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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내 인생의 영화 ~영화 구룡성채 : 무법지대를 보고2024-12-23
구룡성채

구룡성채는 우선 액션과 연출 면에서 완성도가 뛰어나다. 영화는 시작부터 주인공 찬록쿤이 구룡성채의 한 클럽에서 도박 싸움을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유리 조각을 묻힌 주먹으로 싸우고, 유리가 깔린 바닥 위에서 맨 등이 쓸리며 몸을 부딪치는 찬록쿤의 모습은 그 자체로 강렬한 타격감을 전달한다. 초반부터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액션씬들은 타격감과 역동성에서 최고 수준을 보여주며, 이 액션이 전부 연기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실적이라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영화의 배경인 구룡성채는 골목 골목들이 몹시 좁고 얼기설기 지어올려 대부분이 망가져 있는 독특한 구조의 건물인데 이런 건물 구조를 활용한 액션씬도 훌륭하다. 영화 세트장임에도 실제 구룡성채의 느낌을 생생하게 살려 구룡성채의 폐쇄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공간을 잘 살렸다.

영화는 범죄 액션에 그치지 않고 무협의 요소를 담아냈다. 찬록쿤을 쫓아온 악당 킹이 손가락으로 버스 의자를 뚫어버리는 순간, 이 영화가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니라 무협 영화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구룡성채의 관리자인 사이클론이 중력을 무시하는 액션을 보여주며 찬록쿤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장면은 그가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라 구룡성채를 지키는 수호자임을 각인시키며, 갑작스런 무협 전개를 이상하게 느낄 새도 없이 납득하게 만드는 멋진 장면이다.

구룡성채는 사이클론, 추형님, 타이거 형님, 미스터 빅으로 이루어진 원로들과, 찬록쿤, 신이, 십이소, AV로 구성된 젊은 세대로 나뉜다. 원로들은 그저 조언을 하는 역할을 넘어, 직접 싸움에 나서는데 이 싸움들이 모두 무협 액션이면서도 너무 과하지는 않은, 어느정도 현실적인 액션이라 매력적이다. 각 원로들이 멋진 액션을 선보일 때, 이들이 괜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님이 느껴진다.

악역인 킹은 경기공이라는 무술로 칼과 망치를 튕겨내는 경지에 이른 인물이다. 그런데도 킹은 강력한 무술 실력에 걸맞지 않게 경박하고 허세가 넘치는 성격을 지니고 있고 심지어 총까지 들고 나와 적을 공격한다. 이 캐릭터는 자존심이나 상도덕 같은 무인의 미덕이 전혀 없는 캐릭터라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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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초반의 빠른 액션 전개가 끝난 후, 찬록쿤이 구룡성채에 자리 잡고 사람들과 유대를 쌓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이클론은 과거 형제 같았던 찬짐을 죽였던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 구룡성채의 모든 주민들을 돌보며 살아간다. 약을 팔려던 찬록쿤을 때려서 내쫓았으면서도 도움을 받으러 온 찬록쿤을 위해 치료받을 곳을 알려주고, 미스터 빅과의 문제도 해결해 준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찬록쿤을 보며 밥을 사주고 집을 구해주고 옷까지 챙겨주는 사이클론의 모습에서 이 캐릭터가 얼마나 다정하고 세심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찬록쿤을 비롯한 젊은 캐릭터들 또한 매력적이다. 신이는 구룡성채를 속속들이 알고 있어 오토바이를 타고 복잡한 골목길을 자유롭게 누빈다. 마지막 결전에서도 하늘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AV는 구룡성채의 유일한 의사로서 지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둔기와 주먹으로 묵직한 액션을 선보이며, 십이소는 추형님에게 사랑받는 귀여운 동생이자, 사이클론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인물로 매력을 더한다. 이들은 여성을 때려죽인 남자를 응징하려 가면을 쓰고 접근했다가 만나서 친해지게 되는데 이 설정마저 매력적이다.

영화 중반부의 하이라이트는 찬록쿤을 죽이러 온 미스터 빅과 찬록쿤을 지키려는 구룡성채 사람들의 대결이다. 사이클론은 빅과 킹과 함께 갇혀 자신의 팔로 문을 잠그고 킹은 그 팔을 썰어버리겠다고 분노한다. 그 후 팔을 자르는 장면이 아닌 철컹거리는 문만 보여주는 이 장면은 압도적인 비장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사이클론의 숭고한 희생에 더해 찬록쿤을 살리려는 신이, AV, 십이소의 필사적인 모습은 관객의 숨을 막히게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세대교체를 상징하듯 젊은이들만이 싸움에 나선다. 이 싸움은 이제 과거의 찬짐과 관련된 사이클론, 추형님, 타이거 형님, 미스터 빅의 싸움이 아니다. 이제는 킹, 찬록쿤, 신이, 십이소, AV가 자신들의 원한과 욕망을 가지고 시작한 싸움이다. 원로 캐릭터들이 워낙 매력적이라 이런 세대교체가 섭섭할 법도 한데 영화 안에서 원로들은 각자 멋진 활약을 보여줬고 젊은이들도 이전부터 캐릭터성을 잘 쌓아왔기 때문에 이 변화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원로들이 물러선 자리를 자연스럽게 채워가는 젊은 세대는 홍콩의 세대교체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킹과의 결전에서 찬록쿤과 친구들이 첫만남 때처럼 적의 사지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어 공격하는 장면은 네 사람의 유대를 보여줘서 좋고, 네 사람이 다 킹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 쓰러졌을 때 사이클론(회오리바람)이 분노하듯이 불어오는 장면은 구룡성채를 지키려는 사이클론의 의지가 느껴져서 눈물이 난다. 그 바람이 띄워 올린 천을 붙잡고 찬록쿤이 날아올라 싸움터로 복귀하는 장면도 너무 감동적이고 싸움이 끝난 후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 처럼 바람이 잦아드는 것도 가슴이 찡해진다.

구룡성채는 단순히 액션이 뛰어난 영화가 아니라, 선대와 후대의 유대를 통해 세대를 잇는 강렬한 서사를 담아내며, 액션과 스토리, 그리고 캐릭터의 매력이 조화를 이루는 훌륭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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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지막에 "볼 수 있을 때 봐둬. 홍콩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니까." "그래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 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가진 홍콩에 대한 애정을 짐작하게 한다. 또 엔딩크레딧에서 구룡성채 주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며 사이클론이 지키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며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바로 홍콩의 평범한 시민들이라는게 느껴진다.

물론 이 영화에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력을 무시하는 무협액션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고 이 영화에 나오는 여성들은 대부분이 피해자거나 아이의 보호자일 뿐이라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서 낙제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점이 없는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점이 있음에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영화를 사랑한다.

영화 오블리비언에서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보지 못 한 시간과 장소를 그리워 할 수 있을까?" 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리고 90년대 한국에서 태어난 나는 이 영화를 보고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80년대 홍콩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 영화가 올해 나의 인생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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