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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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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영화적 형상화 : <괴인>과 <딸에 대하여>를 중심으로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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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영화적 형상화 : <괴인>과 <딸에 대하여>를 중심으로
장지애 2024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영화 <괴인>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순백의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형상화된다. 영화와 꿈의 유비라는 오래된 논제는 꿈의 장을 관객의 내부에서 외부로 확장함으로써 가능케 한다. 바로 관객 자신의 모습까지 지우게 만드는 극장의 어둠을 통해. 그런데 <괴인>은 미처 관객이 꿈의 장으로 완벽히 진입하기 전, 세계를 새하얗게 표백하는 듯한 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여실히 드러낸다.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괴인>의 오프닝은 영화 전반의 분위기와 영화가 타자를 제시하는 방법과 무척 닮아있다.
<괴인>에서 제목만큼이나 의미심장한 인물들의 예기치 못한 등장은 늘 놀라움을 수반한다. 타이틀 시퀀스 이후 좁은 골목 가장 바깥에서 형상이 잘 드러나지 않는 두 인물이 나타난다. 이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두 그림자가 한 건물로 들어선다. 그런데 먼저 계단을 오르던 기홍이 경준을 깜짝 놀라게 하고, 놀란 경준은 건물 밖으로 튕겨져 나온다. 대화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아주 친밀한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한 침입’이 문득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다. 침입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잠을 청하기 위해 공사를 맡은 피아노학원에 무단으로 난입하려 한다. 술에 취한 탓인지 도어락을 제대로 열지 못해 경고음을 울리게 만드는 두 사람을 어둠이 집어삼킨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전환된 쇼트에서 기홍은 쇼파에 누워 잠을 청하고 경준은 화장실 문이 잠겨 있다며 의문을 표한다. 여기서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두 사람이 도어락을 ‘여는’ 장면이 없다는 것. 영화란 본래 효율적인 내러티브 전달을 위해 시공간을 압축하고 생략하기 일쑤기에 문을 여는 장면은 불필요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괴인>에서 문을 여닫는 행위가 타자와의 마주침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 생략은 의미심장하다.
영화사적 관점으로 타자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리 신선한 기획이 아닐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세계 영화사에서 타자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주로 카메라의 윤리라는 문제와 더불어 사유 되어 왔다. 카메라와 대상의 관계, 그리고 그렇게 포착된 성격이 달라진 대상과 관객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활발히 논의되는 담론이다. 최근 한국 영화가 타자를 다루는 경향을 단순히 일반화하는 건 무리한 시도지만, 그럼에도 범박하게나마 짚어보자면 타자들은 자본주의 메커니즘의 난점으로써 사회적 약자만으로 존재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카메라는 이들을 연민과 슬픔으로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제 타자들은 과거만큼 카메라에 의해 착취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카메라의 윤리를 명목으로 거리를 두는 만큼 이들은 관찰되는 대상으로 다시 희생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간혹 우리는 영화에서 젊음이 향수를 불러일으키거나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정의되는 현상을 자주 목격한다. 소위 청춘 드라마라고 불리는 장르의 특징은 불확실한 상황에 열정 하나로 맞서며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굽히지 않고 결국 성공에 이르는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에 가깝다. 혹은 그러한 청춘의 소모적인 성격에 대한 반발로 어두운 사회에 침잠한 청춘의 이면을 그리기도 한다. 최근 몇 편의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콜센터 상담사’라는 역할이 후자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영화에서 주로 ‘그녀(그가 아닌 그녀)’들의 신체를 인간성의 가장 마지막 단계를 마주하는 소외된 인물들로 그리고 있다. ‘그녀’들의 신체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 과거 일용직 노동자에 해당하는 ‘그’들의 신체가 변이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칠수와 만수>(1988)와 <우묵배미의 사랑>(1990)과 같은 영화에서 재현되는 남성 일용직 노동자의 신체는 생생하고 거친 이미지로 그려진다. 이들 작품에서 ‘그’의 육체는 도시와 산업 사회의 혼란과 고난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강인한 힘을 발산하며, 영화의 서사와 미학을 이끌어가는 주된 동력으로 작용했다. 한편 <혼자 사는 사람들>(2021)과 <다음 소희>(2023)에서 여성 콜센터 상담사들의 신체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그녀’들의 신체는 반복되는 노동만을 내재화한 존재로 그려진다. 카메라는 이 인물들을 타자화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 거리두기는 오히려 또 다른 형태의 관조적 소외를 발생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그’들의 신체가 (누군가 그것을 의도했든 안 했든 간에) 인간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내포되어 있었던 반면, ‘그녀’들의 신체는 무기력함만이 부여된다. 즉, 이런 부류의 영화는 ‘그녀’들에게 오로지 기계적인 신체성만을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타자와의 직접적인 대면에 부담을 느낀 영화는 결국 타자라는 실체로부터 점점 멀어지며 타자를 대면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영화에서 재현되는 타자들은 단지 관객을 위해 존재하는 인물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죄의식을 씻기 위해 스크린이라는 제단 위에 바쳐진 제물로서 말이다. 결국 영화가 타자성을 재현하기 위해 시도해야 하는 것은 윤리라는 무거운 압력에 짓눌려 타자와 더욱 먼 거리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적으로든 미학적으로든 카메라와 관객의 의미망 속으로 해석되지 않는 관계의 틈을 여실히 드러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이미랑의 첫 장편 <딸에 대하여>가 인물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시도에 대해 말하고 싶다. <딸에 대하여>는 사회적인 문제와 개인의 문제라는 다양한 층위를 부드럽게 아우른다. 여전한 차별 문제와 더불어 돌봄권, 대안 가족 그리고 나 자신에 관한 문제가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영화는 무엇하나에 대해 투쟁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다만 우리 곁에 존재하는 많은 문제들을 진득하고 묵직하게 지켜본다. <딸에 대하여>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의해 함몰되지 않으며, 단순히 사회적 전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들은 삶 속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들에 휘말리지만, 그 사건들이 자신의 존재를 결정짓는 절대적인 계기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에게 침투하는 타자들과 상황 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사회적 전형성과 개인적 주체성 사이에서 진동하는 독특한 존재론적 상태를 보여준다. 이는 인물이 고정된 역할로 소비되는 것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스스로의 위치를 재구성하는 실천을 통해 구현된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보자. 영화의 모든 사건과 이야기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와 그녀가 보살피는 제희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로 엄마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 딸 그린(Green)과 동성애인 레인(Rain), 네 여성의 이야기로 함축된다. 이러한 인물 구성은 가장 먼저 엄마와 딸의 첨예한 갈등을 예상케 하지만,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영화는 이미 너무나도 잘 알려진 김혜진의 동명 소설을 각색했다. 영화가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소설에서는 서술자인 ‘나’의 심리에 집중한 반면, 영화에서는 딸을 둔 중년 여성인 ‘나’는 물론이고, 카메라의 시점이 등장인물 대부분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이야기가 서술된다는 점이다. <딸에 대하여>는 비슷한 여타 작품과는 달리 독특하게도 엄마와 딸의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예상치 못한 ‘관계’들에 주목한다. 엄마는 딸보다는 가족 없이 늙고 병든 제희에게 딸의 미래를 투영하면서도 오랜 시간 딸의 옆을 지켜왔던 레인을 못마땅해한다. 하지만 이들의 불편한 동거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런데 영화에서 네 인물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너무나도 단순하게 제시됨으로 인해 오로지 ‘관계’ 그 자체만 남게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사건’들은 주로 스크린 너머에 존재한다. 대학 강사로 일하는 딸은 함께 재직 중인 동료가 억울하게 해고되자 앞장서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영화의 카메라는 격렬히 저항 중인 딸의 모습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택시를 타고 딸의 학교를 찾은 엄마의 먼 시선으로 언뜻 제시할 뿐이다. 보통의 영화라면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의 폭발적인 갈등 양상을 보여줄 법도 하지만, <딸에 대하여>에서는 단지 택시 안의 엄마 얼굴과 그 바깥으로 밤새 사투를 벌이는 딸의 행위를 하나의 프레임에 병치시켜 놓는 데 만족한다. 여기서 엄마의 시선은 끊임없이 딸에게 머물러 있지만, 딸의 시선은 그 너머로 확장되어 세계를 향한다. 이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포착되는 것은 엄마와 딸 사이의 관계적 역학뿐만 아니라, 딸이 아닌 그린과 세상 사이에서 형성되는 또 다른 관계의 긴장이다.
그것은 영화에서 나와 타자라는 균열 된 틈 사이에 존재하는 이름과도 관련된다. 예컨대 어떤 규범과 규칙, 사회적 통념으로도 포획될 수 없는 자신이 되기를 꿈꾸는 그린과 레인은 기존의 질서에 의해 지어진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이름은 징후다(Nomen est Omen)’라는 로마의 오래된 이 격언을 스스로 체화하는 두 인물의 이름은 엄마인 정은에게는 못마땅한 처사다. 그것은 엄마와 딸이라는 전통적인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린과 레인의 이름이 서로를 향할 때, ‘엄마-딸’이라는 안정된 관계는 단절되며 엄마의 존재는 희미하게 사라진다. 엄마의 공간인 집에서조차 자신의 소유가 되지 못하는 그린과 레인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불안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에서 ‘새로운 이름’은 단순히 기존의 의미를 끊어내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기보다는 다양한 의미를 수집 가능케 하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작용한다. 제목에서처럼 ‘딸’이라는 이름은 네 주인공을 모두 포섭하면서도 끊임없는 관계의 재설정을 이루어 낸다. 그것이 영화의 제목이 <엄마에 대하여>가 아닌 <딸에 대하여>인 이유다. 단 하나의 인물만을 지시하지 않는, 고정되지 않은 존재의 변화 가능성을 예증하는 회로로서 ‘딸’이라는 이름은 무척 의미 있다. 이름을 잃은 제희에게 ‘딸(엄마)-제희’라는 이름을 다시 돌려주기도 하듯이 말이다.
<딸에 대하여>를 존재의 영화가 아닌 관계의 영화라 부를 수 있는 까닭에, 영화는 화면 안에 한 인물이 어떻게 존재하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보다는 둘 이상의 인물이 어떻게 공존하게 할 것인가에 집중하는 듯 보인다. 즉, 영화가 다루려는 것은 어떠한 존재의 유일성이 아닌 관계의 다층성에 관한 것으로 집중된다. 그것은 집이란 공간을 구성하는 인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앞서 밝혔듯이, 딸과 딸의 친구가 아닌 그린과 레인이 엄마의 공간을 침입했다는 것은 엄마에게 큰 불안감을 안긴다. 자신의 공간을 침범한 레인에게 엄마는 나가줄 것을, 그리고 자신의 딸을 그린으로 부르지 말 것을 요청한다. 이때에도 카메라는 서로에게 가장 낯선 존재인 두 사람의 얼굴을 뚜렷이 잡아내지 않는다. 엄마와 레인은 함부로 서로의 민낯을 마주하기보다는 서로에게 뒷모습을 보이거나 여닫히는 문을 사이에 두고 엇갈려 포착된다. 그것은 서로의 존재가 침입하듯 교차하지만, 엇갈리는 시선의 방향을 통해 카메라는 그 침입이 단순히 공격적이거나 불안만을 초래하지 않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날 선 대화들조차 타자의 표피에 직접적으로 부닥치기보다는 시선의 경로를 따라 끝이 살짝 무뎌진 채 타자에게 가 닿는 것처럼 느껴진다. 즉, <딸에 대하여>에서 타자의 침입은 상대의 존재를 위협하거나 잃게 만드는 대신, 새로운 대안 가능성을 제안한다. 그것은 불확정적인 관계 속으로 열림이다. 여기서 가족이라는 기존의 질서는 붕괴하기보다는 확장되고 재구성된다.
이때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한 장면이 판타지 형식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괴인>에서 기홍이 피아노학원의 문을 여는 장면이 생략되어 있던 것과 약하게 공명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딸에 대하여>의 네 인물은 시간의 부드러운 리듬을 따라 한 집에 모여 살게 된다. 각자에게 낯선 자들은 단지 같은 공간에서 지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과 같은 형상을 띤다. 침입의 형상은 식구가 된다. 레인은 네 식구의 식사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먼저 잠든 제희를 깨우러 방으로 들어간다. 제희를 깨운 후 창밖으로 마당에 있던 그린과 엄마를 부른다. 네 사람은 소박하지만, 생기가 넘치는 저녁을 보낸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은 다소 기이하게 느껴진다. 레인이 제희를 깨우기 위해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반복되면서 관객은 잠시 혼란에 빠진다. ‘다음날인가? 누군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편집 오류인가?’라는 짧은 의심이 스친다. 그사이 이야기는 직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급격히 선회한다.
예상치 못하게 관객에게 침입하는 ‘이상한’ 이미지는 누군가의 꿈이라고 할만한 근거도 부족해 보인다. 영화는 줄곧 엄마의 시선을 따라오는데, 반복되는 이 장면에서 엄마는 가장 늦게 합류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두 갈래의 가능성을 모두 포섭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복되는 시퀀스는 인물 각자의 불안과 결핍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공존하며 관계의 간극을 지우지 않고서도 병존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즉, <딸에 대하여>가 다루는 것은 인물들의 사건이 아닌 그들의 삶 자체처럼 보이게 된다. 잘 알다시피 수많은 이야기는 사건의 발생과 해결이라는 커다란 메커니즘 속에서 작동한다. 일시적으로 발생하고 해결되기만을 기다리는 ‘사건’을 하나의 큰 축으로 구성하는 영화도 그 메커니즘의 작동에서 예외일 수 없다. ‘사건’은 늘 지속되는 삶에서 분리되어야만 하는 운명을 지닌다. 사건의 해결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삶에서 완전히 배제되거나 흡수된다는 두 상태를 의미하는 데, 전자나 후자나 사건을 맞닥뜨린 관계 중 하나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딸에 대하여>는 카메라가 프레임 바깥으로 살짝 밀어내버린 사건들 덕분에 인물들이 지속되는 자가 삶 속에서 서로의 관계가 단지 해결되어야 할 하나의 사건으로 폄하되는 것을 중단한다. 가족의 형태를 구성해 나가는 네 인물에게 있어 정상성의 범주에 속하는 가족의 틀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다. <딸에 대하여>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서로의 기준에 맞게 변모시키지 않고 자신 모습 그대로 가족이라는 새로운 집합을 형성한다(이것은 <딸에 대하여>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식의 대안 가족 만들기와 궤를 달리하는 지점이다). 물론 각자의 이중성도 긴장 상태로 여전히 유지된다. 딸을 이해하려고 가장 노력하는 사람이면서도 그런 딸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이 여전하듯이.
<딸에 대하여>라는 영화의 제목은 딸이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를 투영하는 데서 온 것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완료되지 않은 문장은 이 투영이 끊임없이 지속될 것임을 상기하는 것만 같다. 이상하게도 딸로만 이루어진 가족의 형태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무화(無化)를 지향하며 불화와 거부까지도, 소외와 배제까지도 포용한다. <딸에 대하여>의 불편한 동거는 조용하고 침착하지만 날카롭게 메시지를 전한다. 지속될 삶 속에서 우리의 관계가 갈등이 아닌 색다른 공존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영화만의 포용법을 간절히 믿어보고 싶은 이유다.
여기 다시, <괴인>을 소환해 보자. <괴인>에서 인물들이 서로 마주하는 순간은 언제나 깨질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을 여닫는 장면은 다소 서투르고 때로는 위험에 이르게 하는 타자와의 만남을 상징한다. 그것은 오프닝의 표백된 스크린처럼 겉으로는 친밀해 보이지만 그 안에 숨겨진 낯섦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면들은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불안과 불확실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타자와의 마주침이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고 불안정한 결과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괴인>이 시도하는 것은 미끄러지는 관계를 억지로 붙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계속해서 미끄러지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즉, <괴인>은 관계 맺기의 실패와 그로 인한 불안정함을 단순히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영화의 중요한 리듬으로 삼아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맥락에서 <괴인>은 서사의 밀도보다는 분위기를 통해 ‘침입하는 타자’를 포착한다. <괴인>은 집 없는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변주를 통해 영화의 내러티브를 구축한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독립된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채, 타인의 공간을 침범할 수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진 듯 보인다. 집이 없는 인물 하나와 독립된 공간을 소유하지 못하는 기홍, 좁은 방 한편을 꽉 채우며 몸을 눕히는 경준은, 영화의 후반에 밝혀지듯이, 영화가 시작될 때부터 이미 물리적으로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생략된 이들의 마주침은 영화 전반에 걸쳐 파편적으로 분산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하나의 존재는 소리와 이미지로 분리되어 나타난다. 소리와 이미지가 따로 존재함으로써 하나의 존재는 영화 내에서 온전히 인지되기 어렵고, 그 분리된 형상은 관객에게 불완전한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분리는 ‘하나’라는 이름과 역설적으로 맞물리며, ‘완전한 단일성’ 의미하는 이름과 달리, 그의 존재가 끊임없이 분열되고 파편화되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이들이 처한 상황, 즉 공간의 목적과 개인의 필요가 일치하지 않는 상태는 차이밍량의 <애정만세>와도 무척 닮아있지만, <괴인>은 <애정만세>식의 허무와 죽음의 기운 대신 기묘하고 ‘괴상한’ 희망의 기운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무래도 그것은 관계 맺기의 다양한 변주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희망은 낙차를 통한 ‘추락’이라는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예를 들어, 기홍은 옥상에서 계단을 내려오던 중 창 너머 연인의 모습을 몰래 엿보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추락한다. 그리고 또 다른 추락이 있다. 그것은 정환의 집에 세 들어 살게 된 기홍이 차 지붕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고 범인을 찾기 위해 정환과 함께 피아노학원에 다시 찾아갔을 때 벌어진다. 잠긴 문을 두드리는 정환의 소리에 놀란 하나는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이미 블랙박스에 기록된 사건의 재현인 이 장면에서, 기홍은 이전과는 다른 위치에 서게 된다. 기홍은 닫힌 문을 열려는 정환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관망하는 관객의 자리로, 하나는 차 지붕 위로 떨어지며 내었던 ‘쿵’하는 소리(혹은 흔적)의 영역에서 옥상에서 미끄러지던 기홍의 자리로 이행하며 관계의 회로를 전복한다. 봄(시선)과 추락의 이중 구조는 고정된 관계 설정을 교란하며, 실패한 관계 맺기를 포기하지 않고 재설정하도록 돕는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희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여기서 희망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낙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희망은 되려 미래의 가능성을 되짚어보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어떤 것이다. 만약 <괴인>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였다면, 추락은 타자에 대한 거부를 매혹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읽힐 것이다. 하지만 <괴인>은 그러한 거대한 서사적 전환이나 기술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추락과 연관된) 계단과 물의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된 계급 문제는 봉준호의 <기생충>을 연상시키지만, <괴인>의 ‘괴인들’은 그러한 경계에 도전하고 넘어서려다 좌절하는 <기생충>의 인물들과도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린다. 그들은 경계의 존재를 암시할 뿐, 그 경계를 넘기 위한 직접적인 시도나 욕망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 ‘괴인들’은 단지 끊임없이 분리되고 연결되는 관계망 속에서 솟아나는 우연과 만남에 관한 우화를 만들어 낼 뿐이다. 즉, 희망은 관객과 인물 사이에 그리고 인물과 인물 사이에 관계가 끊임없이 분열되고 다시 쓰이는 관계를 만들어 내는 데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영화의 형식과 관련해 타자와의 관계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거리’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영화에서 인물 사이의 거리는 멀어졌다 좁아지기를 반복한다. 거리는 정환과 기홍뿐 아니라 기홍과 경준, 하나 뿐만 아니라 관객 사이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인물 사이의 거리감으로 인한 분열은 여느 영화처럼 즉시 갈등으로 점철되진 않는다. 다만 이들 사이에 미세하게 조정된 간극 사이에는 관계의 전환이라는 희망이 자리한다. 예컨대, 정환은 자신의 이층집 컨셉을 ‘분리와 연결’이라고 설명하며, 분리되어 있지만 언제나 시선을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을 구성했다고 밝힌다. 그는 세 들어 사는 기홍에게 이층을 통해 자유롭게 드나들 것을 권유하지만, 기홍은 번거롭더라도 문을 통해 소통하기를 원한다. 정환은 경계를 흐리게 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기홍은 물리적 분리에도 불구하고 더 명확한 경계를 유지하려 한다. 이 때문에 정환의 연결 가능성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와의 관계를 열어젖히고, 기홍의 분리 가능성은 가장 가까운 정환과의 단절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상반된 태도는 타자와의 단순한 소통 방식의 문제를 넘어 관계 맺기의 다양한 층위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것은 영화의 내러티브가 비교적 구체적이고 지시적인 데 비해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 혹은 갑작스레 틈입하는 이미지들 사이에 명확히 설명되지 않은 빈 공간(틈)이 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기홍이 옥상에서 미끄러지며 휴대폰 액정을 깨뜨린 것을 상기해보자. 깨진 액정의 검은 얼룩은 그전까지 사실적이었던 이미지를 불완전한 것으로 급히 전환한다. 이 깨진 화면은 이후 기홍과 현정 그리고 은주가 나란히 앉은 이미지에 구멍을 내는 돌 오브제와 공명한다. 영화는 이미지의 파열과 그로 인한 시각적 결여를 통해 관계의 균열과 결핍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럼에도 (괴이한 오프닝의 마법처럼) 관객과 타자의 관계를 모호하게 비트는 <괴인>에게서 타자의 새로운 존재 가능성이 보인다. 기홍에게 있어 단 하나의 ‘열림’은 현정의 노크에 대한 반응이다. 그러나 그 열림이 둘 사이 혹은 셋 사이의 관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미지수다.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관계의 변화 그 자체뿐이다.
<딸에 대하여>도 <괴인>도 영화가 응축하는 사회적 함의들은 스크린에 억지로 새겨넣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의 연쇄에 자연스레 뒤따른다. 이것이 영화가 타자를 마주하는 영화적 형식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의미화를 구조화하는 것이 아니라 침입의 형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뒤따르는 관계들이 의미를 새롭게 지웠다 다시 새겨넣는 것을 바라보는 것. 이것으로 두 작품은 기존 타자를 포착했던 연민과 희생의 서사구조에서 멀리 달아난다. <괴인>의 엔딩 시퀀스는 애매모호한 표정을 띤 기홍의 얼굴을 다시 순백색의 빛나는 스크린으로 되돌려 놓는다. 존재는 결코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괴인> 그리고 <딸에 대하여>가 전복하는 타자의 형상은 불확정성 속에서 모두가 함께 숨 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 침입의 형상은 불확정적인 미래인 동시에 곧 기꺼이 받아들여질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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