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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이끼, 녹색 포효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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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하던 날, 보낸 겨울 중 제일 춥던 날, 따뜻한 날을 뒤로하고 다시 추워지기 시작하던 날, 한 번도 여름이었던 적 없는 이 3일을 서늘하고도 매미가 열렬히 울던 어느 여름으로 이끈 작품이 있다. 어느 마을 유흥업소의 화재 사건을 시작으로 같은 시간대의 이야기를 다른 시점의 3부작 형식으로 전개하는 영화. 싱글 맘 ‘사오리’와 그의 11살 아들 ‘미나토’ 그리고 미나토 학교의 교사들, 친구인지 자기 아들이 괴롭힌 피해자인지도 알 수 없는 ‘요리’까지 그 어디에도 완벽한 진실이 없음을, 학교폭력이라는 민감한 주제 아래 카메라로 사건의 테두리만 고요히 보여주며 관객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이다.
사전정보 하나 없이 첫 관람을 했던 1월 1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류이치 사카모토의 대표 사운드트랙 ‘aqua’와 눈물이 함께 흘러나왔다. 어떤 것에 그리 서럽게 울었는지 모르겠다. 답답하게 굴던 얼음 같은 어른들? 진실은 어찌 되어도 좋으니 누군가 희생되는 게 당연했던 교장 선생님? 누가 괴물인지 찾기 바빴던 자신의 모습? 내가 무엇에 화를 내고 그토록 슬퍼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요리와 미나토가 햇살 아래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달리는 모습과 동시에 어딘가 모를 공허함과 적적함은 나를 따라다녔다. 많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영화는 내게 좋은 작품으로 남았다. 이 영화 역시 그랬다. 다 알아버린 사실들을 가지고 다시 보아도 여전히 슬펐던 두 번째 관람에선 인물 각자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세 번의 관람을 끝으로 그렇게도 밉던 교장 선생님까지 헤아릴 수 있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마음에 이끼를 낀 채 살아간다. 녹이 슬어버리기도 하고, 그늘져버려 보듬지 못한 한 켠에 말이다. 같은 반, 같은 성별 친구 요리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는 것을 자신이 ‘돼지의 뇌’를 가져서 일까 수없이 고민하던 미나토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의심하고, 미워했다. 요리가 만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댕강 잘라버리기도 하고, 괴롭힘 당하는 요리를 애써 모른 척해보지만, 마음속 죄책감만 쌓이는 어린 소년의 그늘이 화면에선 너무나도 선명히 드러난다. 남편의 운전 실수로 손녀와 작별해야 했던 교장 선생님은 단 한 번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학교를 찾아와 울분을 토해내는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 앞에서도 그저 정해진 매뉴얼대로 “네”만 연신 중얼거린다. 답답하고도 제일 알 수 없는 그녀는 녹이 슨 고철 같았다. 아들 미나토에게 그저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자신의 소원이라던, 아들의 차마 말하지 못한 진실을 알아버린 후 태풍 속 아이들(미나토와 요리)을 찾으러 갈 때에도 미나토의 이름만 열렬히 외치는 엄마 사오리의 모습은 일반적인 모성애면서도 모난 편견 같아 씁쓸했다. 억울한 거짓말에 둘러싸여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서로를 좋아하는 두 아이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모습이 부끄러워 미나토에게 찾아가 잘못했다고 사과하던 호리 선생은 영화 속 유일하고도 진정한 어른이었다
매 부마다 카메라가 담아내는 인물들에 나를 대입해 보았다. 스물넷의 나는 아직도 아이와 어른 사이에 걸쳐 있다 생각해 스스로 더 크길 열망하지만, 수많은 편견에 물들어 제멋대로 괴물이 누구인지 찾던 내 모습은 아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나는 관객석에 앉아 요리와 미나토가 되어 그들의 이름을 외치고, 우주가 폭발하면 자신들의 마음의 이상한 것이 아니게 될 거라 믿는 순수한 마음에 공감을 하고 있었다. 나 역시 이끼를 지닌 채 살아가고 있었다. 아마 돌보지 못한 마음 구석구석의 이끼가 아릿 아파와 류이치의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눈물이 절로 나온 것이다.
작품 후반부 음악실에서 미나토와 교장선생님이 트럼펫으로 만들어낸 불협화음은 이 작품의 제목이 왜 <괴물>인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교장선생님은 “못한 말들은 후 불어버리자”라며 미나토에게 연주 방법을 알려준다. 제일 수상하고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의 대사 한마디에서 나는 진실한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사실 남편이 손녀를 하늘나라에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커다란 실수였다는 것을, 평생 안고 가야 할 죄책감을 지닌 한 어른의 모습을 보았다. 자기의 몸 만한 악기를 안고 힘껏 연주하는 미나토의 트럼펫 소리는 새끼 동물의 울음 같았다. 어디에 닿지 않아도 상관없을 이끼들을 다 뱉어버리는 녹색 빛 가득한 포효와 열차의 울림처럼. 음과 호흡이 전혀 맞지 않은 불협화음의 두 사람은 나이도, 고민도, 던져버리고 싶은 진실도 다 달랐다. 그럼에도 외치고 싶은 것을 지닌 그 사실 한가지 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연주했다.
작품 속 어른들은 기존의 고수해 오던 것들을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 치부하여 아이들에게 따르길 무의식적으로 강요한다. 호리 선생은 미나토에게 남자가 힘도 못 쓰면 어떡하냐 장난식으로 다그쳤고, 사오리는 아들에게 흰색 선을 넘으면 지옥에 갈 것이라며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농담들을 던졌으며, 요리의 아빠는 요리가 돼지의 뇌를 가졌다며 치료의 목적이라는 합리화 하에 반복된 가정폭력을 행했다. TV 속 등장하는 여장남자 코미디언의 모습을 희화화하고, 섬세한 남자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아이들의 모습들을 통해 어른들 아래 자연히 노출되어 버린 사회의 현실을 보았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역시 다르지 않다는 점, 영상에서 묘사되는 것들이 결코 픽션이 아니라는 점이 잔인한 현실이었다.
요리와 미나토는 그 현실들을 벗어나 둘만의 유일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둘의 ‘폐열차’ 속에선 편견과 장애물 따윈 없다. 두 소년은 그들만의 우주를 만들고, 서로를 치유하며 마음을 공유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한 공간을 팽창하는 우주라 이름 붙이고, 놀이터 우주 조형물 꼭대기에 올라가서도 우주의 폭발, ‘빅크런치’를 줄곧 믿는다. 나 역시 그들 옆에서 그런 세상이 오길 기도했다.
커다란 태풍이 지나가고, 초록빛 가득한 곳에서부터 더이상 막혀있지 않은 열차 선로를 향해 뛰어가는 아이들의 마지막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힘껏 달리는 그들의 보폭은 열차보다도 우렁찼고, 그들이 지닌 순수한 마음은 어떠한 것보다 강한 힘이기에. 그 사랑의 힘을 응원하기라도 하는 듯 ‘aqua’의 피아노 선율은 진하게 나의 마음을 찾아와 내 이끼를 어루만지고 쓰다듬어 준다. 그리 덥지 않은 서늘한 여름이 그리울 때, 사랑의 힘을 믿고 싶을 때 나는 이 작품을 또 찾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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