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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테일 오브 테일즈>- '추함의 미학'2016-08-18
테일 오브 테일즈 스틸컷

<테일 오브 테일즈>- '추함의 미학'

* 강 연 :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
* 장 소 : 영화의전당 소극장
* 일 시 : 2016.08.18 19:00


이 영화는 ‘잠바티스타 바실레‘라는 나폴리 출생의 사람이죠. 1566년에 태어나서 1632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나폴리의 공무원을 하셨던 분이십니다. 이 분이 30년에 걸쳐서 민담을 수집을 했습니다. 나폴리 언어로 문학적으로 가공을 해서 50개 이야기를 동화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책이 서양역사로 보면 서양에서 처음 나온 동화책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이야기들이 이 책에서 파생되어진 부분도 상당히 많고요. 오늘 영화는 50개 이야기 중에 3가지를 골라서 그걸 또 감독이 재가공을 해서 만든 영화입니다.

 

로쿤토(lo cunto)는 나폴리의 사투리입니다. 저 동화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또는 조금 전 보신 영화를 이야기하는 분들이 주로 두 가지를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과도한 욕망을 조심해야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바로크’를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나머지 절반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 이야기를 사람들이 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께 나머지 절반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고, 앞에서 언급했던 바로크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고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제목을 ‘추함의 미학’이라고 잡아봤습니다. 오늘 나머지 절반에 대해 말씀드린다고 했는데 솔직히 다른 사람들은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나머지 절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잠바티스타 바실레가 살았던 시기가 우리로 치면 임진왜란 전후입니다. 당시에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나오던 시대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 같은 경우, 임진왜란이 지나면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그늘’이라는 개념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판소리 계통에서요. 그리고 지리산 폭포 밑에서 노래를 부르고, 연습을 해서 목에서 피가 나면서 남원 같은 곳에 가서 판소리를 보여주는 거죠. 열심히 불렀는데 듣던 사람 중 하나가 “노래 속에 그늘이 없네.” 라고 하면 이 사람은 꽝인거죠. 그래서 다시 지리산 가서 피토하고 있는 거죠. 이 그늘이라는 것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부정적인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이상적인 면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추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늘이 없으면 완성된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생각이 나오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늘이 들어가야 어떤 아름다움이 완성된다는 생각은 역설적이고 모순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유럽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바실래가 살던 시기에 엄청난 사회격동기가 일어났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럽: baroque

유럽에서 불완전한 아름다움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나온 것이 대표적으로 ‘바로크’입니다. 바로크는 저 그림하나로 인상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르네상스 때는 저런 진주가 르네상스적인 아름다움이다. 그야말로 원만하고 아름답고 고전적이며 이상적입니다. 그런데 바로크라는 말은 ‘바로코’라는 포르투갈어에서 나왔는데요, 찌그러져있는 진주라는 뜻입니다. 저런 찌그러져있는 진주에서 오히려 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더 좋으신가요? 지금도 저런 타원형 진주를 가지고 바로크 진주라고 부릅니다.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오른쪽 귀걸이를 보시면, 귀걸이 모양이 동그라미가 아닙니다.

르네상스vs 바로크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그림 한장으로 정리 해 드리겠습니다. 바탕에 보이는 그림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교회의 단면설계도입니다. 눈으로 봐도 가운데 원이 중심으로 되어있고, 그리고 십자가 형태로 직선이 되어있습니다. 정사각형, 직선, 원으로 구성되어있고, 중심이 분명히 제시가 되어있는 이런 것들이 르네상스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아주 이상적이고 완전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바로크식이라는 것은 찌그러져있는 진주라고 말씀드렸지만 타원형의 미학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바로크에서 한 가지 더 짚어보고 싶다는 것이 타원이라는 것입니다. 원의 중심은 하나죠. 타원의 초점은 몇 개일까요? 중심이 있고 양쪽으로 초점이 하나씩 있는 것이 타원이죠. 중심에서 벗어난 하나의 초점, 이것이 바로크에서 주고 싶은 핵심내용입니다.

 

르네상스식 교회 가운데에서 소리를 내면 어떻게 될까요? 소리가 모두 중심으로 되돌아 옵니다. 그런데 타원형으로 된 초점 군데서 소리를 지르면 그 소리가 모두 다른 초점으로 넘어갑니다. 런던의 성바오로 성당 같은 경우에 이쪽 회랑에서 이야기 했는데 저쪽 회랑에서 더 잘들립니다. 그런 신기한 일이 있어 조사를 해보니 타원형으로 설계되어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설명이 됩니다. 하나의 초점이 다른 초점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가 바로크의 중요한 초점이고 오늘 보신 영화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바로크의 과학, 사회

바로크에 대해서 설명할 때 잘 다루지 않는 부분에 대해 말씀 드리고 있는데 이어 캐플러 천문학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캐플러는 바실래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조금전에 말씀드렸듯이 초점이 두 개가 있는 타원인데 저 그림을 보시면 원래는 태양을 중심으로해서 별들이 완전한 원을 그리며 돈다고 생각을 했습 니다. 그런데 캐플러가 처음으로 타원 주장을 했죠. 어떻게 보면 우주가 찌그러지고 불완전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당시에는 굉장한 이슈였습니다. 타원이라는 말을 영어로 엘립스(Ellipse)라고 합니다. 타원이라는 말을 찾아보면 문장 부호로 말줄임표입니다. 타원이 왜 말 줄임표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타원이라고 말할 때 생략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뭐가 생략이 되었는가하면,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 그러면 초점이 두 개가 있다고 했는데 나머지 한쪽 초점은 무엇일까요? 드러난 초점은 태양인데 숨은 초점은 무엇인지, 이것이 생략되어졌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겁니다. 천문학자들이 의미는 없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숨은 초점에 더 관심을 많이 가지고, 드러난 초점과 숨은 초점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은 제임스 조이스의 <검은 태양>이라는 작품 그리고 다큐멘터리 <검은 태양> 같은 것들이 이런 발상에서 나오는 겁니다. 바로크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두 개의 초점관계에서 심층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당시 현실상황과 부합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현실상황이 어땠는가 하면 로마 가톨릭이 전부였는데 가톨릭을 믿지 않으면 유럽에서는 이단이고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공원에서 화형해서 죽일 정도였으니까요. 1550년에 ‘화의’라는 것이 열리고 개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을 합니다. 가톨릭 외에 개신교도 하나의 초점으로 인정한다는 겁니다. 유럽전통사회에서 보면 이건엄청난 일입니다.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으로 인정 한다는 것, 악마를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뜻이고요. 그리고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새롭게 상인들이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귀족이 전부였던 시대에서 상인계층이 또 하나의 초점으로 올라오는 시대다. 두 개의 초점을 하나로 인정할 수밖에 없던 것이 캐플러 천문학과 같이 간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엘글로코_탈 중심 또는 두개의 초점

엘글리코 그림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엘 글레코는 바실래와 거의 동시대에 사람인데요. 오른쪽 그림을 보시면 예수 그림인데 초점이 두 개가 있습니다. 우리 눈에 드러나는 예수가 있고, 윗부분에 있는 예수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입니다. 이제는 예술작품에 있어서 바로크에서는 중심이라는 것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원래 고전예술에서는 중심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행사를 하고 나서 어른을 중심에 앉히고 사진을 찍잖아요. 그런데 바로크시대에는 다릅니다. 두 개의 초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크는 농민전쟁이 30년이나 일어났던 시기입니다. 전쟁을 30년을 하면 그 후유증은 말도 못합니다. 바로크는 엄청난 고뇌 속에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또하나의 보이지 않는 초점에서는 영혼을 생각하는 이 두 개가 정신분열적으로 동시에 이루어진 예술인거죠.

미로, 곡선 주름

바로크를 상징하는 것이 미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미로인가 하면 중심이 정해져있으면 정답을 찾기가 편합니다. 직선으로 달려가면 되지만 이제는 정답인지 아닌지 그런 시대가 아닌 것입니다. 단일경로, 직선의 어려움이 미로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상직이 곡선으로 가다보면 곡선이 겹쳐지고 겹쳐지면 중첩이 되어 주름을 만들게 됩니다. 바로크의 또 다른 상징은 주름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성데레사의 법열로 주름이 엄청나죠. 옷에 주름지면 어떻습니까? 주름을 잡더라도 다리미로 예쁘게 잡고 싶지 저렇게 쭈글쭈글하게 된 것은 원래 추함으로 보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바로크적인 아름다움이고, 제가 제목을 단 ‘추함의 미학’의 한 축입니다. 왼쪽 이미지를 보면 왕이 용을 잡겠다고 헬멧을 쓰고 물에 들어가는데 그때 바다 물결과 절벽에 주름이 묘사되어있는 것은 굉장히 바로크적인 것이다. 오른쪽 그림은 박피에 성공한 우리의 ‘도라’. 머리카락과 옷 주름 이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또 하나의 미학은?

또 다른 절반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로테스크라는 겁니다. 왼쪽그림을 보시면 덩굴이 있습니다. 그 끝에 사람이 달려있고 그 옆에 동물이 있는데 날개가 달려있고 이상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발견 되었는가 하면 1500년경 로마에서 많이 발견이 되는데요. 그로테스크라는 말이 그로타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그로타는 동굴을 뜻하는데, 로마시대의 건축물에는 인공적인 동굴이나 지하 창고 같은 것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여왕이 처음에 쌍둥이 하나를 이상한 지하에서 쫓아가는 모습 기억하시죠. 그런것들이 꼭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냉장고 같은 것이죠. 1500년경에 로마를 대대적으로 발굴을 했는데 거기서 이런 고대벽화들이 쏟아져 나왔고, 인간, 동물, 식물 형상을 변형하고 접목시킨 그림들이 나왔는데 사람과 동물의 경계, 사람과 식물의 경계가 사라지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은 우월하고 동물은 열등하다는 것도 없습니다. 경계와 위기가 사라진 이상한 그림들이 나오는데 모순적이고 역설적이다. 이것은 지하세계 형상이 아닌가, 괴물형상이 아닌가 하며 그 시대에 엄청나게 비난을 했습니다. 여기서 그로타, 그로테스크라는 말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실레가 채록한 민담 속에 많이 들어있다는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바로크 외에 또 다른 절반이라는 겁니다.

 

그로테스크의 미학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는데요. 러스킨과 바흐친 이 두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러스킨은 영국 사람으로 그로테스크의 두 요소를 우스꽝스러움과 무서움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배경그림에 있는 것이 말뚝이입니다. 말뚝이 탈의 모습은 웃기기도 하면서 무섭기도 합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그로테스크입니다. 웃긴 것과 무서운 것은 정반대인데 이것이 동시에 가능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로테스크다 하면 기괴하다, 괴기하다 이런 것들인데요. 그것으로만 끝난다면 그로테스크가 아닌 것입니다. 이중적인 감정이 동시에 나와야 하는 겁니다.

 

바흐친은 그 점을 조금 더 강조 했습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치는 400년 동안 민중의 문화에서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 굉장히 팽배했습니다. 이 사람이 주목했던 모델은 빌링스게이트(Billingsgate)라고 하는 시장입니다. 이 시장은 우리 자갈치 시장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굉장히 거친 언어를 쓰고 자갈치 축제와 같이 축제를 합니다. 어떤 내용이 있는가하면 권위를 격하시키는 축제내용이 많습니다. 우리도 탈춤 이런 것을 할 때 양반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것처럼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위계가 전복되고, 양반과 상놈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겁니다. 탈춤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과는 상관성이 많고,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전체적으로 웃음으로 승화되는 구조입니다.

 

동화책에서는 어떤 그로테스크적인 요소를 들 수 있는가. 저는 오거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거가 중요한 이유가 바실레의 동화책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전 민담 속에는 거인이나 늑대입니다. 50개 이야기 중에서 14개의 오거가 등장합니다. 처음으로 등장한 후에 유럽 전체에서 오거 개념이 유행하게 됩니다. 원래 오거라는 것은 문명과 적대적인 타자로 완전히 인간과 다른 적인 거죠. 원래 우르쿠스라는 단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지하의 신 하데스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특징이 뭐든지 먹어 치웁니다. 두 번째 특징은 못생겼습니다. 세 번째 특징은 사람과 격리된 공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거의 마지막 특징이 마법을 부립니다. 모습을 바꿀수도 있고요. 그래서 로쿤토의 동화책에서 오거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괴물과 인간은 완전히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이 동화책에서는 벗어나고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괴물 속에도 인간성이 있고 사람 속에도 괴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 제시한 겁니다. 이 존재를 통해서 바로크가 아닌 그로테스크 미학으로 전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내 속에는 괴물 같은 면이 없는지 한번 돌아보고 반성하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적 배경1_생명의 연속성

어떻게 오거 개념이 바뀌어서 등장하는가 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볼 수 있는데 자연과학적 배경과 사회적 배경이 있습니다. 자연과학적 배경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림을 보시면 사람과 사슴과 닮았다. 저 사람은 사자를, 두루미를 닮았다. 이런 연구를 진지하게 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우월하고, 동물은 절대적으로 낮은 존재였다는 것이죠. 그런데 저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절대적으로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연속성상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더 발달하면 진화론에 이르는 겁니다. 동양에서는 관상학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서양에서도 관상학이 있고, 신비스러운 미신이 아니라 자연과학자들이 진지하게 연구했습니다. 델라포르타라는 사람이 당시 최고의 과학자였는데 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였습니다. 사람과 괴물이 절대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연속적인 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한 배경이 되는 겁니다.

테라톨로지_비정상적 출산, 바다괴물

두 번째 ‘테라톨로지‘라는 것은 괴물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당시 비정상적 출산에 대한 연구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어떤 보고들이 있는가 하면, 아비뇽의 처녀가 개를 낳았다. 어떤 마을의 여자는 식물을 낳았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바다괴물에 대한 연구가 많았습니다. 저 시대에는 대항해시대잖아요. 본인들이 본 괴물을 기록하는 겁니다. 오른쪽그림은 베네치아 주변에 산다고 기록된 것입니다.

 

저런 연구를 통해서 괴물은 진짜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 사람들의 동화책에서 괴물이라는 것은 어떤 환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돌연변이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괴물이라는 것은 어떤 신의 저주, 악마의 음모로 괴물이 들어난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 시대부터 자연법칙에 따라서도 괴물이 만들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사람도 DNA법칙에 의해 만들어 지듯이 돌연변이도 그런 법칙에 따라 생성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딸이 괴물에게 시집을 가야하는 상황이 오고, 아버지는 어쩌면 이것이 섭리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 합니다. 괴물도 자연법칙에 따른 존재일 수 있다는 말이라는 것이죠.

미시, 거시세계 연구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에 대한 연구가 굉장히 활발해 졌습니다. 이 괴물은 가스탈디라는 선장이 바다에서 발견한 바다괴물을 그림으로 그린 겁니다. 그래서 괴물의 이름은 발견한 선장의 이름을 따서 가스탈디라고 부르는데, 이 동화책을 지은 사람이 두 살 때 본거죠. 문제는 저 괴물을 본뒤로 아무도 본사람이 없어서 지금 인정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오른쪽은 벼룩인데, 1590년부터 현미경 연구가 많아집니다. 그러니 저런 것을 보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엄청난 괴물들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현미경 역사에서 중요한 후크라는 사람이 있는데, 현미경을 발명해서 처음 본 것이 평생 할아버지가 이를 안 닦은 사람에게 입똥을 긁어서 본 것이 처음입니다. 우리가 인간만 세상에 사는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 같이 살아가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오거나 괴물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또 한번 생각하게 된 것이죠. 사람과 공존하고 있구나. 인간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주인은 아니다 라는 생각을 보여 주는 작가가 미야자키 하야오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상징적 배경

사회적 배경은 간단하죠. 이교도를 사람으로 인정하기 시작했고, 상인 계층이 올라온 것도 대등한 계급으로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어떤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그런 속에서 전통적으로 저 동화책 이전의 괴물은 거의 늑대 같은 것들이었는데, 왜 오거로 바뀌게 되었는가하면, 오거가 사람보다 더 가까운 것 같다는 겁니다. 오거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괴물의 성격을 표현하는데 훨씬 더 적합한 상징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거인은 그 뒤로 목격한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거인은 창조주 적이기도 하고, 그리스 신화 크로노스는 제우스의 아버지이고 태초의 신인데, 자식이 태어나면 다 먹어치우는 존재이죠. 늑대는 일단 사람이 아니어서 비유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늑대와 오거의 큰 차이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말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시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들은 말이 없어요. 그러니까 만나자 마자 치고 박고 싸우는 겁니다. 오거는 말하는 존재로 사람과 말이 되는 존재. 요즘 말로는 타자 인거죠. 저런 짐승 같은 사람을 표현하는데 오거가 적합하다. 왼쪽사진을 보시면 호색한 왕이잖아요. 저 사람은 여자를 다 먹어치우는 식인 인거죠. 원래 군사적인 왕으로 영토를 정벌하는 것처럼 여자를 정복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 사진들을 전리품처럼 전시를 해 둔 것이고요. 그런데 자기가 생각하는 여인이 아니라고 창밖에 집어던지는, 그런 부분은 사람이 아닌 거죠. 저런 사람은 오거에 더 가까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때까지 동화작품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내용으로 보면 민담이 그로테스크 요소이고 오거가 그것을 대표한다. 그것을 문학적인 방식으로 가공을 해서 동화책을 만들어 내는데 문학적으로 가공하는 방식은 바로크 방식이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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