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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희> - 사방의 벽으로 갇힌 소희에게 보내는 한 줄기 빛2023-02-07
다음 소희 스틸

 

  

<다음 소희> - 사방의 벽으로 갇힌 소희에게 보내는 한 줄기 빛

 

 

박예지 (2022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영화에 나오는 말마따나, 일이 힘들면 일을 그만두면 된다. 그런데 왜 소희(김시은)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죽음을 택했나? 정주리 감독의 신작 <다음 소희>(2023)는 지방 특성화고 현장실습으로 통신사의 콜센터 일을 하던 소희의 석연치 않은 자살 사건을 다룬다.

  영화는 데칼코마니 형식으로 전개된다. 2부의 주인공인 형사 유진(배두나)1부의 주인공인 소희가 죽은 호수에서부터 시작해 소희가 죽기 전에 밟았던 행적을 거꾸로 따라 올라간다. 그 과정에서 유진이 발견하는 것은 취약한 어린 학생들을 도망치지 못하는 사지로 용의주도하게 몰아넣은 구조의 촘촘함과 견고함이다.

 

다음 소희 스틸

 

  소희가 했던 일은 단순 상담이 아니라 인터넷 서비스 해지를 원하는 고객들이 해지를 하지 못하게 막는 ‘2차 방어였다. 소희가 속한 통신사는 부러 겹겹이 쌓아놓은 복잡한 해지 절차 속에서 과중한 위약금이라는 채찍, 상품권이라는 당근으로 고객들의 해지를 막는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구조도 소희가 일을 그만두지 못하도록 방어를 한다. 직장은 소희가 바로 그만둘까 봐 보험으로 인센티브를 ‘2달 뒤지급하겠다고 하며, 선생님은 취업률이 낮아지면 학생들과 학교에까지 피해가 간다며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소희를 강하게 만류하고, 엄마는 회사 그만둘까라고 하는 소희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친구들은 소희보다 낫지 않은 삶을 겨우 버텨내면서 원래 돈 버는 게 다 그렇다고 하며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가능성을 막아버린다. 인터넷 해지를 막는 방어는 2차 방어까지 있고, 콜센터 직원인 소희가 일을 그만두지 못하게 하는 방어는 말 그대로 사방四方에 있었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죽음을 막는 방어 구조는 없었다.

  도저히 사람을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드는 장벽들. 알고 보면 악인은 없고 다 자기 위치에서 애를 쓴 것뿐이라 변명하지만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한 한 마디 한 마디가 소희에겐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하는 벽으로 다가왔고 결국 죽음을 택하게 했다.

 

다음 소희 스틸

 

  구조가 어린 학생을 그토록 압박하는 이유는 사실 그가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취약하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을 지킬만한 충분한 방어막이 없다는 뜻이다. 어린 학생의 첫 사회생활 경험은 평생을 좌우한다. 기본이 지켜진 곳에서 인권과 노동권을 보장받으며 일해보지 않은 사람은 평생을 착취당해도 그게 비정상이라는 걸 잘 모른다. 본능적으로는 느끼지만 주변의 모두가 원래 그렇다고 하면 반박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체념하게 된다.

  소희는 사실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창업교육을 받았더라면 같은 전공의 친구들과 애견 관련 사업을 열 수도 있었을 테고, 하물며 편의점에서 알바를 해도 콜센터 보다 좋은 환경에서 기본급을 다 받으며 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방에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으면 서울에 가면 된다. 어디든 갈 수 있다. 하지만 소희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몰아세우면 갈 곳이 없어지고 사방이 막힌 곳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죽음뿐이다.

 

다음 소희 스틸

 

  형사 유진은 배두나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하나의 기호로서 적극 활용한 캐릭터다. 유진은 감독의 전작 <도희야>(2014)의 영남(배두나)처럼 어떤 이유로 인해 지방으로 좌천당한 경찰/형사이지만, 인물의 배경이나 서사는 전작보다 더 배제되어 있다. 유진은 배두나가 지금까지 출연했던 영화들-<도희야>(2014), 드라마 <비밀의 숲>(2017), <브로커>(2022)-에서 구축된 정의로운 경찰로서의 아우라를 갖고 영화 안에 등장한다. 한 소녀의 죽음을 파고들 마땅한 이유도, 끝까지 조사할 수 있는 권리도 없는 위치에서 형사 유진은 배두나이기 때문에가능한 수사를 벌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비현실적인 정의 실현으로 관객들에게 대리 만족을 안겨주는 판타지 영화가 아니다. 형사 유진은 결국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판타지적인 면은 의외의 부분에 있다. 인물들을 단순한 가해자/피해자가 아니라 다층적인 면을 지닌 복잡한 존재로 그렸던 전작 <도희야>에서처럼, <다음 소희>의 소희 또한 단순히 불쌍한 피해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소희는 꽤나 폭력적인 사람이다. 소희는 자신의 존엄을 침해하는 것들에 대해 거침없이 항변하고 폭력을 사용해서까지 대응하는 사람이다. 소희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누군가를 퍽퍽 때릴 때마다, 나는 큰 희열을 느꼈다. 현실에서 누구나 상상하지만 감히 저지를 수는 없었던, 가해자들에 대한 폭력을 소희는 쉽게 행한다. 비록 영화 안에서 소희는 죽었지만 소희가 살아생전 했던 소소한 저항들은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관객들에게 위반의 쾌감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다시, 사방의 구조로 돌아온다. 영화의 첫 쇼트는 사방이 막힌 연습실에서 힘껏 춤을 추는 소희의 모습이다. 마지막 쇼트에서 소희의 춤은 핸드폰의 사각형 안에 갇힌 채로 반복된다. 하지만 그런 소희의 영상을 보는 형사 유진의 오른쪽 창문에선 환한 햇빛이 쏟아진다. 소희가 죽기 직전 들렀던 가게에서 소희의 발에 쏟아졌던 한 줄기 볕처럼. 누가 소희에게 원래 다 그렇다고 말하는 대신 바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영남과 소희가 연습실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소희는 죽음 대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을까? ‘문 앞에 서 있는 한 명의 소녀를 구하는 것만으로는 더이상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견고하고 복잡하게 몇 겹으로 중첩되어있는 비인격적 구조이다.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소희들이 갇힌 견고한 구조물을 헤집다 겨우 작은 틈을 낸 후에 멈춘다. 그 틈을 넓혀 빛을 새어 들어가게 할 수 있는 건 영화를 본 관객들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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