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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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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부에나 빛, 좋은 아이레: 임흥순 감독론2021-05-14
임흥순 감독 이미지

 

 

부에나 빛, 좋은 아이레: 임흥순 감독론

 

 

김나영(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이 글은 임흥순의 극장 상영용 장편 영화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포옹> 역시 논의에서 제외했다.)

 

위로공단 스틸 이미지

 

   <위로공단>(2014)이 한국 작가 최초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받은 후 이 작품을 둘러싼 평자들의 논의가 마냥 호평 일색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위로공단> 이전 제주 4.3 사건을 다룬 <비념>(2012)에서 이미 <위로공단>을 이끄는 주된 방법이었던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이들의 증언, 그 사이를 채우는 풍경과 재연 이미지를 볼 수 있고, 이와 같은 요소들은 <위로공단> 이후로도 임흥순의 작업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이룬다. 그의 작업에 대한 비평적 판단에는 풍경 이미지나 재연 이미지가 역사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의 문제가 중심이 된다.

그의 작업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입장에서는 임흥순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정동이 문제적이라고 지적한다. 증언에 뒤이은 풍경 이미지는 피해자의 고통을 대리 표상하는 정동적 형상이며 정동은 역사적 차원의 사건을 이야기할 때 어떤 일이, 왜 벌어졌는가의 반성적 사유의 차원으로 확장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다. 대개 이런 방식의 접근은 순간의 감정적 호응에 그치며, 공적 차원의 역사와 사적 차원의 경험을 분리시킴으로써 오히려 역사적 맥락 속에 있는 개인의 삶을 탈역사화 하는 측면이 있다. 또 이러한 비판에는 고통의 전시에 내재되어 있는 외설적 측면까지도 고려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이나 풍경 이미지 스스로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임흥순의 자연이나 풍경 이미지를 하나의 공백으로 보기도 한다. 역사적 사건을 정동의 차원으로 연결한다고 말하기에는 실상 풍경 스스로 말하는 것은 없다. 풍경 이미지라는 비어 있는 기호는 역사에 공백의 차원이 있음을 지시한다. 이를 공백으로 남아 있는 역사적 사태의 재현 불가능성으로 읽거나 이러한 회의적인 입장에 그치지 않고 역사는 말해지지 않은 것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적극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혹은 임흥순의 풍경 이미지는 자연에 응축되어 있는 거대한 시간으로부터 경험의 진술이라는 사적 측면을 공적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시도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위로공단 스틸 이미지

 

이처럼 임흥순의 풍경 이미지는 가득 찬 정동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증언과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이질적인 감각으로 읽히기도 한다. 영화의 풍경은 어떻게 감각되느냐에 따라 역사적 사건의 바로 그 현장이라는 지표적 성격을 가지기도 했다가 감정적 상태의 재현물이 되기도 한다. 풍경 이미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상반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임흥순의 재연 장면은 진술을 보충하는 기능적 장면이기도 했다가 손쉽게 해석되지 않는 추상적 표현이 되기도 한다. 임흥순의 작업에서 풍경과 재연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은 이 이미지들이 영화의 중심인 인터뷰의 성격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임흥순이 다루는 역사적 사건들은 국가가 자행한 자국민 학살 사건이며 이것은 사건 당시엔 은폐되고 증거가 인멸되었다가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에 의해 뒤늦게 폭로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정체를 드러낸 사건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인멸되었거나 시간이 지나며 사라진 증거들을 보여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역사를 어떻게 가시화할 것인가의 문제는 시각 예술인 영화가 특별히 역사에 가지는 부채이자 섬세하게 수행해야 할 과제로 여겨진다. 은폐되어 왔던 역사적 사건의 경험 당사자의 인터뷰 내용, 즉 말이 비가시적 성격의 것이라면 증언의 과정에서 동반되는 표정과 눈물은 시각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영역에 있다.

 

비념 스틸이미지

 

 

임흥순의 카메라는 현장에서의 즉흥적 상황이 아니라 준비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인터뷰에서도 말의 내용만큼 집요하게 가시화해야 할 대상인 것처럼 인물들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잡아낸다. 영화 안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바처럼 <비념>이나 <위로공단>이 작가의 주변 인물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은 분명 인터뷰 대상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 기록 장치 이상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카메라 움직임이 마치 피해자를 향한 친밀감, 위로하고 싶은 작가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이것은 영화가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위로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미지들이 배치된 것으로 읽히는 가장 큰 이유다.

반면 또 다른 한편으로 봤을 때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말하고 있는 사건의 증인을 바로 지금 보고 있다는 본다는 행위의 현재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카메라의 집요한 시선과 움직임 그 자체다. 여기서 임흥순에게 감정을 보여준다는 것은 공감과 이입을 유도하는 과거 고통의 증언 차원이라기보다 지금도 이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현재형의 문제로 바라볼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읽힌다. 이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현재의 당면한 문제로 끌어올리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려행 스틸이미지

 

<위로공단>에서 그 역할이 풍경 이미지와 거의 같은 위상에 있던 재연-퍼포먼스 이미지는 <려행>(2016)에서 경험 당사자의 자기 경험의 재연-퍼포먼스로 성질이 변하면서 과거의 경험을 현재화된 이미지로 제시하는 시도를 강화한다. 그러나 <려행>의 시도는 탈북의 경험을 당사자의 육체로 다시 수행해 보일 때, 재연에 의해 표면화되는 것이 육체적 감각들에 그친다는 한계에 부딪힌다. 사적 경험에 역사성을 매개해 재언어화하기에는 경험과 재연의 물리적 거리 너무 가까운 것이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스틸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2018)은 항일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제주 4.36.25 전쟁, 빨치산이라는 역사적 지점들을 재연할 때 <려행>에서와는 다른 시도를 한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에서 과거의 역사적 사건은 경험 당사자에 의해 증언(책과 주변인의 증언을 포함)되고 재연은 남한에서 나고 자란 젊은 세대의 일반인 여성과 탈북 여성에 의해 재연된다. 재연 배우로 참여한 이들은 재연 장면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재연한 인물의 후손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촬영 현장에도 동행하면서 마치 과거가 현전한 것만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과거를 재연한 배우들을 현재 시점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현장에 동참시킨 데에는 또 다른 의도도 엿보인다. 이것은 이후 배치된, 이들이 작품에 참여한 소감을 말하는 장면과도 연관되는데 이들은 이 작품의 참여를 통해 재연의 주체 간의 차이(남한과 북한), 재연의 대상의 경험과 자신들의 역사 인식 사이의 차이가 줄여졌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임흥순이 체험의 교육적 차원에 거는 기대를 반영해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이것은 재연이라는 수행적 차원이 담지하고 있는 교육의 효과로 기대되는 가장 바람직한 방향(“역사 공부가 어려웠는데 직접 체험해보니 이해할 수 있었어요.”)이어서 오히려 어쩐지 미심쩍은 대답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이것은 차라리 체험의 페다고지를 재연한 것 아닐까.

재연에 참여한 이들의 대답을 표면 그대로 본다 해도, 그랬을 때 오히려 역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경험 당사자의 반응이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3채널 전시 영상을 경험의 당사자가 직접 보는 장면이 삽입된 부분이다. 재연의 대상이 되는 이는 재연에 참여한 이들이 임흥순의 작업을 하나의 훌륭한 서사로 완성시키는 반응을 보이는 것과 대비했을 때 오히려 더 두드러지는 불투명한 반응을 보인다. 막상 당사자가 자신의 경험이 재연된 장면을 보면서 보이는 반응은 마음이 아팠어요.”라는 짧은 소감이다. 이 차이에 대해 생각하면서 임흥순의 근작 <좋은 빛, 좋은 공기>(2020)를 본다.

 

좋은 빛, 좋은 공기 스틸

 

좋은 빛, 좋은 공기 스틸


 

 

   <좋은 빛, 좋은 공기>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한국의 광주에서 40여 년 전 일어난 군사 정부의 시민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군부 독재에 의한 페론주의 공산주의자 대량 실종이, 광주에서 역시 군부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군 병력을 동원해 무차별 진압한 사건이 있었다. 영화는 두 사건 모두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다수의 실종자가 있으며 실종자 가족들은 여전히 이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 작품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건의 경험 당사자들의 이야기 사이에 배치된 두 도시 학생들의 워크숍 장면이다. 두 도시의 학생들이 서로의 지역에서 일어난 비극적 역사를 공유하기 위한 목적의 워크숍에서 시도되는 방법이 VR 영상 제작이라는 점은 실종과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던 물리적 장소의 훼손이라는 상황과 의미 있게 연결된다.

컴퓨터를 이용해 만들어진 가상공간을 마치 실재하는 장소를 체험하는 것처럼 시각화하는 기술인 VR<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실재하지 않는 장소를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맵핑을 통해 실제 장소를 촬영한 소스를 2차원 평면에 3차원 공간으로 구현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학생들이 그들의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 당시의 동작을 재연한 이미지와 합성되는데, 광주의 학생들이 재연한 광주에서의 폭력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경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학생들의 동작은 광주를 배경으로 합성된다.

흑백으로 진행되던 영화가 컬러로 전환되는 것은 영화 종반부에 학생들이 그린 스크린을 배경으로 동작을 수행하는 장면에서부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지 합성을 위해 초록색 배경이 사용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쑥갓이라는 제목의 이 장을 컬러로 시작하는 것은 명백히 서로 다른 공간에서 이루어진 두 개의 사건을 겹쳐 보이기 위한 장치인 녹색 스크린을 눈에 띄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 장면은 역사적 현장을 직접 경험했던 당사자들이 옛 장소를 방문해 기억을 더듬는 과정과 병치되는데, 화면은 다시 흑백으로 전환되고 카메라의 시점은 이들의 어깨 너머 동선을 따라 움직이면서 학생들의 재연 장면과 시각적 대조를 이룬다.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옛 병원, 수용소 건물에서 사건의 경험자들을 따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이 장면의 구성은 VR 이미지를 떠올릴 때 보다 잘 알려진 체험의 순간을 상기시킨다.

화면이 컬러로 전환되는 것은 빈 건물 이미지에 5.18 와중에도 열렸던 시장의 쑥갓을 보고 생명력을 느꼈다는 이야기가 보이스 오버로 나올 때이다. 이 이야기가 지닌 힘은 병원 유리문 너머 녹색의 잎들을 밝히는 주문처럼 이중의 의미에서 과거를 현재로 (다시) 데려온다. 이처럼 녹색은 쑥갓의 생명력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두 개의 장소, 두 개의 시간, 두 개의 역사를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내는 힘을 가진 색이다.

한편으로 녹색은 누구나 VR 안경을 쓰기만 하면 실감나는 체험을 할 수 있는 시대에 그것을 방해하는 색이다. 학생들은 그들의 이미지가 제작되는 자기반영적 장소,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배경 앞에서 움직여야만 하고 영화는 그 과정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좋은 빛, 좋은 공기>는 지구 반대편의 거리, 40년의 시차를 단번에 좁힐 수 있다고 말하는 대신 공통의 비극 안에 있는 두 역사의 특수성을, 체험의 환영 속에 있는 시간의 두께를 이미지의 다층적 의미화를 통해 감각하게 하고, 함께 보여준다. 이처럼 임흥순에게 역사적 비극을 돌아보는 것은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까지 함께 생각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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