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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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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서늘한 폭력, 따뜻한 위로>2024-12-23
수유천

올해 개봉한 영화 중 두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하나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이며, 다른 하나는 조나단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이다. 많은 걸작이 그렇듯이, 이 두 편의 영화는 구조적으로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러닝타임 내내 임계점에 도달한 주전자처럼 폭발하기 직전의 긴장상태를 유지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여러 부분에 구멍이 송송 뚫려 관객에게 빈 곳을 채워넣기를 권유한다. 정반대의 측면에서 뛰어난 두 영화를 한 해에 만난 것은 분명 행운이며, 나는 뜨겁게 흘러넘치는 용암 같은 영화에 녹아드는 과정보다, 가슴 속에 서늘한 공백을 남긴 영화에 내 감상을 하나씩 채워 넣는 과정을 쓰고 싶다.

본격적인 감상에 앞서, 영화에 등장한 한 시퀀스를 떠올려보자. 물을 뜨던 타쿠미는 하나를 데리러 가는 것을 까먹는다. 뒤늦게 도착한 그는 교사에게 하나의 행방을 묻는다. 하나는 이미 집으로 떠났다. 타쿠미는 하나를 찾아 눈이 내린 산길을 걷는다. 기묘한 음악이 흐르며 카메라는 묵묵히 그의 발걸음을 트래킹 숏으로 따라간다. 작은 언덕이 나와 그의 모습이 서서히 가려지고, 다시 비친 모습은 하나를 업고 있는 타쿠미의 모습이다. 이 시퀀스는 진작에 이 영화에 담긴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관점에서 영화를 바라보아야 한다. 타쿠미는 이 마을에서 자연과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하지만 그가 자연과 교감하는 모습은 장작을 패고, 물을 떠나르는 것이다. 타쿠미라는 인물은 자신(인간)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지키려는 것이다. 마을의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글램핑장 개발을 막으려는 이유는 더 깨끗한 물을 사용하고 싶어서, 또는 산불로 피해를 보기 싫어서 등등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시선으로 본 관점은 한계에 봉착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폭력성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동물을 죽여야만 하고, 나무를 베어야만 한다. 타쿠미는 글램핑장 개발 설명회에서 모자를 벗는다. 영화 내내 쓰고 있던 모자를 벗는 행동은 굉장히 이상해 보인다. 타쿠미가 모자를 벗으며 한 말은 바로 균형이다. 그는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의 필연적인 폭력은 균형을 계속 무너뜨린다. 모자를 벗는 행동은 영화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반복된다. 바로 하나가 사슴과 대면한 순간이다. 하나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은 후에 사슴에게 다가간다. 사슴이 하나를 공격한 이유가 무엇인가. 사슴이 사냥꾼의 총에 맞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쿠미는 두 가지를 목격한다. 첫째, 하나는 사슴을 위해 모자를 벗었지만, 자신은 인간을 위해 벗었다. 자연을 위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수치심을 느낀다. 둘째,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인간과 자연의 균형은, 인간의 폭력으로 인해 깨져버렸다. 애초에 인간에게 그러한 균형을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인간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무력함을 느낀다. 외부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목격한 그는, 내부의 균형마저 지킬 수 없게 된다. 이성으로 부여잡고 있던 폭력성은 타카하시로 향한다. 글램핑장 관리원이 되어 자신과 똑같은 행로를 걷겠다고 생각한 타카하시를 타쿠미는 살해한다. 그는 더 이상 균형을 맞출 수 없는 인간의 비극을 바라볼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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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시점은 처음부터 제시된다. 누구의 것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 나무를 향한 시선은, 곧 하나의 것임이 밝혀진다. 하나는 자연과 교감하는 방식이 타쿠미와 다르다. 하나는 자연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하나는 나무를 베고, 사냥하지 않는다. 그저 나무를 껴안고, 새가 남기고 간 깃털을 주울 뿐이다. 하나는 글램핑장 개발을 위한 설명회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저 넓은 벌판을 뛰어다닐 뿐이다. 그러나 광활한 자연에서 길을 잃은 하나는 곧 사냥꾼의 총에 의해 다친 사슴과 마주한다. 하나는 사슴에게 공격받는다. 타쿠미의 좌절이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종 때문이라면, 하나의 좌절은 그저 품고 싶었던 자연의 공포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다시 영화의 오프닝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관객과 하나) 본 것은 나무다. 평화롭고 무해하다. 같은 음악과 화면이 마지막 장면에서 반복되지만, 분명 다른 느낌이 든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출발점이 되었던 이시바시 에이코의 음악은 이제는 혼란스럽게 들려온다. 자연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은 달라졌다. 하나는 자연의 폭력을 마주했다.

타쿠미와 하나는 각각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달았다. 무력하다. 인간은 광포한 자연 앞에서, 또한 실존의 위기를 겪으며, 너무나도 무력해진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무너지길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화합하고 연대한다. 마을 사람들은 사라진 하나를 찾기 위해 합심해 산 곳곳을 수색한다. 내내 무심해 보이던 타쿠미는 나무가시에 베인 마즈유미의 손을 보고 괜찮냐고 물어본다. 타쿠미는, 사슴에게 다친 하나의 피를 닦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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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술했던 시퀀스로 돌아가 보자. 타쿠미는 하나를 찾아간다. 하지만 자연(언덕)이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다. 그 후에 하나는 타쿠미의 등에 업혀있다. 자연이라는 무질서 앞에서 질서를 찾으려는 인간들. 영화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악인가? 또한, 자연은 악인가? 그리고 한가지 답으로 귀결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존재 그 자체이다. 또한, 그것은 화합의 필요조건이다. 타쿠미는 사슴에게 공격당한 하나를 업고 달린다. 그러다 곧 멈춘다. 그는 깨달았다. 통제할 수 없는 폭력을 지닌 자연 앞에서도, 폭력이 곧 본질인 인간들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음의 순간 영화는 정지한다. 이제는 관객의 차례이다. 이것은 행동을 요구하는 경고가 아니라, 어쨌든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무한히 낙관적인 응원이자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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