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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쓰리 빌보드>- ‘문명 속의 불만'2018-03-15
쓰리 빌보드 스틸컷_

 

<쓰리 빌보드>- ‘문명 속의 불만'

 

* 일시 : 2018.03.15(목) 19:00
* 장소 : 영화의전당 중극장
* 강연 :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 (철학박사)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장면이 되게 좋았습니다. 첫 장면에서 <여름의 마지막 장미(The Last Rose Of Summer)>가 가진 아름다움과 동시에 외로움, 어떻게 보면 고귀함이 가지는 외로움, 절박함 이런 것들이 영화 전편에 깔려 있는 정서라 생각됩니다.

 

처음에 저도 궁금했던 것이 웰비 광고 회사 친구가 ‘도대체 왜 광고를 하느냐?’ 저도 비슷한 질문을 던졌는데, 결국 여기가 알고 보니 딸이 살해되었던 도로변이었다. 어떻게 보면 광고판 밑에 붉은 꽃을 키우고 가꾸는 것이 다시 태어남, 부활의 느낌도 가지고 있는 것 같고요. 세상에 대한 절박한 호소, 슬픔, 분노가 들어가 있는 광고판이기도 하죠. 그게 누구에 대한 분노, 호소, 슬픔인가 하니까 주민들이 왜 그렇게 잊고 있는가도 되고, 그리고 범인에게도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죠.

 

 그리고 경찰, 자신을 포함해서요. 자신도 마지막에 딸에게 폭언했죠. 그 죄책감이 굉장히 컸을 것이라 생각되고, 집에서도 잘 보이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터뷰에서도 나오지만 특히나 경찰이 무엇을 하느냐 질타와 서장에 대한 화살을 겨누는 의도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광고판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광고를 한다는 것이 넌센스인데, 어떻게 보면 비유적으로 광야에서 의인, 또는 올바른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찾아보려는 절규로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관심을 가진 것은 서장을 사이에 두고 ‘딕슨’과 ‘밀드레드’가 어떤 관계가 대단히 재밌게 변화해 간다. 그리고 딕슨이라는 인물 또한 재미있게 변화해 간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경찰과 광고가 대립구조를 보이는데, 같은 말이지만 경찰과 밀드레드는 굉장히 대립하였는데 서장의 죽음을 계기로 바뀝니다. 딕슨은 변화하면서 뱃지를 던지고, 밀드레드와 같이 결합을 하면서 마지막에 차를 타고 가죠. 이런 변화 관계가 대단히 재미있었다. 이 두 사람이 변하는데 무엇보다도 서장이라는 사람의 역할이 대단히 컸고, 서장 때문에 두 사람의 성격이 결정적으로 변화하는 핵심적인 이야기였다는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영화의 어떤 표층은 누가 보더라도 대단히 사회성이 표현이 많이 되어있는 작품인데, 이것을 한 층을 더 보면 인간이 과연 변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을 묻고 있는 작품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어떤 각성이라고 할까. 그 각성이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 힘든 여정을 영화의 주제로 삼은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좀 더 깊이 있게 이야기 나누기 위해서 단편소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라는 작품을 가지고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영화 속에서 책 표지만 잠깐 나왔죠. 제가 볼 때는 이 소설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고, 이 저자인 ‘플래너리 오코너(1925~1964)’는 희귀병을 앓다가 일찍 돌아가셨죠. 그는 아일랜드계 가톨릭인데, 이것을 밝히는 이유는 영화감독과 같다는 것입니다. 감독도 아일랜드계 가톨릭이고,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고 싶지만 영화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방법으로 가톨릭적인 메시지도 있다는 생각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1952년에 나온 소설집으로 두 종류로 된 우리말 번역본이 있습니다. 한 쪽은 번역이 잘 되어있고, 한 쪽은 안 좋다고 욕을 먹고 있습니다. 어떤 책이 그런지는 여기서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웃음)

 

영화의 기본 흐름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방송사에서 나와 광고판 앞에서 인터뷰를 합니다. 경찰에게 책임을 분명히 물으면서 경찰서장이니 책임을 져야한다고 분명히 말하며 화살이 경찰서장에게로 갑니다. 그러다 보니 경찰서장이 대단히 좋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 모두의 적이 되어버립니다. 소설제목처럼 이 영화에서 전반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모두 당신과 안젤라의 편이지만, 서장을 공격하는 광고판은 반대라는 것을 신부님이 이야기를 하다가 밀드레드에게 심한 폭언을 당하죠.

 

그러면서 저 말을 합니다. 굉장히 핵심적인 메시지인데, “그런 짓을 하거나 들어본 적 없더라도 그 조직에 속해있다면 당신은 죄가 있다.”라고 이야기를 분명히 하죠. 그러니까 경찰서장에게도 책임을 묻는 동시에 그것을 묵인내지 방조 또는 그곳에 소속되어있는 사람들조차도 모두다 간접적인 죄가 있다고 이야기 하면서 이 말 자체는 맞는 말인데 밀드레드의 생각이 조금씩 뻗어 나가기 시작하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8세 이상 모든 남자 세상에 태어난 남자들을 다 뒤져서 잘못하는 순간 DNA를 대조하고 정확히 일치하면 죽일거에요.” 저 말 자체는 나쁜 말이 아니지만 뭔가 극단적으로 위험하고, 과격하며, 급진적으로 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죠. 그때마다 사람 좋은 경찰서장은 “그건 인권 침해이며, 인권법에서 허락을 안 한다.”고 합니다. 이때 인권, 인권법 이런 것들이 문명이죠. 문명 속의 불만이라는 것은 처벌해야할 사람을 처벌 하지 못하는 것이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못되고 있을 때 불만이 싹틀 수 있는 것이죠.

 

밀드레드의 복수의 범위가 점점 확장이 되는데, 꼬마가 캔을 던졌다고 왼쪽의 뚱뚱이 소년의 사타구니를 걷어차고, 그 옆에 여학생이 알건데 모른다고 하니까 여학생도 가차 없이 걷어차고 그렇게 과격하게 나가기 시작합니다. 아까 그 이유죠. 방조하는 놈도 같은 놈이다. 치과 의사 선생님도 굉장히 당하죠. 그리고 본격적으로 경찰서에다 화염병으로 불을 지르죠. 저기쯤 되면 밀드레드가 저 분노는 충분히 이해를 하고 공감을 하며, 동정을 하지만 위험한 도를 넘어서는 상황으로 가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범죄자와 살짝 구분이 안 되는 경지로 가고 있다. 그래서 비슷하게 딕슨이라는 사람이 원래 범죄성이 있는데 나중에 마음이 착하게 바뀌었는데도 마지막에 묘한 이야기를 하죠. 우리 범인은 아니지만 어떤 사고를 친 것은 맞지 않느냐고 하니까, 경찰서장이 “미주리에선 아니야, 그러니까 계속 수사해봐.”라고 하죠. 계속 수사해 보라는 이야기는 처음에 딕슨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뱃지를 내어달라고 하고 파면시켰습니다.

 

하지만 계속 수사해 보라는 이야기는 “넌 경찰이야.”라는 의미로 다시 경찰의 상징인 뱃지를 돌려준다는 것이죠. 그런데 저 친구가 이번에는 뭐라고 합니까? “뱃지를 찾았어요.”하며 이번에는 뱃지를 던져버립니다. 그러자 경찰서장이 굉장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죠. 딕슨도 밀드레드도 문명제도가 준 것이 죽여야 할 사람 못 죽이고, 처벌할 사람 못 처벌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싹트면서 자신만의 법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웨스턴적인 것이다. 명백하게 마지막에 뱃지를 주고받다가 뱃지를 던져버리는 것은 왼쪽에 1952년도 <하이 눈(High Noon)>에서 마지막에 주인공 게리 쿠퍼가 평생 소중하게 여기던 뱃지를 땅바닥에 던져버리죠. 저 장면에 대한 오마주다. 그리고 1971년에 <더티 해리(Dirty Harry)>에서 더티 해리가 마지막에 이런 식으로 제도와 법 때문에 잡을 놈 못 잡게 한다면 이런 짓을 안 하겠다며 뱃지를 강물에 던져버리죠. 저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대단히 웨스턴 적인 발상이다.

 

밀드레드도 서장이 남기고 간 편지를 받아보는데, 서장이 “광고는 정말 잘 한 거고, 범인이 정말 잡히기를 기도한다.”고 하자, 밀드레드가 난간에 다리를 올려놓자 음악이 깔리는데 상당히 서구적인 음악이 많이 나오죠. 왼쪽 이미지의 영화는 헨리 폰다가 주연한 <황야의 결투(My Darling Clementain)>에서 전직 보안관 와이어트로 뱃지를 달고 나오고 있죠. 밀드레드도 똑같은 자세를 취하면서 분명히 그 자세를 보여주는데, 무슨 이야기 인가하면 자기는 뱃지는 없지만 자기가 생각하는 법을 집행하겠다는 것을 고민하는 그런 모습을 <황야의 결투(My Darling Clementain)>에서 오마주를 한 것 같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밀드레드도 그렇고 딕슨도 그렇고 점점 뻗어 나아가고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딕슨이 마지막 부분에서 제안을 합니다. “이 놈이 범인은 아니지만 강간범은 맞지 않느냐?”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밀드레드가 굉장히 솔깃해 합니다. 본인이 말했던 범강간범들은 다 죽여야한다고 했던것과 상통하죠. 그가 아이다호에 살고 있다고 하니 아침에 아이다 호로 드라이브를 가야겠다고 합니다.

 

그때 딕슨이 같이 가자고 하자 좋다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만약 죽이러 간다면 서부시대로 돌아가는 것인데, 차 안에서 갑자기 반전이 일어납니다. 두 사람이 회의하고 망설인다는 것이죠. 저 장면은 영화에서 엔딩이자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찰서에 불을 지른 건 나야!”라고 하자, 밀드레드는 거의 웃지 않았는데 그 부분에서 만큼은 귀엽게 웃습니다. 밀드레드가 우리나라의 진중권씨를 닮은 것 같아요. 딕슨 같은 경우는 게리올드만의 하위 버전인 것 같기도 하고요.(웃음) “진짜 괜찮겠어?”라고 물어 봤을때, “진짜 잘 모르겠어.”라고 합니다. 저는 저것이 정말 중요한 대사라고 생각하는데,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 회의 하는 것이고 망설이는 것이잖아요. 저게 가장 인간적인 방식인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폭력과 분노로 행동에 바로 옮기는 저 두 사람이 가는 길에 한 번 생각해 볼까 하며 끝나잖아요. 말하자면 어떤 사람도 저 두 사람들을 제어할 수 없고, 어떤 종교도 제어할 수 없어요. 그런데 회의하고, 웃고, 생각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바꾸어나가고 스스로 결정해 나가는 가능성을 열어 보인 것이 영화의 아름다운 결말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미주리에서 아이다호까지 자동차로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까 측정해보니 한번도 안쉬고 전속으로 달리면 24시간 2500Km 정도 되더라고요. 서울-부산을 8번 정도 왕복한다고 생각하시면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저 두 사람에게 기자들이 물었더라고요. 만약에 영화가 계속되었다면 죽이러 갔을지 아니면 어떻게 했을 것 같으냐고 물었습니다. 두 사람도 그런 것들로 굉장히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하는데,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이 한참 가다가 어디서 술을 마시거나 했을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도 당연히 죽이러 갈 것이라 생각했다가 아닌 것 같다. 정말 우리가 이 사람들이었다면 캐릭터에 충실하다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말씀 드릴 것은 두 사람이 어떻게 망설이게 되었을까? 이 책을 통해 실마리를 잡아봐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광고회사 처음에 들어갈 때 책을 펼쳐들고 여자직원을 한참 훔쳐보는 장면인데요.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라는 책입니다. 이 영화제목으로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어떤 내용인지 많이 읽어보셨겠지만 안 읽어보신 한 두분을 위해서 열심히 줄거리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페이지로 20페이지가 안 되는 짧은 내용인데, 그림과 함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할머니가 남부 조지아주에서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못돼빠진 손자, 손녀와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뉴스에서 ‘Misfit’이라는 사람이 부하들과 함께 탈옥을 했다고 나옵니다. ‘Misfit’이라는 것은 직역을 하면 ‘부적응자’ 라는 뜻인데 그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여행을 가자고 아들이 제안합니다. 할머니는 조지아에서 테네시주로 가고 싶었는데, 아들은 플로리다로 가려고 하는겁니다. 반대하는 이유가 탈옥수들이 오는 경로와 마주 칠 수 있다고 반대하는데, 결국 아이들이 가자고 해서 플로리다로 갑니다. 여행을 떠나는 가운데, 할머니의 젊은 시절 추억에 담긴 장소가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행하다 도로에서 자동차가 굴러 떨어집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을 보고 도와달라고 하려는데 지나가는 차가 없어요. 그래서 한참 기다리던 차에 어떤 검정색 차가 오더니 세 사람이 내리렸고, 아무말 없이 차를 고치고 도와주려고 했어요.

 

그랬는데 머리좋은 할머니가 말합니다. “당신 누군지 기억이 났어, 바로 탈옥한 Misfit이야.”라고 하니, Misfit이 “여사님, 당신이 기억하지 않는 것이 모두의 안전을 위해 좋을 것 같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더니 가족을 한사람씩 조용히 숲에 데려가 총을 쏴 죽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맨 처음에는 아들, 손주아들을 데려가고 그 뒤로 엄마와 갓난아기, 딸을 데리고 숲속을 데려갑니다. 아들을 해치고 난 뒤에는 아들이 입고 있던 남방셔츠를 가지고 돌아왔다가 마지막에 할머니를 데려갑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 와중에 Misfit이라는 악당대장과 할머니가 대화를 합니다. “난 나를 스스로 Misfit이라고 불러요. 지금껏 내가 지은 죄와 내가 받은 벌이 서로 맞지 않거든요.” Fit이라는게 옷이 맞는거잖아요. 자기가 볼 때 내가 지은 죄에 비해 벌을 너무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나름으로는 문명 속에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랬는데 이 사람이 하는 말이 할머니가 계속 기도하자, 예수를 믿어라는 이야기를 하니까 이런 말을 합니다. “만약 그분(예수)이 진실이라면 만사를 내팽개치고 그분만 따르면 될 것이고, 그분이 진실이 아니고 거짓이라면 제게 남은 진실은 없으니까 그 분 조차 거짓이다.”라는 겁니다. “제게 남은 시간을 한껏 즐기고 살면 그만이죠. 못된 짓을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세상에 선, 악도 없다면 즐거움이라는 것은 못된 짓 말고 있겠어요?”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만약에 예수가 진실인지 아닌지를 목격할 수 있었다면, 나도 지금처럼 방황하고 살지는 않았을텐데…….”하며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통스러워합니다.

 

 그 순간에 할머니 머릿속이 순간 맑아졌다. “너는 내 아기로구나, 내 아이였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만집니다. 그러자 Misfit은 놀란 듯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권총으로 할머니의 가슴팍에 세 번 연속으로 쏩니다. 부하 둘이 돌아와 보니 할머니가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데 얼굴은 하늘을 보며 웃고 있었다는 겁니다. 부하가 “참 말이 많았죠. 그 할머니.”라고 하자, Misfit이 “누가 1분에 한 번씩 총으로 쏴줬다면, 좋은 여자로 살았을 텐데.”라고 하니 다시 부하는 “그거 진짜 재밌겠는데요.”라고 하자 Misfit이 “닥쳐! 진정한 즐거움이란 이 세상에 없어.”라고 말하며 이 소설이 끝납니다.

 

이 대목이 난해 하면서도 중요한 대목인데요. 이 짧은 단편소설이 미국에서 굉장히 논문으로 많이 쓰여졌고, 오코너 작가의 대표작품 중 하나인데요. ‘누가 1분에 한 번씩 총으로 쏴줬다면, 좋은 여자로 살았을 텐데.’ 이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 조용히 시키려고 했던 말이기 보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정신적으로 각성하고 좋아지는데 그것을 악당이 이 할머니에게서 보았다는 거죠. 만약에 누군가가 옆에서 총을 쏘아서 극한상황을 만들어줬다면 단편소설 속에서 이기적이고, 얌체고, 깍쟁이로 나왔던 이 할머니가 돌변하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진정한 즐거움이란 이 세상에 없어.’는 무슨 말인가 하면 원래는 이렇게 선악이 없고 진실이 없는 상황이라면 재미있는 것은 못된 짓 밖에 없다고 했는데, 못된 짓만 즐거운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에 와서 인생에는 못된 짓이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생에는 재미있는 것이 못된 짓 말고 더 있지 않겠냐는 것을 Misfit이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를 쏘고 난 Misfit이 흔들리고 있는 겁니다. 할머니는 Misfit의 총을 맞기 직전에 각성하고 이런 극적인 이야기가 벌어지는 것이 이 소설입니다. 이 소설이 대단히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는데, 오늘 영화와 많이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오코너 작가는 흔히 말하는 ‘남부 고딕의 창시자’, ‘기독교적 리얼리즘’ 등 여러 가지로 불리는데 본인은 저런 호칭을 모두 싫어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은총이 온다는 주제를 많이 다뤘는데요. 종교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은총이라는 말이 어떤 정신적 각성 또는 변화라고 생각해도 아무문제 없을 것 같아요. 말하자면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거죠.

 

그런데 어떤 극한 상황에서 그때만 사람이 바뀔 수 있다. 이런 모습을 긍정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소설을 썼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끔찍한 상황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게 고딕이라는 말이 기괴함 속에서 아름다운 면모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초월적인 진선미를 끔찍한 미, 폭력적 선, 어처구니없는 진실로 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런 것들이 잘 나타나는데, 오늘 영화와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광박, 광기, 기괴함, 폭력과 같은 요소들. 치과의사의 손가락을 뚫는다거나 그런 것 뿐만아니라 화상이 나서 얼굴이 일그러진다거나 살인마를 직면한 가족이 해체를 한다거나 그런 측면들은 대단히 오코너적인 것이고 가족 갈등에서 온 갈등도 오코너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입니다. 충격적인 과정을 거치며 각성하는 인물을 보여주는 것이 상당히 비슷한 것이죠.

 

딕슨이 화상 때문에 도로에 누워 있잖아요. 증거사진으로 안젤라가 화상을 입고 죽잖아요. 그 사진과 제가 볼 때 포즈가 같은 것 같아요.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와 공통점을 정리해서 간단히 핵심만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첫 번째는 ‘아기’라는 부분이죠. 할머니가 Misfit이 총구를 겨누고 있는데 아기 같다는 마음이 든 것이 굉장히 Misfit을 건드렸는데요. 그 바람에 총을 꺼내 쏘았죠. 오늘 영화에서 보면 오른쪽 사진에 서장이 이야기를 하다 기침을 콜록거리며 피를 토하죠. 그때 우리말 자막이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 “알아요.” 라고 이야기하고, “피에요.” 라고 이야기 합니다.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고 서장이 변명을 하잖아요. 그랬더니 밀드레드가 하는 말이 “알아요.” “피에요.” 라고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I know, baby. It’s blood.” ‘Baby’라는 말을 썼죠. 이게 사실은 자막을 달기 애매합니다. 서장과 연인 사이도 아닌데 갑자기 “알아요, 베이비”하면 이상하잖아요. 그게 정말 뜬금 없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조금 전에 본 소설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된다는 거죠. 갑자기 아기라는 단어가 왜 나왔는지. 아까 말씀드린 할머니가 Misfit에게 “너는 내 아기로구나. 내 아이였어”라고 말할 때 그때 어떤 마음으로 그랬던가하면, 할머니가 볼 때 Misfit이 그냥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살아온 이야기를 하거든요. 내가 봐도 당신에게 선한 면이 있고, 너가 나를 보니 당신과 같은 나쁜 면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자신의 어떤 동정심 그리고 범죄자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는 동료의식 이런 것들에서 오는 동정심과 슬픔과 동시에 사랑 이런 것들이 ‘아기’라는 말로 튀어나온 것 같아요.

 

그런 비슷한 것이 이 영화에서 아기라고 했는데 자막에서는 번역이 안 되다 것이죠. 이때부터 밀드레드가 서장에 대해서 분노를 넘어서 계속 밤을 세고 있어야하는데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동료, 인류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 다음 아기가 한 번 더 나오죠. 사슴보고 ‘안녕, 아가’하면서 “그래. 아직 안 잡혔어 어떻게 이러는지 모르겠네.” 이어 “세상에 신은 없고 무슨 죄를 짓든 상관없으니까?”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조금 전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의 내용과 같죠. 왜 아기가 나왔을까 생각해 봤는데, 여러 가지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과 많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뜬금없이 기저귀 광고가 나오고, 하필 기저귀 광고일까? 인류에 대한 깊은 동정심, 죄의식, 죄를 함께하는 공유의식 이런 것들, 물론 생명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다시 태어나는 의미도 있고요.

 

경찰서장이 두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데는 자기희생적인 죽음과 편지를 남긴 것이다. 으르렁 거리던 두 사람이 바뀌는데 영화에 종교적인 암시가 약간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것들을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첫 번째 전화 받을 때 나왔지만 부활절 시기에 광고판이 세워졌다는 것은 명백한 종교적 상징이죠. 오른쪽에 왜 하필 세 개의 광고판일까? 세 개의 십자가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너바너 앨범표지, 아스타르테

 

그리고 부활절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부활절이라는 것은 민속적인 축제와 기독교가 결합된 것인데요. 민속적인 것은 안젤라 방을 열 때 포스터가 있었죠. NIRVANA의 마지막 앨범 자켓이었고, 부활절 이스터(EASTER)의 원형이 되는 여신 아스타르테(아프로디테)고 상징이 늘 두 개를 가지고 다니는데 달걀바구니와 토끼를 몰고 다닙니다. 달걀은 잉태, 생명을 뜻하고 토끼는 다산을 상징하거든요. 토끼는 한 달만 뱃속에 있다가 태어나잖아요. 원래 의학적으로는 토끼가 석 달 후면 생식기능을 할 수 있거든요. 토끼는 생명력과 번식력 재생의 상징이죠. 겨울에 먹을 것이 잘 없고 하니까 동굴에 잘 있는데 그동안 번식을 합니다. 그래서 봄이 되면 새끼가 우르르 나오는 거죠. 사람들이 보면 기가 찬 거죠.

 

밀드레드가 무서운 표정인데도, 집에 보면 토끼 슬리퍼를 신고 있잖아요. 언밸런스이지만 명백하게 부활절의 상징을 보여준다. 그리고 슬리퍼를 보며 스스로 대화를 하죠. 그때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니, “내가 그놈들 꼭 잡아서 복수하겠어!”라고 합니다. 그것도 번역에서 아쉬운 점인데 원래 영어로는 “십자가에 매달렸어!”라고 합니다. 뜻으로는 잡겠어, 복수하겠다는 해석에 무리는 없지만 명백하게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과 엮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롬(Jerome)이라는 사람, 광고판이 없어지려는 찰나에 복사본을 들고 찾아오죠. 성 재롬(St.Jerome)이라는 기독교의 성인이죠. 성경을 번역한 사람인데 기록물의 수호성인 인거고, 하필 제롬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도 명백하게 종교의 상징 수 있다.

 

그래서 서장이 세 통의 편지를 보내는 동시에 딕슨에게서 일어나는 불이 결정적으로 두 사람을 바꾼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불이라는 것은 태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화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도 안젤라를 죽인 파괴의 불도 있었고, 딕슨이 광고판을 태운 불이 있었고, 그러나 딕슨을 태운 불은 정화하고 정신적으로 치유하는 불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딕슨만 치유되고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던 밀드레드도 치유되는 부분이 있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안젤라 사건 파일을 들고 나오면서 불에 타서 신음하는 모습을 보고 밀드레드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던진다고 했지만 너무 무모했죠. 사람이 전화를 받지 않고 화장실에 있었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딕슨이 불에 타서 나오는데도 안젤라의 파일을 가져나오는 것을 보고 안 그래도 미안했을 텐데 그 모습을 보고서 표정이 굉장히 바뀌죠. 그래서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안젤라의 죽음을 재현한 것이죠. 안젤라가 그때 당했던 고통을 자기가 한번 겪는 것과 같은 유사체험을 한 것이죠. 가해자 입장에 있다가 타인의 고통을 겪어 본 것이죠. 밀드레드도 그 앞까지는 자기 딸과 관련된 피해자 입장이었는데, 여기선 가해자가 된 것이죠. 밀드레드의 분노와 행동을 우리가 이해할 수는 있으나 분명히 그때는 가해자가 된 것이죠. 그랬을 때 오는 동료의식 단편소설에서 말한 것이 처절한 동료의식, 반성과 함께 딕슨과 밀드레드가 함께 바뀐 것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합니다.

 

서장의 세통의 편지가 있었죠. 하나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 하나는 밀드레드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딕슨은 총명한 사람은 아닌데 알아듣기 좋게 타일러주죠. 딕슨은 서장을 정말 좋아했던 것 같죠. 동료선배 이상으로 아버지 같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이 침착함을 낳고 생각을 낳는데, 너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영화에서 어떻게 보면 이야기가 사랑으로 가니까 뻔한 이야기 일 수도 있는데, 그것이 뻔하지 않게 영화가 진행되는 것은 오로지 감독과 배우의 좋은 연기, 각본, 드라마 였던 것 같아요. 이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거북하지 않게 진행이 잘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지막 저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대조해 보겠습니다. 아버지 같았던 서장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독백을 하는 거죠. 건물 구조도 재미있는 것이 광고회사랑 경찰서와 대립각이 짙게 마주보게 해서 길을 건너며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가는 거죠. 그때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본인이 생각할 때 서장을 기리는 방법은 일을 하는 것이고 좋은 경찰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사람을 돕는 것이다. 하면서 애들 때리고 2층에서 던져버리죠. 그랬는데 편지에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서장님이 생전에 다른 경찰동료가 왜 저 친구를 싸고도는가 했더니 “저 친구도 알고 보면 마음 깊은 곳은 좋은 사람이야.” 라고 합니다. 편지에 그 이야기를 또 반복을 하죠. 너도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이야. 사랑, 침착함, 생각, 증오로는 아무것도 해결 못한다는 메시지를 남긴 것이고, 하필 불의 충격과 세뇌를 받으며 이 편지를 읽으니까 학습효과가 대단히 컸다. 그래서 마지막 대사에서 잘 모르겠어, 가면서 결정하자고 하죠. 차분함, 침착함에 대한건 서장이 딕슨에게 한 말인데, 밀드레드에게 한 말은 아니지만 밀드레드도 마치 편지를 본 것처럼 이야기하고 딕슨도 동조해서 같이 생각해보자고 이야기하죠. 의심이 커질수록 인간성은 깊어진다. 이런 역설적인 면을 고통을 받으면서 두 사람이 성장해가는 그러면서 처음에는 분노와 폭력으로만 앞뒤안보고 실천하던 저 사람들이 서장이 보여준 인간의 다른 모습을 통해 사랑을 생각하고, 침착함과 생각을 하게 되며 변해가는 면모를 보이며 엔딩을 맞이하죠.

 

감독이 이야기하기를 이 영화는 해결책을 제시하기 보다는 사람이 어떤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하며, 폭력을 의심하고 인간성을 생각하는 결말 그렸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변화가능성과 변화의 힘든 역정을 그린 영화가 아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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