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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스크린 밖으로 나온 나치의 그림자2024-12-23
공모

모처럼 멍하니 크레딧이 끌날 때까지 객석에 앉아있었다. 영화관 계단을 내려가며 매스꺼움을 느꼈다. 무슨 이유일까. 영화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팝콘을 먹었다는 이유였을까. 아니면 주인공과 가족에 역겨움을 느껴서일까. 머릿속 여러 물음에 답을 내지 못한 채 극장을 나왔을 때, 가장 선두에 있었던 물음이 물었다. ‘그래서 저들은 진짜로 양심의 가책,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나?’ 링컨 전 흑인 노예제도를 당연히 여겼던 백인들처럼 말이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올해 나에게 굉장한 의미를 갖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왜냐면 영화 속 인물을 실제로 현실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사직서를 제출하면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 줄 알았다. 짐은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그들과 그것들과의 관계. 그러나 마지막 퇴근 도장을 찍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새로운 짐을 얹으며 더욱 무거워져만 갔다. 양심 없는 이들 때문에 나의 양심이 무거워지는 아이러니는 어디서 해결할 수 있을까. 추석 전, 직장상사의 인턴 폭행과 괴롭힘 사건이 터진 다음날, 피해자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가해자가 웃으며 들어온다. 가해자는 너무 눈에 띈다. 보이는 것만 보면 피해자는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피해자는 없고 가해자만 당당히 출근하는 모습. 평소와 똑같이 일을 하는 그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맞은 사람이 있는데 왜 맞은 사람은 출근을 안 하고 때린 사람은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는가. 나는 이 광경을 보며 깊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작은 홀로코스트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뒤로 자신의 영역에만 관심 갖고 관리하는 그런 나치장교. 그렇다, 나치는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다.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인간의 자기중심적, 잔혹성을 고발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타다 남은 신발과 옷가지들, 그리고 박물관으로 남겨진 학살의 현장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그러나 내가 겪은 사건은 우리가 아직 이 경고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직장 내 괴롭힘, 권력 남용, 그리고 이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은 작은 규모의 홀로코스트가 여전히 진행 중임을 증명한다. 나는 이 현실을 마주하며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영화는 평화로운 일상의 이미지 뒤에 숨겨진 잔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이는 평온함은 종종 우리를 속인다. 부산 모 공공기관 인턴폭행 사건에서도, 평범한 직장 생활의 이면에 숨겨진 폭력과 고통이 있었다. 우리는 이미지에 속지 않고 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한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영화 감상에서도, 현실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감상문이 고발문처럼 쓰이길 원하지 않았지만, 다시 한 번 영화의 위대함을 느끼면서 영화가 감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나 또한 유대인 소녀처럼 하나의 사과를 던져주고 싶은 마음이 크기에 영화와 내가 겪은 사회를 연결지어 자연스레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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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을 들은 건 2012년 겨울, 어느 유명 프렌차이즈 카페 아르바이트 교육 때였다. 본사에서 나온 직원 교육담당자가 굳이 아르바이트생을 모아 놓고 교육하며 단골이기 때문에 컴플레인을 넣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 문장을 꺼냈던 것이다. 나는 그저 고객 서비스를 위한 교육 문구로만 여겼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이 말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최근 동덕여대 사태만 해도 각자 자신이 관심있어 하는 영역만 두고 상대의 의견을 듣지도 않은 채 무시로 일관한다. 영화 속 나치 장교의 아내가 정원에서 가십을 나누며 학살의 비명을 외면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변의 부조리에 눈과 귀를 막고 있지는 않은가? 인턴 폭행 사건에서도 이러한 무관심의 폭력성이 드러난다. 동료들의 침묵, 관리자들의 방관, 그리고 사회의 무심한 반응은 피해자를 더욱 고립시키고 가해자를 비호하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모두 이 무관심의 공범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장교 또한 노동자라고 생각한다면 상부에서 시킨 일을 한 것 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이 맡은 직책에 맞게 행동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는 노동자였을 뿐이다. 군인이니까,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군의 규율이기에 그렇게 행동했을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 루돌프 회스는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자신의 성욕을 풀기 위해 유대인 여자를 집무실로 불러 성관계를 맺는다.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일해야 할 노조 지회장이 인턴을 괴롭히고 때린다는 것은 마치 요리사가 담배 피면서 요리하고 침튀겨가며 요리하고 플레이팅만 예쁘게해서 손님들에게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직업윤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영화는 더 이상 나에게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이고, 시사 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최근 부산 모 공공기관 인턴 폭행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정말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가? 일상 속 작은 폭력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진정한 변화는 개인의 깨어있는 양심에서 시작된다. 부조리에 맞서 목소리를 내고, 약자를 보호하며, 폭력에 반대하는 용기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 보다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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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가 이토록 현재의 우리 모습과 닮아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러한 폭력과 부조리에 대해 책임이 있다. 침묵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으며, 작은 용기를 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교훈을 진정으로 배우는 길이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첫걸음일 것이다. 영화관을 나서며, 나는 다짐했다. 더 이상 무관심한 방관자가 되지 않겠다고. 작은 불의에도 목소리를 내겠다고. 그것이 바로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닐까? 우리 모두가 깨어있는 양심을 가진 능동적인 시민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변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가해자와 마지막 근무, 아직도 그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그래, 고생했고, 너가 영화 좋아하니까 영화 하나 추천해줄게, <해야 할 일>이라는 영화인데 한 번 봐봐.” <해야 할 일>은 노동자의 부당한 인사해고에 관한 독립영화이다. 인턴을 폭행한 노조 지회장이, 저 영화를 나에게 추천해준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진심으로 자신의 행동에 일말의 가책이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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