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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의 단말마 : <클라이밍>2021-06-21
클라이밍 스틸이미지

 

 

줄의 단말마 : <클라이밍>

 

문형석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클라이밍>의 첫 쇼트에서 카메라는 어렴풋이 등장하는 탯줄을 타고 올라가 태아를 비춘다. 그리고 다음 쇼트에서 꿈에서 깨어난 세현을 잡는다. 여기서 두 육체를 연결하는 도구로써 탯줄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태아가 세현(김민지)의 몸에 연결되어 있는지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만약 세현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원한다면 카메라는 거꾸로 태아에서부터 탯줄로 거슬러 올라가 이음새를 강화하지 않았을까. 때문에 줄의 이미지와 더불어 쇼트들은 연결되어 있음에도 단절감이 강하게 든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영화는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의 세현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나의 태아에 두 명의 모체가 연결되어 있기에 부상하려 하는 단절감은 세현의 현실을 일그러뜨리기 시작한다.

 

클라이밍 스틸이미지

 

 처음에는 클라이머 세현의 현실이 현재고 임산부 세현의 현실이 과거인 듯 두 현실의 요철이 맞물리면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형태로 인식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임산부 세현의 현실과 클라이머 세현의 현실은 서로 다른 세상임을 알게 된다. 이우인(구지원)의 생사여부 같은 직접적인 구분점도 있으나 영화는 보다 흥미로운 차이점으로 이를 암시하기도 한다. 예로 두 세현의 현실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 면적을 통해서다. 클라이머 세현의 현실은 집에서 체육관, 대회장 등으로 넓어지고 여러 인물과 접촉한다. 하지만 임산부 세현의 현실은 외부와의 연결 없이 시어머니 노인화(박송이)와 그녀의 집만이 존재하는 어딘가 불편하고 낯설며 종종 숨 막히기까지 하는 공간이다. 두 세계의 교집합엔 오로지 세현의 스마트폰이 있을 뿐 그 외에 어떤 물리적 공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클라이밍>은 두 세계를 구분하기 위해 폴리곤 양의 차이점과 밀도차를 이용하여 영화 속 현실을 가로지르는 작업을 한다. 또 다른 예로 클라이머 세현이 자신의 집에서 마구잡이로 꺼내먹었던 음식에 비해 인화의 집에서 음식은 임산부 세현이 찾아도 나오지 않고 오로지 인화의 손에서만 생산되며 제한된다. 체중계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운동선수로서의 세현보다 음식이 필요한 임산부의 세현에게 음식이 부족한 이 상황은 우인과의 관계로 이어진다. 이 비대칭의 해소는 욕구를 미끼로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도록 유도하고 막바지에 이르러 인화의 집을 무대로 파국에 치닫기 시작한다.

 

 영화가 끝난 다음 자연스레 떠오르는 물음은 ‘어느 현실이 진짜 현실일까?’일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물음에 답을 내리는 것보다 흥미가 가는 것은 복수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마찰의 부스러기가 서로의 현실을 암약하는 현상, 그리고 이 현상에 잠식되어 가는 세현의 현실이 일그러지는 방식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의 구성요소가 얼기설기 정립해대는 세현이 어떤 형체를 하고 있는가가 <클라이밍>의 흥미로운 부분이다. 결국 <클라이밍>의 현실은 구분하기보다 정합해야 하며 그 기준은 공간이 아닌 세현의 형체다. 하지만 세현의 형체를 바라보기 위해 가장 필요한 도구는 공간이다.

 

클라이밍 스틸이미지

 

 그러한 점에서 임산부 세현이 머무르고 있는 인화의 집은 <클라이밍>의 가장 주요하면서 의문스러운 공간일 것이다. 인화의 집은 우리가 현실을 저울질하는 하나의 세계이지만 실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 본디 가지고 있던 가장 협소하던 물리적 영역을 파괴하며 이미지를 확장해 나간다. 나름의 답을 내리자면 이 집은 세현의 육체와 정신을 해체한 후 재조립한 인상이다. 이를테면 임산부로서의 몸을 체험하며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불균질한 몸의 불편함을 자신의 집이 아닌 노인화의 집에 머무르는 세현의 불편한 상태로 조립해냈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러한 점에서 간혹 인화의 존재는 마치 또 다른 세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여태 영화에서 표현된 인화의 모습과 세현의 임신에 대한 인화의 태도가 우인과 결부되면서 세현이 가지고 있을 어미로서의 본성이 표현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대로 후배 김아인(박송이)은 클라이머로서의 세현의 욕망을 비춰볼 수 있을 듯싶다. 실력에 대한 욕망이라기보다 직업인으로서 어떤 제약 없음에 대한 것 말이다. 아인이 락커에 숨겨놓은 스테로이드는 사건의 도화선으로 작동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최고가 되기 위해 어떤 일이든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음에 대한 위버멘쉬(Übermensch)에 가까운 욕망이 아닐까. 다시 반대로 넘어가 인화가 만든 애저찜은 세현이 거부한 매운탕과 대조되며 아이에 대한 욕망으로 보인다. 이처럼 세현과 인화, 아인에는 어떤 강렬한 연결선이 보인다.

 

 영화에서 총 3번 나온 손찌검이 그 연결선의 중추로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서 나온 손찌검의 대상 인물은 식당에서 마주친 모자, 선후배 사이인 세현과 아인, 예비 시어머니와 예비 며느리 사이인 세현과 인화다. 모자로부터 시작된 이 손찌검의 관계는 묘한 결속력을 가진다. 하지만 긴밀한 관계 안에서 불편한 거리감을 표출시킨다. 손찌검이라는 행동이 불러일으킨 것일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것은 연결 속에 존재하는 단절감이다. 이 관계는 세현과 아인의 선후배 사이로 확장되다가 이내 인화와 세현의 관계로 다시 수렴한다. 여기에서 영화는 연결, 또는 관계라는 일종의 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줄은 정말로 연결하는 것일까. 일련의 사건 이후 아인과 세현은 산에서 같이 훈련을 하다가 바위에 고정된 등산 고리가 떨어져 나가며 아인이 추락사한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세현과 아인의 이어진 줄이다. 보통 여타 다른 영화에서 추락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은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물건이 없을 때 성립한다는 점에서 <클라이밍>의 줄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후에 세현이 라커룸에서 시뻘건 내장이 흘러내리는 듯 쏟아지는 빨간 줄들을 보는 숏은 곧 체육관에 있는 절벽의 공간들이 흘러내리며 세현이 인화의 집으로 떨어지는 숏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인화의 시체가 떨어지는 숏과 대회에서 세현이 떨어지는 숏까지 연결되며 영화는 연신 추락을 연결 짓는다. <클라이밍>은 탯줄을 시작으로 영화 속에 존재하는 줄의 연결성에 추락을 내재하며 이질감을 기워낸다. 그러고 보니 세현의 스마트폰에 새겨진 금은 언뜻 거미줄처럼 보이기도 한다.

 

클라이밍 스틸이미지

 

 환상과 거울을 시작으로 <매트릭스>(1999)의 전화와 <퍼펙트 블루>(1997)의 PC통신으로 또 다른 자신을 대면하던 20세기의 자화상들은 21세기에 스마트폰으로 수렴되는 듯하다. 현시대에 스마트폰이라는 물건이 얼마나 개개인에게 깊숙이 침투한 기기가 되었는가는 굳이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그 깊숙이 침투한 곳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들이 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고 싶다. 영화 속에서 자주 쓰이는 거울과 같은 도구에 형상이 뚜렷이 잡히는 또 다른 자신과는 달리 스마트폰 너머에 존재하는 자신은 정해진 형상이 없다. 동시에 보다 다수이고 복합적이며 실생활에 밀접하다. 그렇게 스마트폰은 개개인이 맡고 싶은 역할과 맡아야 하는 역할의 집합으로 작동한다. <클라이밍>의 스마트폰은 세현의 세계를 잇는 이음매로 작동하며 세현은 그 한 뼘의 고리에서 자신이 맡아야 하는 역할, 맡고 싶은 역할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액정의 금은 결국 복수의 역할에 대한 극도의 피로감을 피력하고, 추락하며 새겨진 것이 아닐까.

 

 영화의 말미에 병실에 있는 세현은 앞의 두 세현과 또 다른 현실이다. 마치 여태까지의 이야기가 꿈인 듯 세현은 멍한 눈빛을 하며 아이를 안고 있다. 그리고 수유하며 돋아나는 따끔함에 아기의 무는 힘을 알아채며 신음을 뱉는다. 동시에 문 바깥에서 문을 열던 또 다른 세현이 이내 사라진다. 수유를 통해 세현들을 잇고 있던 줄이 끊어진 것일까. 그리고 그 끊어짐으로 세현은 세현 본인이 된 것일까. 마지막에는 단 한 명의 현실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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