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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힘을 낼 시간> : 케이팝의 사상자들, 여기에 있다202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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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낼 시간> : 케이팝의 사상자들, 여기에 있다
김현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사는 게 전쟁이라고들 한다. 누구에게나 삶은 고달프고 괴로운 것이겠지만 케이팝의 아이돌들은 더 그럴 것이다. 연습생 시절부터 수많은 테스트와 경쟁을 거쳐 겨우 가수로 데뷔하고 나면 더 힘든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음악 방송 1위는 주로 메이저 4대 기획사라는 대형 회사 소속의 아이돌들에게 돌아갈 확률이 높다. 거기에 속하지 않은 아이돌들에게 성공의 문은 바늘구멍만큼이나 좁다. 그런데 막상 1위를 차지한 아이돌들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아이돌 대부분이 1위를 해본 가수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1위도 1위가 아닌 자들도 끊임없이 자신을 갈아 넣어야 하는 생태계. 이게 전쟁이 아니면 무엇인가.
남궁선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힘을 낼 시간>은 이런 케이팝의 전장에서 밀려난 소위 망한 아이돌들의 이야기다. 걸그룹 ‘러브 앤 리즈’의 수민(최성은 배우), 사랑(하서윤 배우), 보이그룹 ‘파이브 갓 차일드’의 태희(현우석 배우)는 강제로 은퇴당한 상태다. 그들은 학창시절 때 가보지 못한 수학여행을 가보자는 생각에 제주도에 왔다. 이 여정 속에서 이 친구들 각자의 상처와 슬픔이 드러난다.
배우들이 연기를 위해 참고할 영화가 있느냐고 남궁선 감독에게 물었을 때 전쟁영화라고 답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도 PTSD를 앓는 군인들처럼 이 세 친구들은 케이팝 밖에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때의 스트레스를 앓고 있다. 사랑은 정신과에서 처방한 약을 먹어야 할 만큼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하다. 세상과 단절되고 싶다는 듯 늘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로 있고 종종 공격 충동과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 그런 사랑을 엄마처럼 보살피는 수민은 과도한 책임감을 안고서 여전히 아이돌 그룹의 리더처럼 살아간다. 지나친 체중 관리에 시달린 탓에 음식을 좀처럼 삼키질 못하고 토한다. 귤 농장에서 기절할 때까지 과하게 노동에 몰두하고 쓰러져서도 잠꼬대처럼 ‘할 수 있습니다’라고 중얼거린다. 늘 웃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태희는 자기가 속한 팀이 해체되고 나서도 아직 계약기간이 2년이 남아 회사에 발목이 잡혀있고 카드빚이 3천만 원이다. 남궁선 감독은 단 한 번의 회상장면도 없이 그들의 현재에 새겨진 그들의 상처를 뛰어나게 묘사한다. 케이팝 팬들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그들의 직업병의 디테일들이 영화에 빼곡하다. 입에 붙은 ‘실장님’이라는 호칭, 거듭된 90도 인사에 담긴 과도한 깍듯함,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해도 발성연습을 하면서 뛰는 것 등등.
남궁선 감독의 영화들은 한마디로 마라 맛이다. 맵고 쓰다는 말이다. <힘을 낼 시간>을 말랑말랑한 로드 무비, 힐링 영화 정도로 생각해선 안 된다. 첫 장편영화 <십개월의 미래>에서도 그렇고 이 영화에서도 청춘들은 한꺼번에 몰아치는 듯한 정신적 고난의 시간을 겪는다. 주목할 점은 영화 속에서 등장은 하지 않지만 인물들의 멘탈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존재가 있다는 점이다. <십개월의 미래>에선 주인공 미래의 태아 ‘카오스’가 그랬고, 여기선 수민, 사랑과 같은 팀 멤버였던,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예라라는 존재가 그러하다. 수민, 사랑, 태희는 예라의 그림자 아래에 있다. 그들은 예라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나도 예라처럼 생을 놓아버릴까 하는 유혹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죽음 가까이에 있다. 하지만 그들 곁에는 주인공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성실한 노동의 대가를 인정해주고 그에 합당한 보상과 휴가의 시간을 주는 귤 농장의 사장(홍상표 배우)과, 그들이 그렇게 유명했던 아이돌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을 알아보는 케이팝 팬, 버스 분실물 센터 직원 소윤(강채윤 배우). 이 사람들 덕분에 수민, 사랑, 태희는 다시 삶을 살아갈 동력을 얻는다.
흔히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에 떠나는 여행을 재충전의 시간이라고들 한다. 수민, 사랑, 태희는 충전되지 않았다. 귤 농장에서 귤을 따다가 기절하는 수민의 모습처럼, 오히려 철저히 방전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들은 이 여행을 통해 상처가 다 나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꺼내면 아플까봐 치료를 꺼려했던 각자 마음속의 피고름을 제대로 짜내는 고통의 시간을 겪었다.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의 결말은 다 같이 해피한 그런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이 올 것을 확신하며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힘을 낼 시간> 역시도 앞으로 힘을 낼 시간이 그들에게 다가올 것임을 암시하며 끝이 난다. 치유의 시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세 친구들의 앞길에 행운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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