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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막걸리를 아침햇살로 번역하는 당돌한 어린이들!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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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빵하게 부푼 막거리통을 꾹꾹 눌렀다가 뚜껑을 열면, 탄산이 푸쉬쉬 빠진다. 뚜껑을 열기 전까지 톡톡거리며 말을 걸던 녀석들이 뚜껑을 열자마자 잽싸게 도망간다.『막걸리가 알려줄거야』(2024)는 이 모습과 참 닮은 영화다. 영화는 우리 사회에서 아주 오래 묵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를 만큼 오른 아동 권리 침해를 꾹꾹 눌러 담았다. 곧 터질 것 같은 이 문제를 상상력으로 톡톡 두드린다. 그리고 뚜껑을 열자, 폭발해서 이리저리 내용물을 튀기더니, 푸쉬쉬하고 맥빠지게 맺는다. 참 매력인 아동 권리 영화다.
동춘의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와 학원으로 가득 찬 시간표를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하루하루를 바삐 사는 어린이다. 휴대전화도 공신폰만 쓰는 그에게는 어머니의 기대에 따라 사는 삶이 당연하다. 숨 쉴 틈 없이 빡빡한 동춘의 시간표와 자신의 삶을 한탄하는 어린이들의 대화는 명쾌히 이 시대 어린이의 상황을 보여준다. 하루 종일 그들의 보호자라 주장하는 어른들이 정한 시간표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삶. 자신의 의견은 묵살된 채, 그들의 지금보다 저들의 미래를 그리는 삶. 갑갑하다.
하지만 맹랑한 어린이들은 이것에 순응하지만은 않는다. 간신히 마음 붙인 학원을 입시 제도 변화로 또 바꾸겠다는 어른에게 반항하는 어린이. 빡빡한 시간표 사이에서도 어른이 설정한 차단을 뚫어, 휴대전화에 게임을 설치하는 어린이. 그들은 꿋꿋이 자기 주장을 하고, 어른의 논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중 최고는 단연 동춘이다.
동춘은 맹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눈빛, 흐리멍텅한 시선, 느린 말투 모든 것이 맹하다. 늘 어른이 짜놓은 계획대로 사니, 맹하지 않을 수가 없다.(비록 동춘은 맹함이 매력적이지만!) 이렇게 맹한 동춘은 우연히 막걸리를 발견한다. 톡톡 탄산을 터뜨리며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한 막걸리를 아침햇살 통에 몰래 가져온 동춘은 처음으로 어른의 논리를 거역한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지만, 설레기도 하다.
어른의 논리를 거역하자, 동춘은 어린이의 논리에 따라 막걸리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 영화에서 막걸리의 소리는 어린이 내면의 소리이다. 어른은 감각하지 못하는, 어린이만 감각할 수 있는 소리. 동춘은 입시에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 수업에서 배운 모스부호로 막걸리의 말을 들을 수 있었고, 한국어와 가장 멀리 떨어진 아랍어로 막걸리 말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었다. 내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자, 동춘은 자신만의 목표를 세운다. 막걸리(내면)의 의도를 성취하자! 그리고 이를 위해 동춘은 질주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어른의 논리는 거추장스런 방해물이고, 어린이의 논리는 명쾌하고 즐거운 대안이다. 막걸리의 의도를 멋지게 알아내기 위해, 동춘은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왕왕 해낼 수 있다. 휴대전화 차단 설정을 해제하고, 모르는 아저씨와 대화하고, 밤에 몰래 나가기도 하고, 부모에게 대들기도 한다. 즐겁게 질주하는 어린이의 논리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흥미에 따라 질주하는 동춘은 끝내 막걸리의 의도를 파악해 낸다. 그것은 어린이 혁명이다. 어른의 세상에서 벗어나 어린이만의 세상을 꿈꾸는 것. 밤새 질주하던 동춘이 전 세계의 어린이가 몰려든 공장에서 막걸리를 붓자, 어린이들은 혁명을 완성한다. 자신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한 선택은 그들을 비로소 자유케 한다. 모든 것이 폭발하고, 어지럽혀지고, 뒤섞이며.
아주 흥미롭게 폭발하는 결말로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질주하는 이 영화는 어린이에게 말한다. 반항하라! 혁명하라! 어린이의 논리를 수호하라! 참 필요한 말이다. 어른은 어린이의 말을 듣지 않는다. 어린이를 ‘미래의 주인’이라 칭하며, 그들이 ‘오늘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어른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에서, 어린이는 단순히 어른의 논리를 반복할 뿐이다. 동춘을 도와주던 삼촌처럼, 그들을 도와준다는 어른조차도 끝내 어른의 논리에 따라 어린이에게 같잖은 충고를 한다. 자신의 논리를 인정받지 못했던 과거는 잊은 채. 어른은 어린이를 믿는 듯 보여도 믿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린이가 아니니까.
하지만 어린이는 다르다. 그들은 그들만의 논리를 공유하고, 그들끼리 연대한다. 서로의 시간표를 비교하고, 불평하고, 부모에게 자신이 낼 수 있는 최선의 목소리를 낸다. 어른의 논리 속 모순을 기가 막히게 찾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기꺼이 자신의 흥미를 찾아 떠나기를 꿈꾼다. 단지, 더 이상 어른에게 자신의 주장이 먹히지 않는다고 좌절한 이들과 끝까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영화는 막걸리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 끝까지 투쟁하라고 권한다. 어린이의 권리는 어린이만 감각할 수 있고, 어른은 알지 못한다. 마치 동춘의 막걸리가 막걸리인 줄도 모르던 부모의 모습처럼. 그리고 막걸리가 알려주는 미래를 믿지 못하는 어른들처럼.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마음껏 부풀리라 권한다. 큰 통에 막걸리를 담아, 더 많은 막걸리를 만드는 동춘처럼 넓은 세상을 꿈꾸고 마음껏 자신의 흥미를 발산하라고.
그렇게 맞이한 영화 속 어린이 혁명은 어떤 모습인가. 참 유쾌하고 힘 있으면서도, 허무맹랑하고 김빠진다. 어른의 논리를 벗어나 이룩한 어린이의 세상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허상인 것처럼. 마치 모든 어린이가 죽는 것 같은 결말은 암담한 현실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어른에게 있다. 끝까지 동춘을 믿어주지 못하고 그 뒤를 밟아오던 어른들에게
어린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어른의 기준에 맞춘 세상에서 어린이는 늘 약자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어른도 없고, 믿어줄 어른도 없다. 그래서 어린이에게는 막걸리가 필요하다. 자신의 목소리이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대상이. 막걸리만이 알려줄 수 있다. 어린이가 누구인지를. 그들이 무엇을 해야할 지를.
그렇기에 어른은 어린이에게서 막걸리를 빼앗아 가면 안 된다. 그렇다면 어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린이의 막걸리(내면)를 마실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어른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대안을 아침햇살로 표현한다.
어린이는 아주 멋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번역할 수 있다. 어린이 내면의 목소리가 막걸리라면, 이를 어른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번역한 것이 아침햇살이다. 동춘의 막걸리를 기가 막히게 숨겨주던, 막걸리와 똑 닮은 그 음료처럼 어린이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어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무언가로 번역해 말한다. 다니던 학원을 계속 다니고 싶다고 말하며, 휴대전화 기능 차단을 우회하며, 자신이 흥미있는 수업에 몰두하며,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그러니, 어른은 그 아침햇살을 기꺼이 마셔야 한다. 그들은 어린이의 막걸리는 이해할 수 없어도 아침햇살은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것이 어린이 혁명의 완성을 김빠지는 씁쓸한 결말이 아니라 톡톡 쏘는 달콤한 결말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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