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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루비치 특별전' 특별강연 : 정한석 영화평론가 2016-02-20(토)  - 시네마테크


에른스트 루비치


2/20() <낙원에서의 곤경>

                                                                       

                                                                        *강연: 정한석 영화평론가

                                                                          *장소: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전체 강연중 일부만 요약되어있습니다.)

(에른스트 루비치 감독 세계 중 '루비치 터치'에 관한 내용)




루비치 터치라는 말이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떤 영화사가가 말하기를 루비치 터치는 그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홍보담당자가 만든 말이라고도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능력 좋은 홍보담당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1933년에 루비치가 쓴 짧은 에세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재인용된 글을 읽었는데, 거기에는 루비치가 했다는 말이 적혀있습니다. ‘나는 거듭해서 질문했다. 영화에 새겨 넣는 그 터치들을 내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늘 거듭해서 질문했다고 적어놨다고 합니다. 루비치 자신이 루비치 터치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뭔가 터치라고 얘기할 수 있을 만한 감각적인 의식과 같은 것들을 스스로도 인지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루비치 터치라는 말을 좀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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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의 영화를 보면 서스펜스의 제왕이라고 합니다. 샘 페킨파의 영화를 보면 폭력의 피카소라고 이야기를 하죠. 타란티노의 영화를 보면 헤모글로빈의 철학자라고,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를 보면 황혼의 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런 예들과 루비치 터치는 제 생각에는 완전히 다른 경우입니다. 앞에 들었던 예들은 전적으로 명사로서의 명명이고 정의가 됩니다. 그들이 그렇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정의하고 싶은 거죠. 하지만 루비치 터치는 정의가 안 되기 때문에 생겨난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에게 뭔가 정서적인 효과를 일으켰는데 그것을 일으킨 동인이 뭔지 스스로 물었을 때 그게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터치라는 말로 굉장히 모호하고 애매한 육체적인 개념으로 비유해서 가까스로 만들어내게 됐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제 식대로 말을 붙이자면 루비치 터치는 명사형이긴 합니다만 정의나 명명이 아니라 명사형 감탄사로 받아들이시는 게 훨씬 더 맞겠다는 생각입니다. ‘, 루비치 터치라고 느끼시는 게 훨씬 맞습니다. 감탄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하고 싶은 방법은 감탄사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하고 해명하려는 대신 루비치 영화의 어떤 순간이나 흐름들을 우리가 경험할 때 루비치 터치라는 용어를 떠올리거나 사용하고 싶은지에 대한 저의 경험치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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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치 터치의 경험 첫 번째 농담의 터치입니다. 다시 빌리 와일더의 말을 빌리자면, 와일더는 루비치 터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루비치 터치의 정체는 슈퍼 조크의 우아한 사용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루비치 영화 속에서 어떤 농담을 만나게 되고 그 농담으로써 만족을 느끼려는 찰나에 그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상위의 농담을 기대치 않은 순간에 덧붙여서 우리를 이끌고 가는 그 우아한 슈퍼조크의 사용이 바로 루비치 터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와일더가 단지 대사나 말에 한정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을 말의 터치로 조금 더 국한시켜서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익살스러운 대사적인 재능을 가리킨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제가 재밌어하는 두 개의 대사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후반기 영화 <천국은 기다려준다>에서 노년의 신사가 나이가 지긋해서 죽어서 지옥문 앞에 섰습니다. 마왕 혹은 저승의 심사관이라고 할까요. 마왕이 지옥문 앞에서 이 사람에게 정중하게 물어봅니다. 당신이 언제 죽었는지 알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이 신사가 말을 하기를 사실은 제가 굉장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잠에서 깼죠. 그런데 제 주위에 가족들이 온통 모여 있고 그들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제 장점만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죽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우리는 그 사람이 못 들으면 남의 흉을 보죠. 장례식이기 때문에 낮은 목소리로 그 사람의 장점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 정말 죽었다는 걸 느꼈다는 겁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나요? 이 말 자체가 굉장히 위트 있지 않습니까?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된 것을 이것보다 더 위트 있게 설명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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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만 더 들어 보겠습니다. 이 대사는 방금 보셨던 <낙원에서의 곤경>에서 나온 대사입니다. 콜레트 부인이 자기를 연모하는 신사 필리바에게 하는 말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아주 짧은 말이지만 너무나 우아한 익살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필리바가 계속 결혼을 하자고 졸랐겠죠. 콜레트 부인이 말하죠. “결혼이라는 건요.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아름다운 실수예요. 하지만 당신과 내가 하면 그냥 실수예요.” 좀 뜨끔했습니다. 이 두 문장의 차이가 어떻게 유머를 발생시키는지가 저는 루비치 영화를 볼 때 굉장히 중요한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앞 문장과 뒤 문장은 거의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몇 개의 부사나 혹은 형용사를 빼고 다른 명사를 넣었을 때, 아주 작은 차이와 대체, 그리고 그것들로 인한 대어를 단지 두 문장의 사이에 끼어 넣을 때 그리고 이 두 문장이 붙었을 때 일으키는 완벽하게 다른 느낌. 실은 결혼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실수이지만 당신과 내가 하면 그냥 실수라는 말이 붙었을 때의 그 느낌이라는 것이 루비치 영화를 볼 때, 저는 늘 떠오릅니다. 이런 유형의 대사들이 더 크게 흥미로운 이유는 이런 대사들이 시종일관 영화 속에 넘실댄다는 겁니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정신을 놓고 있을 때 우리를 건드리고 도망간다고 할까요. 이런 종류의 대사들이 숨 쉴 틈 없이 접근했다가 물러났다가 접근했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하고 있는 게 루비치 영화입니다. 지금까지 빌리 와일더의 말을 빌려서 루비치의 말의 터치를 제가 경험한 바대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렇지만 농담이라는 것이 단지 말에 국한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은 굉장히 당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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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루비치 2


루비치 영화 안에서는 말의 터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터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시각적인 슈퍼 조크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내가 영화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또 들어 보도록 하죠. 루비치의 유성영화만 보신 분이라면 의외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루비치가 무성영화 시절에 영화의 이상으로 삼았던 것은 자막 없는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자막이 그 사실을 너무 직접적으로 많이 설명해주고 있는 것은 그 영화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오히려 자막을 최소화하고, 오로지 시청각적인 기능으로만 영화 한 편을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자막 없는 상태에서 그 시각적인 터치들, 시각적인 농담들로 영화를 만든 경우도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인형>에서는 어떤 갑부의 상속을 받을 자격이 있는 조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삼촌부터 상속을 받으려면 결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결혼은 하기 싫고 상속은 받아야겠으니 선택한 방법이 인형을 데려오는 것입니다. 여인처럼 생긴 인형을 데려왔습니다. 여차여차하여 여인의 형상을 한 그 인형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여인인 거죠. 영화 속 등장인물은 이 인물이 인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강 그렇게 이해해주셨으면 좋겠고요. 그리고서 주인공이 인형을 들고 수도원으로 잠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남자 수도승만 있는 수도원에 여인이 들어갈 수 없다고 거절하죠. 주인공이 인형임을 피력하고 결국 들어가게 됩니다. 그가 인형과 수도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일종의 시각적인 농담들이 시작하게 됩니다. 제가 굉장히 재미있게 느꼈던 부분은 이런 겁니다. 수도승들이 인형을 어느 자리에 둬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방에다 둘까 저 방에다 둘까 고민하며 옮겨야 하는 상황인 거죠. 건장한 수도승 하나가 인형을 들쳐 메고 이쪽 방에서 저쪽 방으로 옮기는 장면이 있습니다. 상상을 한 번 해보십시오. 여인은 수도원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 이 사람들의 불문율입니다. 그런데 인형이기 때문에 이 주인공의 인형은 수도원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인형은 실제 여인입니다. 그런데 수도승이 이 여인(인형)을 들쳐 메고 터치를 하면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다니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야한 농담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금기사항, 터부라고 알고 있는 육체적 접촉을 굉장히 가벼운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은 채 시각적으로 우리에게 고스란히 아슬아슬하게 재미를 선사해주는 장면 중 하나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성 영화에서만 그러하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후반기의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들은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제가 말한 이런 장면이란 것은 시각적인 농담의 터치라는 건데요. 다시 한 번 <천국은 기다려준다>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굉장히 아름답고 젊은 여인이 책방에 들어와서 망설이고 있습니다. 책을 사고 싶은데, ‘이 책을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난처한 느낌입니다. 책 이름을 물으니까 책 이름은 이런 겁니다. ‘남편을 행복하게 만드는 법’. 바로 느낌이 오실 텐데요. 성생활 가이드입니다. 결혼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 젊은 여인이 성생활 가이드를 사러 왔습니다. 그런데 앞에 있는 남자와 얘기를 하다 책을 한 장 넘기니 저자의 사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저자의 사진을 보기 전에 이 책의 첫 장, 표지에는 어떻게 되어 있냐면 굉장히 아름답고 멋지게 생긴 젊은 여인이 커튼 사이로 유혹적인 웃음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표지를 넘기고 저자의 사진을 보니 너무나 완고하고 보수적이고, 고집스럽게 생긴 노년의 부인이 책의 저자라는 겁니다. 그것을 한 인서트로 보여줍니다. 그 인서트를 접하는 순간, 어떤 느낌이 드는가 하면, 어떤 두 가지 작품을 통해서 웃음을 갖게 되느냐 하면 첫 번째는 이겁니다. 그 인서트를 봤을 때, ‘성생활 가이드를 쓴 저자가 이 사람이란 말이지, 이 책 믿을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이 책을 전혀 읽을 필요가 없어 보이는 이 아름다운 여인이 이 책을 읽고 있단 말이지라는 생각이 든다는 거죠. 이 여러 가지 작동들을 통해서 우리가 한 번에 토해내는 웃음에 도달하는 것이 루비치 영화입니다. 루비치의 시각적 조크입니다. 다른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책의 첫 장을 보여주고 인서트 컷으로 저자의 사진만 보여주었을 뿐인데 제가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해야만 하는 복잡한 과정들이 그 안에서 이루어진 이후에야 우리가 그토록 간단하다고 생각했던 그 웃음을 토해내는 약 1~2초 정도의 즐거움을 우리에게 선사해 줄 겁니다.


이 장면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이 인서트 장면은 시각적인 편집에 의해 일어난 인지적 지표의 충돌이라는 것입니다. 이 괴상한 말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지표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루비치 터치의 경험 두 번째를 이야기할 때 그 지표라는 말을 핵심으로 삼고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루비치 터치 경험 두 번째는 제가 만든 말로 지표 게임의 터치입니다. 그리고 이 지표 게임의 터치는 루비치 영화의 거의 모든 내러티브 활동에 있어서 절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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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루비치 3


지표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기호학자가 이르기를 기호에는 도상, 지표, 상징이 있다는 거죠. 도상은 철저하게 유사성의 기호입니다. 우리가 화장실 앞에서 치마가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면 여자 화장실이고 바지가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면 남자 화장실이라고 알게 된다는 것, 그 유사성에 따라서 어느 하나를 결정하고 인지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유사성의 기호라는 거죠. 그런데 지표의 기호는 인접성과 인과성의 기호라는 것이죠. 번개가 치면 이제 곧 비가 내리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번개는 추론과 추정의 기호가 되는 겁니다. 그로 인해서 번개로부터 인과를 끌어내고 인접해 있는 흙탕물 혹은 비를 우리가 추론하고 추정하게 된다는 거죠. 나머지 하나는 상징입니다. 철저하게 관습적이고도 사회적인 약속입니다. 책을 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책이라고 불러왔기 때문이라는 거죠. 거기에는 아무런 인과성이나 인접성이나 유사성도 없고 그냥 상징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루비치 영화가 기대고 있는 것이 바로 지표라는 겁니다. 지표의 기호라는 것이겠죠. 지표의 기호로서 우리를 터치하고 또 추정과 추론의 기호를 응용하거나 그 응용을 통해서 우리가 사태를 오인하게 하거나 혹은 사태를 정확하게 보게 함으로써 웃음을 끌어내는 것이 루비치 내러티브의 굉장한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