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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공전과 공존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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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한 감독의 데뷔작과 최신작을 한 해에, 그것도 한 극장에서 보았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어디서든 쉽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에는 사소한 경험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감독이 홍상수라면 그 경험은 특별해진다. 그의 작품에서 반복과 차이가 감상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반복은 동일한 요소의 되풀이라 비교적 수월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매년 그의 신작을 챙겨봐서 그런지 차이를 발견하기란 오히려 어려웠다. 마치 머리카락이 자라는 도중에는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다, 시간이 지나 거울을 봤을 때 알아채듯 말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이 세상에 나오고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래서 더 잘 보이는 것이 있었다. <수유천>(2024)은 여전히 얼음장 같은 냉기가 감돌았지만 영화의 시선은 인물을 향해 달빛처럼 희미한 연민을 내비치고 있었다.
영화의 배경인 한 여대에서는 임박한 ‘촌극제’ 준비가 한창이다. 주인공 전임(김민희)은 학생들의 촌극을 담당하는 동시에 개인 작업과 전시회도 병행하는 대학교 강사다. 촌극을 준비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나 차질이 생기자 전임은 외삼촌(권해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외삼촌은 과거에 배우 겸 연출자로 활동하다 지금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전임과 외삼촌이 각각 제작과 연출을 맡으며 <수유천>은 영화 제작 과정을 그린 영화처럼 보였다. 그러나 외삼촌이 오랜만에 만난 전임의 나이를 진지하게 묻는 장면을 보자 등장인물의 나이에 주목하고 싶었다. 역할이 분명한 만큼 세 가지 세대의 연령대도 뚜렷했다. 무대에서 연기하는 학생들은 신세대 예술가이며, 전직 배우였던 외삼촌은 구세대의 예술가다. 그들 사이에는 40대의 현역 예술가인 전임이 있다.
사실 기성세대의 예술가는 전임 외에 한 명이 더 있다. 바로 전임의 상사인 정 교수(조윤희)다. 그간 홍상수의 작품에 자주 등장했던 전형적인 인물의 변형으로 보이는 그는 외삼촌을 향해 대놓고 욕망을 드러낸다. 심지어 전임과 같은 학과에서 근무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학생들과 같이 화면에 잡힌 적이 없다. 전임과 단 둘이 걸어가는 유일한 장면을 제외하면 외삼촌과 함께 화면에 등장한다. 정교수의 욕망을 다루는 방식에서 홍상수의 데뷔작과 비교하니 확연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적나라한 욕망의 성취를 화면에 담아 지식인들을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리고 욕망은 비극을 낳으며 관객에게 얼음장 같은 한기를 전달했다. 하지만 <수유천>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욕망은 화면 밖에서 일어나며 소리로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욕망의 여파는 이야기의 흐름에 큰 요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욕망을 걷어낸 자리에는 촌극을 위해 모인 이들 사이의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수유천>의 카메라는 구세대가 신세대와 연결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외삼촌과 학생들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그들은 같은 화면에 잡히지 않는다. 외삼촌이 말할 때는 카메라가 좌에서 우로 고개를 돌리며 화면에는 외삼촌만 잡힌다. 이때 학생들의 목소리는 화면 밖에서 프레임이라는 벽을 넘어 겨우 들린다. 학생들이 말을 할 때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연출되며 두 세대 사이의 먼 거리를 암시한다. 그러다 외삼촌이 위축되어 있던 학생들을 다그치지 않고 독려하며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버림받은 것 같다”는 그의 대사를 통해 학생들을 향한 연민을 발견할 수 있다. 외삼촌은 40년 전에 이 학교에서 학생으로 촌극을 준비했었기에 그들을 보며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구세대가 먼저 내민 손길을 계기로 시간적, 공간적으로 가장 거리가 멀었던 두 세대는 점점 가까워지며 이윽고 자주 한 화면에 잡힌다.
외삼촌의 시선이 촌극을 준비하는 학생을 향했다면 전임의 그것은 촌극 준비에서 하차한 학생들에게 가닿는다. 이들과 전임이 깊게 연대하는 첫 장면은 지금까지 보았던 홍상수의 영화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술자리가 파한 후 술에서 깨기 위해 운동장에 앉은 전임은 작은 조명을 켠다. 촌극 준비에서 하차한 3명의 학생이 불빛으로 모인다. 상처 받은 학생들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죄책감을 느낀다. 전임은 그들에게 "마음이 편해져라"며 주문을 외우듯 위무한다. 이윽고 카메라는 작은 불빛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전임은 촌극에서 하차한 학생들에게 베푸는 친절은 사소해 보인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돌보지 않기에 전임의 친절은 알맞다. 소외된 약자를 향해 당연하다는 듯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미더운 어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어두움을 밝히고 있었다.
이후에 불미스러운 사건의 원인인 남자가 학생을 만나기 위해 학교에 찾아왔을 때에도 학생을 지키기 위해 개인 작업 도중 작업실을 박차고 나가며 전임의 친절은 이어진다. 근래에 보기 드문 연대의 순간에 화면 가득 울긋불긋한 가을의 정취가 더해질 무렵 슬슬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작품은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들의 연대가 느슨하다 못해 무기력하다 말한다. 늘 같은 장소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전임은 끊임없이 횡으로 이동하며 프레임의 양 옆면을 들락날락한다. 이러한 전임의 모습은 그가 공전하는 달을 닮았다는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학생들과 연대하는 두 사건 모두 밤에 일어나기에 전임의 모습이 달을 닮은 이유에 대해 과감하게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학생들과 연대하는 두 장면에서 조명은 극도로 제한적이다. 각각 전임의 작은 휴대용 조명과 가로등의 불빛만이 그들을 겨우 비출 뿐이다. 전임은 소외된 약자 주변을 맴돌지만 그가 내비치는 존재의 빛은 멀리 퍼지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슴푸레하다. 달빛이 밝아도 밤은 여전하다
외삼촌과 학생들과의 연대도 미약하기는 마찬가지다. 촌극은 갖은 오해와 관객의 야유를 받으며 끝난다. 이후 외삼촌, 전임, 학생들이 뒤풀이 장소로 이동하는데 화면의 정 가운데에서 관객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간다. 작아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메라의 시선은 인간들의 슬픔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히 서있는 산 정상을 향한다. 학과장의 연락을 받고 전임이 자리를 비운 사이 외삼촌은 학생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묻는다.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저마다 바라는 모습을 토로한다. 학생들이 바라는 모습은 곧 그들의 결여다. 외삼촌은“나도 그래”라며 자신에게도 동일한 결여가 있음을 고백한다. 영화 속 어른은 젊은이들의 결여를 그저 들어줄 수밖에 없어 무기력하다.
밤하늘을 보며 타인과 맺는 관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서로의 위치가 바뀌지 않는 항성처럼 우리는 각자의 시공간에서 끊임없이 맴돈다. 그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자와 이어지고 각자의 불안을 공유한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서 타자를 향해 건네는 작은 도움의 손길이 서로를 지켜준다. 하지만 영화에서 발견했던 공존의 가능성은 촌극의 짧은 공연 시간처럼 잠깐 반짝이다 빛을 잃는다. 애석하게도 촌극이 벌어졌던 '수유천'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나는 힘이 빠진다. 영화의 끝에서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외치는 전임의 말간 미소는 체념의 결과일까. 끊임없이 별과 별 사이를 움직이며 연대해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는 무겁고도 차가운 물음을 남긴다. 답을 할 수 없어 괴로워하며, 그저 서로를 향해 내비치는 희미한 빛이 꺼지지 않기만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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