국 고전기 영화를 만들어냅니다. 실제로 존 포드는 1925년에 F.W. 무르나우가 만든 <선라이즈>를 보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향후 10년 동안 이렇게 훌륭한 영화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존 포드를 충격에 빠뜨렸고, 당대 많은 할리우드 감독들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루비치 같은 경우는 직접 같이 시나리오 작업을 한 빌리 와일더조지 쿠커이외에도 프레스톤 스토지스레오 맥커리같은 사람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앤드류 세레스는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영향력이라는 기준으로만 세계 영화사의 거장을 뽑는다면 두 사람이다. 그게 D. W. 그리피스고 에른스트 루비치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영향이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스타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영향이 과소평가될 수는 없습니다.

 

인형 1


루비치의 손길이라는 것은 사실 루비치 이후의 미국 영화의 관능성을 더 만들어낸 절대적인 공헌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루비치가 가지고 있는 영화적 국적이라는 문제가 사소하게 흥미롭기도 한 이유는 루비치는 한 번도 영화를 찍으면서 극중 장소를 미국으로 한 적이 없습니다. 파리이거나 런던이거나 비엔나, 몬테 카를로, <메리 위도우>처럼 마쇼비아라는 가상의 왕국을 만들거나.. 한 번도 미국을 무대로 삼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독일 출신이기 때문에 독일에 대한 향수가 있어서는 전혀 아닙니다. 실제로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영화의 이야기는 어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냥 찍으면 됩니다. <모퉁이 상점>같은 굉장히 미국적인 소재를 가지고도 굳이 루비치는 그 장소를 헝가리라고 표시합니다. 뭔가 루비치에게 필요 했던 건 미국이 아닌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든 상관없었던 것 같습니다. , 루비치 영화의 장소라는 건 현존하는 로컬리티와 무관한 장소라는 겁니다. 로컬리티의 리얼리즘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장소를 만들고자 했던 겁니다. 그래서 루비치 영화는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루비치 영화는 무국적 시노비즘의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국적이 없습니다. 루비치 영화의 국적을 물으면 없다고 하는 게 맞습니다. 루비치 랜드라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루비치가 했던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나는 파리에도 가봤고 파라마운트 스튜디오가 만들어낸 생뜨 파리에도 가봤는데, 나는 생뜨 파리가 훨씬 좋더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실제적인 장소로서의 파리, 비엔나, 런던은 그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뭔가 그의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는 그의 인물들이 활동하기에 적합한 공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로칼리티나 역사적 사건, 사회적 진실, 윤리 같은 것이 끼어들 틈이 없는 그런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자기만의 세계, 장소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위대한 감독들 영화를 보면 어떤 장소에서 찍더라도 자기만의 소우주를 만들죠. 루비치 월드의 특징은 모든 것이 세트라는 겁니다. 오즈는 일본의 현대식 가옥이 매우 중요했고, 존 포드는 모뉴먼트 밸리의 장소성이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루비치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루비치에게는 모든 것이 세트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리얼리즘에 대한 근본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비평가들이 루비치를 무시하게 된 하나의 계기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루비치의 장소의 무대화라는 것이야말로 독일의 표현주의의 중요한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영화적 무국적자라는 점이 세계 영화사에서 이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렇게까지 역사적 혹은 지리적 특정성에 대해서 철저히 외면하는 이런 감독을 찾아보기 힘들고, 또 루비치의 특별한 점이 프로듀서를 겸했습니다. 물론 자기 제작사를 가지고 있는 감독도 많이 있었습니다만, 루비치는 영화를 만들 때 스스로 프로듀서의 자세로 만들기도 했었고 그것이 인정받아 나중에 파라마운트 제작 부문 사장까지 맡게 됩니다


고전기의 모든 감독들이 자기가 예술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루비치는 프로듀서의 자리와 감독의 자리를 균점하면서 영화를 만든 굉장히 드문 사람입니다. 그런 경우는 보통 프로듀서라는 자리의 구속력이 굉장히 강해서 창의성이라는 것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신기하게도 루비치의 경우는 끝내 자신의 스타일, 자신만의 터치를 잃지 않았던 희귀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이상한 사람인 거죠. 독일 표현주의에서 미국의 고전주의로 이행을 했는데, 실제로 미국 고전주의의 토대를 만들기도 했었고, 감독과 프로듀서라는 양다리도 걸쳤고, 무성과 유성영화, 이 다리들을 다 건너면서도 실패하지 않은 드문 사람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