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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렛 더 선샤인 인>-‘사랑의 언어'2018-04-12
렛 더 선샤인 인 스틸컷

 

<렛 더 선샤인 인>-‘사랑의 언어'

 

* 일시 : 2018.04.12(목) 19:00
* 장소 : 영화의전당 소극장
* 강연 :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 (철학박사)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등장했죠. 줄리엣 비노쉬라던가 제라르 드빠르디유 같은 사람들 올드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시던 분들은 굉장히 좋아하던 배우들이 이 영화에 많이 등장했고, 클레르 드니 감독 같은 경우에는 한국에도 많이 방문하고 해서 작품을 잘 알고 계실 텐데 오늘 영화는 약간 또 다르게 처음으로 감독이 제작한 코미디 영화라고 이야기 합니다.

 

클레르 드니는 진지하신 분이라 코미디 영화를 잘 안 만드셨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제작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남자들이 대체로 느끼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고, 줄리엣 비노쉬의 청순하고 순진하고도 순수한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이지훈의 시네필로를 1월부터 진행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여자가 주인공이거나 여자감독의 작품을 연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한 마디로 간단하게 정리해보았습니다. 사랑의 주체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코미디 영화다.

 

사랑의 주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보통 연애하는 사람들의 정도가 아니고, 나중에 말씀 드리겠지만 이 감독이 특히 염두 해 두었던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서 정의한 바로 보더라도 사랑의 주체라는 것은 그냥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이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그런 사람을 말합니다. 가볍게 연애하는 달콤한 그런 사랑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의 주체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코미디 영화라고 할 때, 사랑의 주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사랑하는 주체인데 사랑을 해야만 그리고 사랑을 할 때에만 살아있는 존재다. 오늘 영화 제목과 연관을 시키면 불어 원래 제목으로는 ‘내 안에서 빛나는 태양’이잖아요. 빛나는 이라는 말로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의 주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요. 여자 주인공 ‘이자벨’은 사랑의 주체다. 사랑의 주체의 중요한 특징 중에 ‘사랑이 사람보다 먼저다’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정말 사랑을 하고 싶어서 사랑을 하지 않으면 이 존재는 존재 가치가 없어지고 삶을 살수가 없기 때문에 사랑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 강하고, 사람은 그 속에서 고른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마지막에 점장이 찾아갔을 때, 이 사람이 좋을까 저 사람이 좋을까 이런 식이라는 것은 어차피 대상은 부차적인 것이고 사랑을 계속 할 수 있을까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는 거죠. 이런 존재가 사랑의 주체라는 것이죠. 이런 대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정말 사랑을 하고 싶어”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정말 사랑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사랑의 주체이고, 오늘 여자 주인공이 그런 존재이며 바르트가 쓴 책은 그런 존재에 대한 어떤 내용과 그 언어들을 살펴 본 책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단상 표지 

 

롤랑 바르트가 쓴 『사랑의 단상』의 표지 사진을 보면 손을 잡고 있죠. 그림의 한 부분인데 손을 잡고 있다는 것만 일단 관심을 가져주시고, 저 책에 보면 바르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의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이지 대상이 아니다.’라고 까지 이야기 합니다. 정말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말하자면 잘 엮어질 때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지 사랑이라는 것이 더 중요한 근본이라는 것이죠. 부산 말로 ‘아다리’라고 하나요. ‘아다리’가 되면 그 사람이 되는 것이고, ‘아다리’가 안 되어도 다른 사람이라도 좋다는 것이죠. ‘사랑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나는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어!’ 이런 존재가 사랑의 주체인 것이죠. 바르트는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욕망’ 사랑을 말하는 거죠. ‘사랑의 대상은 도구일 뿐이다.’라고 까지 정의하는데, 이런 존재가 사랑의 주체이고 오늘 주인공은 그런 존재를 묘사한 것이고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르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가장 슬픈 건 상상계의 죽음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내가 지금 우는 것은 내가 그이를 잃어버려서 우는 게 아니라 사랑을 잃어버려서(사랑을 못하기 때문에 슬퍼서) 우는 것이다.”라고 하는 구절이 『사랑의 단상』에 나와 있습니다. 이제 어떤 사람인지 대충 감이 오시겠죠. 상상계의 죽음이야말로 가장 슬픈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사랑을 못하게 되기 때문이죠. 상상계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내 상상을 통해서 계속 증폭되고 지속되고 하는 것이잖아요.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완벽하게 내 꿈속에서 만들어 나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진실이나 실제와 거리가 있고, 내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더 크고, 사랑은 상상계의 활동인데 그것이 죽는 것이 제일 슬프다는 겁니다.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이 사랑의 주체라고 할 수 있고, 오늘 주인공이 그렇습니다. 결말부에 웃음을 한번 생각해보면, 줄리엣 비노쉬가 너무 청순하고 멋있게 웃는데요. 프랑스 여자 배우 중에서 웃는 모습이 제일 좋은 배우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멋지게 웃는 이 모습을 바르트식으로 해석을 한다면, 그 점쟁이가 한 말들은 다 소용이 없고, 무엇 때문에 웃었냐고 하니까 그가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가 돌아온다고 해서 웃는 다기 보다 사랑을 계속 할 수 있어서 웃는다고 해석을 해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배우가 돌아오는지 아니면 50세 흑인남자가 돌아오는지 그런 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사랑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에 더 기뻐서 희망을 가지고 다시 사랑을 불태워야겠다고 스스로가 다짐하면서 웃는 것이다. 바르트식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주체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한 사람에게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옮아 갈 수 있다. 이 사람도 될 수 있고, 저 사람도 될 수 있고.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하고 이 사람들의 사랑이 다른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들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목숨처럼 중요한 것이지만 환상적인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진짜 사랑,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사랑은 없다는 거예요. 사랑의 본성은 환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때 사랑의 주체에는 사랑이 환상인 줄 알면서도 사랑을 계속하는 존재입니다. 바르트는 이런 것을 ‘사랑을 사랑하기’라는 항목을 이름을 붙이고 다루고 있는데,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이런 태도가 나쁜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화에 대해서 말씀 더 드리기 전에 한 가지 전제를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성직자는 한 사람도 따라가지 않았다” 이 문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맨 마지막 문장입니다. 베르테르가 두 부류의 보리수 나무가 심겨져 있는 묘지의 한 귀퉁이에 묻힐 때, 성직자는 한 사람도 따라가지 않았다고 하며 끝맺음을 합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롤랑 바르트가 쓴 『사랑의 단상』에서 쓴 제일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 사람이 계속 인용되고 언급되고 사랑의 주체에서 가장 첫 번째 가는 전형적인 모델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베르테르가 그렇게 죽을 때 성직자는 한사람도 따라가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서 성직자가 따라 가지 않았다는 것은 굉장히 희한한 일이죠.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성직자처럼 보지는 말자는 거예요. 성직자처럼 영화를 보지 말고 어떻게 보면 오늘 여자 주인공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좋다 나쁘다 도덕적 평가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사랑의 주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죠. 그런데 오늘 영화 같은 경우도 그렇고 문학에 있어서도, 어떤 도덕적 평가는 뒤로 미루고 영화라는 것을 예술적 텍스트로 해석하고 이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무엇을 볼 것인가 했을 때 어떤 인물과 성격이 이 작품을 통해 창조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좋겠다. 어떻게 보면 예술에서는 극단적인 인물성격이 창조되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봤으면 좋겠다. 이 사람이 착하다, 나쁘다, 너무 헤픈 것 아니야, 너무한 것 아니야 등의 평가는 각자 집에서 하시고, 영화를 볼 때는 예술적 텍스트로서 어떤 인물 성격이 나오는가를 보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가 굉장히 중요한 성격의 인물이라고 했는데, 영화의 중요한 베이스가 되는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서는 베르테르가 어떤 인물로 생각이 되고, 해석이 되었는가를 보시면 바르트는 ‘성직자는 한사람도 따라가지 않았다’를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첫 번째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 기독교의 교리에 따라서 자살한 사람이기 때문에 성직자로서 축복해 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데 거기에다가 더 있다는 거예요. 베르테르는 자살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그 당시의 성직자들이 볼 때 뒤흔들어 놓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인정해주고 축복해 주기에는 어려웠던 것이 아닌가라고 바르트는 해석을 합니다. 베르테르라는 존재는 사랑하는 사람이고, 같은 동의어로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사람이고, 신분을 이탈했던 사람이다. 예를 들면, 양반 이라면 양반에 맞게 처신을 잘 해야 하는데 여자에 미쳐서 목숨까지 끊었으니까 사실 야단맞을 일이었다는 것이죠. 신분을 이탈해서 사랑을 위해 온 몸을 던졌다. 그런 의미인데, 다르게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베르테르라는 존재는 자기 외엔 그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다 보니까 자기 생각 고민을 공유해 주는 사람도 없고, 동의해 주는 사람도 없고,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에도 동의해 줄 수 없고, 그러니까 자기하고만 결속이 되어서 계속 고민하는 존재라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이던 간에 사회라는 것은 어떤 기호를 가지고 가치관을 가지고 서로 연결되어있는 하나의 체계 시스템이잖아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어떤 기호들이 어떤 공유되는 코드를 가지고서 체계적으로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런 것이 궁극적으로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사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던진다. 그렇게 될 때 일어나는 것은 바로 무엇인가 하니까 이 사회가 모두 코드 시스템으로 이루어져있다면 그 코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런 것을 바르트는 무엇이라고 불렀는가 하니까 탈-코드라고 불렀던 겁니다. 『사랑의 단상』 등은 바르트의 후기 작품에 속하는데, 새로운 것들이 전개되고 있던 새로운 후기 작품인데 여기에서 나타난 것이 사진 이론에서 ‘푼크툼’이라는 건 많이 들어보셨잖아요. 사진작가가 의도한 것과는 무관하게 사진을 볼 때 내 가슴을 푹 찌르고 들어오는 어떠한 요소, 사진의 여러 가지 요소가 있을 텐데 뭔가 나에게 꽂히는 그런 요소, 문장에서 한 용어가 튀어나와서 머리를 깨면서 들어오는 것이 ‘푼크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 이론에서의 ‘푼크툼’이 같이 가는 것이 사랑의 주체이고 사랑의 언어도 그렇다는 겁니다.

 

사랑의 언어는 제대로 되면 절규하듯이 터져 나오는 단어이지 계산적으로 해서 말끔하게 나오면 사랑의 언어가 아닌 거죠. 마지막에 드빠르디유가 말을 너무 잘하는 거죠.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겁니다. 사기꾼인거죠. 계속해서 교묘하게 말로 줄리엣 비노쉬에게 어떻게 한 번 접근해보려고 하는데 이건 사랑의 언어가 아닌 거죠. 롤랑 바르트는 베르테르라는 인물을 사랑의 주체로서 굉장히 전형적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언어라던가 존재 자체가 탈-코드 적이고 품크툼 같은 돌발적으로 나를 찌르고 들어오는 그런 존재로서 같은 선상에서 이해한 것이라 사랑의 주체는 단순한 연애의 이야기라고 볼 수 없고, 예술에 있어서나 사회적으로 있어서나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존재라는 겁니다. 심지어 바르트가 가지는 정치적인 문제도 사랑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그래야지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거든요. 다르게 이야기하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정치할 수 없다는 거예요.(웃음)

 

베르테르에 대해서 바르트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랑은 그를 사회의 쓰레기로 만들었지만 그는 오히려 기뻐했다” 엉뚱하게 안 되는 여자를 계속 좋아하다보니까 사회성은 쓰레기가 되는 거죠. 그런데 그는 오히려 기뻐했다는 겁니다. 사랑이 세속적 삶으로부터 그를 보호했기 때문에 기뻐했다는 겁니다. 이런 상식적이고 편견에 가득 찬 코드 시스템에서 사랑을 했기 때문에 벗어날 수 있었다고 거꾸로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베르테르라는 인물의 의미가 크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오늘 주인공 ‘이자벨’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굉장히 비난 받을 만한 사람인데, 그런데도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하죠. “난 그런 사람들 싫어. 네가 말하는 사람들과 난 안 맞아” 라고 식당에서 화랑 주인인 남자와 대화하는데, 이 사람들이 껄떡새잖아요. 이자벨과 잘해보려고 껄떡거리는 사람인데, 너하고 같은 부류 신분의 사람과 만나라고 말하자 “니가 말한 그런 사람은 싫어, 네가 말하는 사람들과 난 안 맞아“라고 합니다. 탈코드적이고, 사회 쓰레기지만 쓰레기이기 때문에 쓰레기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역설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사랑의 주체이라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크게 세 가지 포인트를 잡아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인물들의 성격, 두 번째는 사랑의 언어인데요. 사랑의 언어라는 것은 예술의 언어와 굉장히 통한다는 점을 곁들여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세 번째는 결말부, 즉 마지막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세 가지 포인트를 잡아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인물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바르트가 사랑과 연관해서는 주체가 두 종류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르트가 쓴 책을 많이 가져와서 조금 전 말씀드린 세 가지 포인트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는 ‘사랑의 주체’가 있고, 하나는 ‘질투의 주체’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당연히 질투의 주체는 사랑의 주체와 굉장히 다를 뿐 아니라 반대되는 것이죠. 그런데 질투와 사랑은 정말 다른 것 인 것 처럼요. 질투의 주체가 무엇인가하면 등장인물 중 은행가가 전형적인 질투의 주체라고 할 수 있고요. 그리고 화랑 주인, 점쟁이도 질투의 주체라고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진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질투의 주체들은 말을 잘 합니다. 질투의 주체와 관련해서 이 대사를 보겠습니다. “그 여자랑...프랑수아 씨와 썸싱이 있었어.” 혹시나 전 남편과 다시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가까워질까봐 미리 초를 치는 거죠. 나중에 알고보니 거짓말 이었죠. 그런 식으로 질투를 하죠. 심지어 바텐더가 굉장히 상냥하고 좋았는데 못되게 구니까 왜 그런가 했더니 “저 사람과 너가 또 잘 해보려고?”라고 하면서 굉장히 질투를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음 대사입니다. “난 자기를 존경해 자기처럼 되고 싶어.” 이게 바르트적으로 보면 진심인거죠. 질투의 주체는 욕망을 실현하지 못할 때 그 욕망의 대상을 미워하면서도, 강제 소유하려고 하는 마음, 이것이 질투라는 것입니다. 대사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었잖아요. “우리 부르주아 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해도 사는게 사는게 아니야. 너무 피폐해져 있어.”라고 이야기하면서 여주인공처럼 사는 것이 아름답게 사는 거라고 합니다. “나도 너처럼 살고 싶어. 아름다움을 창조해 가면서.”라고 하죠. 그런데 자기는 이 삶을 유지하려면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은행가는 이자벨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기 보다 그런 삶을 빼앗고, 소유하고 싶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이런 것은 바르트가 말할 때, 히스테리 주체라고 하는데 히스테리가 꼭 신경질을 내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강한 불만의식을 가지고 다르게 말하면 니체가 말하는 ‘르쌍띠망(Ressentiment)’이라고 하는 복수심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부르주아에 많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부르주아가 무슨 복수심이 그렇게 많겠는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나 오히려 부르주아에게서 복수심가 질투심이 더 나타날 수 있다는 겁니다. 다 갖췄는데 상대가 내가 못 가진 것을 가지고 있다면 더 얄밉겠죠.

 

질투의 언어는 어떻게 되는가라고 할 때, 대사를 통해 보자면 “너랑 같은 수준의 사람을 만나야 해”라고 이야기 하는데 어떤 사람은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하나의 연결을 강조하는 사랑의 형식이 질투의 언어다. 실제로 1:1로 연결이 안 되는데 그것을 억지로 연결시키려고 하는 것이 히스테리인거죠. 안 되는 건데 억지로 시키려는 겁니다. 조금 전 은행가 같은 경우에 “당신은 왜 젊은 친구가 상냥한데 왜 그래?” 라고 말할 때 일반적인 사람이면 ‘친절하게 대하는 것으로 봐주세요.’ 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그것을 여자가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1:1로 한정지어 연결 지어 버리는 것, 이것이 질투의 언어라는 것이죠. 아닌데 그 풍성한 것들 다 버리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하나로 연결시켜버리고 고정시키는 것이 질투의 언어인거죠. 질투의 주체는 질투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단어와 그 의미의 관계를 하나로 획일화 시키고 고정시키려고 하는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조금 뒤 말씀드릴 사랑의 주체는 이게 아니라는 것이죠. 단어, 어떤 사람의 행동, 그리고 어떤 신분에 맞게. 조금 전 말씀 드린 베르테르는 신분 이탈자라고 이야기 했는데요.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 등의 단일 연결에 집착하는 것이 질투의 언어이고, 단어를 고정시키듯이 상대방을 고정시키고 규정시키고 소유하려고 한다. 예전에 ‘기표와 기의’라는 말 배웠잖아요. 즉 시니피앙(significant) 시니피에(signifie)라는 것을 단일하게 연결 시켜서 의미화 작용을 완결시킨 것이 질투의 언어인데 대단히 계산적이고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에너지 소모가 없어야 해서 합리적이고 분명하게 해야 하죠. 예를 들면 장부를 보면 대사 대저표는 오른쪽, 왼쪽이 딱딱 맞아 떨어져야하잖아요. 그런 것이 부르주아 적이라는 겁니다. 갑질이라는 의미보다는 계산이 분명하다는 상업적인 정신 상태라는 겁니다.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내가 이만큼 줬으니 넌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고, 분명하게 손해를 안보는 태도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은 미지의 의미를 찾아가는 생성 과정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마치고 헤어질 때 카페이름을 감독이 크게 보여주는데 의도적으로 보여줬다고 봐야죠. 카페이름이 ‘AU GRAND COMPTOIR’ 라고 되어있는데, COMPTOIR는 계산대라는 뜻입니다. 저 사람은 계산적인 사람이고, 저 카페에서 계산적인 이야기를 한 거죠. 그런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코미디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이런 만남에 한 푼도 걸지 않을 거야” 대단히 부르주아적인데, 이때 부르주아적이라는 것은 계산이 철두철미한 절대로 손해 보지 않고 이익만 보는 그런 태도를 말을 한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사랑의 주체라는 것은 바르트는 개인적으로 사랑의 주체가 독일 낭만주의의 인물들이라고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질투의 주체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 남자들을 예로 많이 들고 특히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의 경우에 질투의 주체를 알겠느냐, 그 사람을 정말 사랑했겠느냐 하는 질문을 하는데요. 사랑한 것 같지는 않다고 이야기를 하고 반면에 사랑의 주체로 예를 든 것은 베르테르라든가 겨울 나그네의 주인공. 여자가 별로 안 좋아 하는데도 끊임없이 배신당하면서도 계속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존재, 그리고 슈만의 음악세계 등 세 가지를 거론할 수 있습니다. 베르테르가 나중에 『사랑의 단상』 직후 슈만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도 하죠. 그런 독일 낭만주의적 주체. 독일낭만주의는 정말 현대에는 이렇게 못살거든요. 이렇게 살면 죽어요. 정말 끔찍하게 사는거죠. 어떤 열정과 순수로 살아가서 인간적으로 불가능한데,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제대로 살 수가 없었죠. 다들 빨리 돌아가시는 이유가 살기 힘든 세상에 있었기 때문이죠. 극단적인 존재가 사랑의 주체입니다. 고통 받는 주체이자 낭만적 주체인데, 여기서 사랑은 내가 이랬으니까 사랑이 이렇게 딱딱 이루어 질 것이다와는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고, 계속 흘러가고 흘러나오고 세어 나오는 존재인거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보시면 계속 우는 장면이 나오죠. 남자가 계속 웁니다. 오늘 줄리엣 비노쉬도 계속 울잖아요. 사랑의 단상에서도 보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 중에 하나가 우는거에요.

 

그리고 경제로 본다면 부르주아가 딱딱 부러지는 장부적인 경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경제라면 이런 사랑의 경제라는 것은 낭비 경제이다. 앞뒤가 안 맞는 거죠. 장부상으로 이익을 보는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장부가 줄줄 세는 겁니다. 그래서 넘침, 잉여, 낭비 경제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대사가 있었는데요. “세실이 우리 집에 와서 얘기했어. 네가 거의 매일 밤 운다고” 바르트적으로 보면 사랑하는 사람은 울보다. 그리고 “자신을 울게 내버려 두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유한 성향이다.”고 바르트가 이야기 하는데,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 없지만 우리가 어릴 때 아기가 울 때 그 우는 모습을 제일 가슴으로 발견하고 안아주고 인정해주고 도닥이는 존재가 어머니잖아요. 첫 존재이자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존재이죠. 그래서 정신분석적으로 말하면, 사실상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원초적 어머니에 다가가는 마음이라고 보잖아요. 그 원초적 어머니라는 것은 사실상 어느 정도 원초적인가 하면, 아기와 엄마가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상 그런 어머니는 현실에 없잖아요. 탯줄은 끊어졌으니까 우리가 활동을 하는 거잖아요. 그런게 없으니까 상상 속에만 있는 거죠. 그 대신에 우린 계속 그것을 그리워하면서 운다는 것은 자기 상상 속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본 것을 엄마가 봐줬으면, 혹은 엄마가 보고 있다면 엄마의 시선으로 자기를 보는 것 등이 복합적으로 있어서 여하튼 많이 운다는 것이고 운다는 것은 사랑의 주체에 중요한 특징이다. 그리고 운다는 것은 그자체로 혀로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몸으로 말하는 언어라는 것이죠.

 

그리고 사랑의 주체의 또 다른 특징은 고독한 주체이죠. 점쟁이가 말했듯이 한 남자에 대해서 “저 친구는 다 좋은데, 아웃사이더(merge)로 자꾸 살려고 해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은 저 남자 배우가 사랑의 주체의 성격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자벨이 저 사람을 좋아하는 겁니다. 바르트적으로 보면 마지막에 말한 남자 두 사람이 사랑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조금 전 점쟁이가 말한 남자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요소가 아웃사이더, 그러니까 베르테르가 자꾸 이탈한다고 했잖아요. 같은 말이죠. Margenal이라고 하는데 주변부에 자꾸 빠져나가는 존재라는 뜻이죠.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고, 그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계속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아까 쓰레기라는 표현도 했는데, 말하자면 고립되는 것이죠.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의 주체가 하는 언어들은 실패한다 겁니다. 오늘 영화를 보시면 여자주인공이 하는 대화가 전부 실패해요. 첫 번째 도입부에서도 여자는 좋은 뜻으로 이야기한 것인데 남자는 오해를 하고, 거기서 싸워서 삐지고 눈물을 흘리고 하는 것이거든요. 대사 중에 “웃으면서 해(Jouis). 난 충분히 좋아, 난 좋아, 웃어 어서.” “제발, 웃어.” Jouis라는 단어를 정말 매끄럽게 잘 번역하셨는데, 이 단어는 남자가 사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실 저 번역 그대로 했으면 이 영화는 청소년관람불가였을텐데, ‘빨리 사정해.‘ 이 말이었거든요. 너무 노동하듯이 고생하지 말고 남자를 생각해서 한 말인데 오해를 산거죠. 그랬더니 남자는 화가 나서 또 못되게 이야기합니다. 부루주아는 절대 말에서 지지 않죠. 그리고 “그만 만나자 그 수밖에 없어” “인정해”라고 하자 주인공이 “다시 만나자고 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바로 수긍을 해?”라고 합니다. 굉장히 피곤한 스타일로 모범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다만 굉장히 하나의 주체가 극단적인 인간형을 보여준다는 것인데요. 이점에서 바르트는 검은 안경이라는 챕터에서 감추기라는 단어를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정념의 혼란을 어느 정도로 감춰야 할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자기가 너무 정념적으로 혼란스럽다는 것을 언어로 표현을 해버리면 상대방이 질식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어느 정도 감춰야 하나를 고민한다. 그래서 정념에 가면을 씌우면서도, 감추는 것이 노력이 살짝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살짝 피곤하죠. 그러면서 내가 뭔가를 감추는 중이라는 것을 좀 알아달라고 요구를 한다는 겁니다. 왼쪽 사진은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인데요, 저 장면이 혹시 기억나세요? 김상경이 떠나려고 하는데 오른쪽 여자 분이 남자를 좋아했잖아요. 그런데 남자가 갑자기 선글라스를 끼고 다가오는 겁니다. 그래서 왜그러냐고 물으니 ‘어제 당신이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슬퍼서 밤새도록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다’고 하지안고 앞부분은 생략하고 그냥 “눈이 퉁퉁 부었어요”라고만 합니다. 선글라스를 끼고 온 것은 부은 눈을 감추기 위한 것인데, 쓰고 온 것 자체가 ‘내가 너 때문에 마음 고생해서 이렇게 울었어, 이걸 알아 알아줘’라고 표현을 하는 거잖아요. 이 언어가 성공하기가 힘들고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언어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오늘 영화로 다시 돌아와서 주인공이 마크에게 이렇게 고백을 하죠. “그게 제 문제죠, 아무도 제 마음을 몰라요” 사랑의 주체의 언어는 언제나 실패하기 때문에 잘 모른다. 그런데 남는 것은 무엇인가하면, 손잡는 것 등의 신체적인 언어입니다. 사랑의 주체가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언어가 신체인 겁니다. 앞부분에서 『사랑의 단상』 표지에 손잡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씀 드렸죠. 저 장면은 명백하게 표지 사진을 반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랑의 주체의 언어는 일반적으로 실패한다. 눈물과 신체성 언어만 남는다. 신체성 언어가 뭔지 말씀드릴 텐데, 구체성, 각인, 접촉, 물질성, 시각형상 등의 문자자체, 의미가 아니라 그 언어자체가 자기를 파고들게 하는 것이 신체성 언어인데 이런 것들만 가능해지고, 그런 점에서 예술가의 언어와 굉장히 비슷한 거죠. 예술가들이 늘 고민하는 것이 관객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잖아요. 혹은 평론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인정해 줄까 안 해줄까? 그리고 거짓과 진실의 문제들이 계속 오가면서 고민하는 그런 것들이 예술가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예술적 언어밖에 사실상 안 남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영화주인공이 예술가로 나온 것은 클레르 드니 감독이 정확하게 바르크가 말하는 사랑의 주체가 예술가적 주체와 비슷하다고 해석을 한 것이죠. 그래서 울면서 혼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요. 이자벨이 들여다보는 화가의 사진이 있었는데요. 그 화가는 조안 미첼(Joan Mitchell, 1925-1992)인데 미국 출신이지만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셨던 분이고, 이혼하고 프랑스로 와서 어떤 남자 화가와 불타는 사랑을 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림도 저분과 비슷한 추상예술 중에서도 액션 페인팅 계열이라고 볼 수 있는거죠. 그림도 유명하고, 굉장히 열정적인 사랑도 하고 다 좋지만 술, 담배를 너무 하셔서 말년에 고통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롤랑 바르트의 책을 보면 ‘Fragments’라고 되어있잖아요. 『사랑의 단상』 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Fragments’는 조각, 파편을 뜻하는 거잖아요. 무슨 이야기 인가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파편적으로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논리적 담론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이런거죠. 일반적으로 논리적 담론이라는 것은 베르테르가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할 때 ‘희망이 있으면 한 번 해봐’ 또는 ‘희망이 없어, 하지마’ 이게 논리적이잖아요.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들의 담론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희망이 없어도 계속 사랑할래’라는 거라서 논리적 담론이 될 수 없다는 것이고, 절규적이고, 탈-코드 적으로 문장이 튀어 나오는 것이며, 신체적인 것이다.

 

 토피아와 천사

 

그래서 저 표지를 잠깐 보시면 저게 손잡고 있는 부분이 베로키오라고 하는 1470년대에 만들어진 작품인데요. <토비아와 천사>라는 작품의 한 부분입니다. 토비아는 성경구약의 한 부분에 나오는 건데요, 토비아의 아버지 이름이 토비트입니다. 토비트라는 분은 굉장히 훌륭한 분인데 저분에 대해 성경에 나와 있는 말을 보면 걸어가다가 새가 하늘에서 똥을 눴는데, 눈에 똥을 맞아서 눈을 실명한 황당한 분으로 등장합니다. 눈이 잘 안보이면서도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나가니까 그리고 가난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줬고 그 돈을 아들 토비아에게 받아오라고 시킵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이 복잡하고 그러니까 길동무를 공모해서 같이 다녀오라고 했더니 하늘에서 라파엘 천사를 보내준 겁니다. 라파엘과 토비아가 걸어가는 것인데, 그때 라파엘이 토비트를 보고서 “언제나 기쁘고 행복한 일만 생기세요” 라고 말을 하니까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제 무엇으로 기뻐하겠습니까, 눈이 먼 사람으로서 하늘의 빛을 못 보고...암흑 속에 잠겼습니다” 이게 바르트가 생각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 받는 주체의 상황인 것이죠. “살아있으나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람 말 소리는 들어도 얼굴은 못 봅니다” 말 소리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신체적 접촉, 언어와 같은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나중의 이야기는 토비아가 라파엘과 가서 아버지가 옛날에 빌려줬던 돈도 받아내고, 가는 길에 결혼 할 상대까지 구해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토비아의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이 보이시나요? 강가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물고기를 딱 잡아요. 잡으니 라파엘 천사가 물고기를 잘 잡아서 내장을 따로 보관하게 됩니다. 그래서 간, 염통을 따로 놓고 쓸개를 따로 놓았는데, 담아왔던 물고기 쓸개즙을 토비트의 눈에 발라줍니다. 그러니까 그 눈이 치료가 되어 눈을 뜹니다. 여기서 제가 드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 언어라는 것은 바르트 그리고 오늘 영화의 감독이 볼 때 우리가 보는 낭만적인 어떤 주체의 언어뿐만 아니라 진짜 사랑한다는 사람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리는 힘든 주체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기서 손을 잡고 가는 모습이 묘하기는 묘합니다. 왜 묘한가하면 둘 다 남성인데 손을 너무 다정하게 잡고 가는 것 같아요. 참고로 롤랑 바르트는 동성애자이잖아요. 이 그림을 선택한 것이 묘하기도 합니다. 바르트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언어는 살갗이다. 나는 그 이를 내 언어로 문지른다, 내 언어는 욕망으로 전율한다“ 언어의 신체성을 말하는 것이고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다하더라도 그런 언어만이 사랑의 언어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죠. 남자 배우가 사는 게 힘들다 등 파편적인 언어를 계속 늘어놓으면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잖아요. 여자가 지쳐나가 떨어질 정도로. 저 사람은 사랑의 주체로 가까운 면모를 보여준 것이죠. 바르트가 말하는 고백이라는 항목을 보시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감적을 억제하고, 연인과 끝없이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성향“ 바로 조금 전 말씀 드린 배우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성격으로 묘사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결말 부분을 어떻게 볼 것 인가 인데요. 각자의 기준으로 보시겠지만 저는 이렇게 봤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이야기 합니다. “내 안에서 빛나는 태양을 찾아보는 거예요” 사기꾼이라고 너무 정해서 미안합니다만, 저 말을 두고서 보통 이렇게 해석하는 것 같아요. 운명의 주인공은 당신이다, 심지어 배급사 포스터에서는 ‘지난 일은 잊어요 내 안에 빛나는 태양을 찾아요’라고 문구를 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이 감독이 아니고 주인공이 아니고 좋은 의미에서 약간 사기꾼이거든요. 이자벨을 보고 반한, 꼬시고 싶어 하는 말하자면 일종의 사랑하는 사람이죠. 그 사람의 언어도 사랑하는 사람의 언어이기는 하지만 저 사람의 말을 100% 다 이해할 수는 없는 거죠. 저 사람이 하는 말을 이자벨이 듣고 나서 다르게 받아들이고 해석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까 말씀 드린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는 것보다 사랑을 계속 할 수 있어서 웃는다고 말씀드린 게, 저는 빠르디유가 말한 것과 이자벨이 받아들인 것은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 드리려고 해요. 빠르디유가 한 말만 보면 분명히 정신차려와 비슷한 거잖아요. 너의 일에 충실하고 사람 감정에 너무 휘둘리지 말고, 초연하게 삶의 중심을 잡아라. 그러고 있으면 좋은 상대가 올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상대는 나일 가능성이 크다는 식의 의미가 숨겨져 있죠. 그런데 과연 주인공이 생각할 때 이 메시지가 혹은 감독이 생각하는 메시지가 빛나는 태양이라는 것이 사람 감정에 초연한 것이냐. 전혀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사랑과 감정에 충실하고 그것을 긍정하는 것이 태양이라고 보는 것이 바르트 적인 해석이고, 감독의 해석인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여기를 봐 주시길 바랍니다.

 

『사랑의 단상』 에 보면 바르트가 마지막 잎새라는 한 챕터에서 마술이라는 단어를 설명합니다. 마지막 잎새는 여러분들 다 아시다시피 마지막 잎새가 달려있으면 내가 살고, 떨어지면 죽을 것이라고 자기와 연관 없는 우연한 것에 자기 운명을 거는 정신을 말하는 거죠. 그게 마술, 점치러 가는 것. 바르트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점 치는 것, 비밀의식, 기도 행위 같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삶의 일부다. 우리나라만 잘 물으러 가는 줄 알았더니, 프랑스 사람들도 잘 물으러 가는 것 같아요. 근데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물으러 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예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가는 것이거든요. 뭐라도 한 귀퉁이만 걸리면 또 하려고 그 확신을 받으려고 가는 거잖아요. 마지막 장면도 그렇게 볼 수 있는 거죠.

 

왜 그러면 점치러 가느냐. 언제나 위기 상태에 있다는 거죠. 우연한 일을 빌미로 해서, 핑계로 삼아서 사랑의 긍정, 지속, 기쁨을 찾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바르트는 이런 예를 하나 듭니다. 어떤 X라는 사람은 사랑에 지켰겠죠. 굉장히 울적 해 하다가 이탈리아 여행을 하는데 한 작은 성당에서 촛불을 하나 켰다. 무슨 이야기 인가하면 촛불을 켠다는 것은 종교적이고, 소망을 비는 행위이고 하니까 그런 것을 우습게 생각하고 여태까지 안 한 겁니다. 난생 처음 촛불을 켜고 깜짝 놀란거죠. 촛불이 이렇게 아름다운가. 그러자 자신이 촛불을 켠다는 행위가 덜 우스워졌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빛을 창조하는 이 기쁨을 구태여 마다할 필요가 있을까’ 라고 이야기 하죠.촛불을 켜면 어떤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과학적으로 전혀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런대도 이렇게 아름답고 기뻐지는 행동을 구태여 안 할 이유가 있겠냐는 겁니다. 사랑이 지금 그런 거라는 거죠. 사랑이 환상이고 이게 정말 실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기쁜 일을 왜 마다하겠냐는 겁니다. 이 마음가짐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바르트이고, 감독의 마음 인 것이거든요. 초연한 것이 아니라 절대 초월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초연하라는 사람은 이 감정을 초월하라는 것이거든요. ‘사랑의 본질은 알고 보면 전부 허상이야, 허망한거야’ 라고 정신 분석가들은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럼 이제 안해야 정상이죠.

 

그런데 ‘나는 그렇게 초월 안 할래’ 라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바르트는 이게 진실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렇게 살겠다고 한 거죠. 예술가도 마찬가지고요. ‘예술이라는 작업이 허망하고 이게 무슨 재미가 있어, 환상을 추구하는 작업이지. 이거 계속 할래?’ 이거거든요. ‘그래 알아, 난 초월하지 않을래’ 예술의 언어라는 것이 생각하는 어떤 감정이 나한테만 진실이고 진실이 아닐 수 있는데 아니라고 할지라고 구태여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빠르디유가 말한 것은 초월하고 정신 차려서 할 일만 집중하라는 것인데 이 사람들 하는 말이 휘둘리지 않을 바에 죽는다는 겁니다. 이게 내 삶의 의미라는 거죠.

 

조금 어려운 단어들을 써가며 정리했는데, 사랑의 주체가 무의식으로 욕망하는 것은 정신분석적으로 이야기하면 대타자(the other)를 욕망했다는 겁니다.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어머니’이거든요. 어머니는 정말 상상적인 것이다. 탯줄로 연결되어있는 어머니이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이미 단절되어 없는 것이죠. 그것을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자꾸 추구한다는 겁니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간에 원초적 어머니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를 추구하고 욕망하는 것인데, 그렇게 없으니까 그런 대행으로서 이성들을 만나게 되는 것인데,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허망한 것이고, 환상인겁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초월하지 않고, 상상계에 머물면서 사랑하겠다는 것이 바르트의 핵심적인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바르트, 클레어 감독, 이자벨, 예술가의 사랑이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언어라는 것은 논리를 벗어나서 지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바르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랑의 주체는 정말 오류를 범하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보인다. 실수를 고집한다는 거죠. 안 되는 일을 계속한다는 겁니다. 이래서 상습과실자라고 별명을 붙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주체는 이제 그만 좀 끝났으면 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거죠. 다만 “난 이해하고 싶어 내게 일어난 일을” 이런 말을 절대 하지 않죠. 오늘 대사에 보면 초반에 창밖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어차피 실패할 건 알아. 그래도 한 번쯤은 다를 수 있잖아” 실패할 줄 아는거죠. 그런데 “왜?” 이제는 그만 해야지. 끝내야지. 그런데 끝낸다는 말은 하지 않고 “도저히 모르겠어” 라고 합니다. ‘알고 싶어, 이해하고 싶어’ 라는 말인 거죠. 불어로 ‘정말 도저히 모르겠어’를 직역 하면 ‘이해할 수가 없어’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해하고 싶다고 말한 거지 끝내겠다는 말을 절대로 안 나오는 것이 사랑의 주체이죠.

 

결론을 내리면 우리가 사랑의 주체와 질투의 주체해서 인물도 봤고요, 사랑의 언어는 단편적이고 파격적이며 감추니까 실패한다는 것. 그리고 신체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예술적 언어와 굉장히 통한다는 말씀을 드렸고요. 오늘 영화의 주인공이 예술가라는 것은 절대 우연한 설정이 아닌것이고, 마지막 결말 부분은 자기 중심을 잡는 것에서 자기 긍정은 맞는데 자기 긍정이라는 것이 상식적인 것과 좀 다르게 특이하다 사랑을 계속하겠다. 실패하는데도 사랑을 계속하는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고,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긍정하는 그리고 사랑과 욕망의 주체로 긍정하는 그런 자기 긍정이다. 영화 제목이 내 안에서 빛나는 태양이라는 제목하고, 영어로 렛 더 선샤인 인하고 앞뒤가 맞아요? 내 안에서 태양이 빛나는데 왜 햇빛을 들여와야 될까? 이 말속에 답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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