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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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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얼굴도둑> - 미메시스의 욕망 : 또 다른 자아 만들기2016-05-20
얼굴도둑 스틸컷


<얼굴도둑>-미메시스의 욕망: 또 다른 자아 만들기


* 강  연 : 이지훈 철학박사

* 장  소 : 영화의전당 소극장

* 일  시 : 2016. 05. 20 19:00


르네 지라르는 세계적인 학자로,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욕망은 모방적이다 라는 개념을 낸 것으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이 분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람의 이론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 ’솔로몬 재판‘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솔로몬 재판‘ 이야기는 아시다시피 매춘부가 같은 집에 살았는데 한 매춘부가 아들을 놓고 나서 다른 매춘부가 사흘 뒤에 아들을 낳았죠. 한 여인이 자다가 몸부림을 치다 아들을 깔아뭉개서 죽였죠. 그러고 나서 놀래서 생각한 거죠. 옆방에 가면 아이들이 있으니 바꿔치기를 했는데, 다음 날 아침 매춘부의 아들이 죽어 있고 자세히 보니까 자기 아들이 아니었던 거죠. 거기서 싸움이 시작되는데 여러분이 확인해야할 점이 무엇이냐 하면 왜 그렇게 아들문제로 남의 아들을 자기 아들이라고 까지 하면서 싸웠을까 이 부분입니다. 지금도 이해가 될 수 있는 부분인데 남성중심, 가부장적인 세계에서는 아들을 가졌다 안 가졌다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줍니다. 그 여인이 나중에 늙고 나서 일종의 사회 안전장치가 되는 거죠. 아들이 엄마를 모시고 엄마를 남성들의 세계로부터 막아주는 방어막이 되어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들을 잃은 못된 여자는 아들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부러웠던 것이고, 우쭐되는 그 사람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못마땅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자기아들이라고 우기기 시작해서 싸움이 끝이 안나니 그 유명한 ’솔로몬 재판‘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거기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다.”라고 착한 엄마가 이야기 하니 못된 엄마가 똑같이 그 말을 따라합니다. 여기서 모방이론의 중요한 점이 나오는데 상대방의 생각과 언어를 그대로 모방합니다. 이것을 ’거울효과‘라고도 이야기하며 언어를 모방하는 것이고, 그러자 솔로몬이 그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지 말고 나눠라.” 그러자 못된 엄마가 재깍 동의를 하죠.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제 남은 것은 아들이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가 하면 상대를 꺾고 이긴 것만이 남았다는 것이죠. 아이를 가지고 싸웠는데 지금 남은 것은 싸움만 남은 거죠. 이것이 ’모방이론‘에서 핵심적인 내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자기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델, 솔로몬의 재판에서는 아들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아들을 가진 사람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델로 채택이 된거죠. 모델이 중요한 것이고 그 모델을 꺾어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단계에 들어간다는 것이고, 경쟁적 폭력이 일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라르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욕망은 빌려온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대상이 있고, 대상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나 속성이 대단히 훌륭해서 내가 그것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일으킨다라고 나와 대상사이에 일대일의 관계를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르네 지라르는 그런 생각이 잘 못 된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르네 지라르는 중요한 것은 나와 대상의 관계가 아니라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델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나도 모르게 그것을 욕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라르의 욕망이론의 핵심은 욕망은 내가 일으킨 다기 보다 다른 사람에 의해 촉발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된 엄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단히 보편적인 현상이고 이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인류문명이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자연발생적인 욕망은 없다. 그리고 대상은 외부 매개자 이상적인 모델 제3자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니까 일대일 관계는 직선적인 것이라면 실제로는 한사람을 거쳐서 오는 거잖아요. 이상적인 모델을 따라하는 것이니까. 이게 삼각형을 만든다는 거죠. ’욕망 삼각형‘이 만들어 지는데, 이 삼각형이야 말로 인류 문화에 어떤 뿌리가 되는 것이다. 정신병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혹은 쇼핑중독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이고 사실 인류문화는 모방에 의해 발달해 왔다는 것이죠. 어린이들에게도 모방이라는 것이 학습의 기본이잖아요. 그리고 자아정체성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라르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모방이 좋은 면도 있지만 이것이 심해지면 폭력을 나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욕망은 형이상학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형이상학적이라는 말은 어렵지만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욕망은 정신적이라는 것이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보더라도 주인공이 재산이든 악기든 뭐든 다 주잖아요. 이 사람이 누군가를 따라한다고 했을 때 돈이 핵심이 아닌 거죠. 그런 의미에서 물질적인 부분을 넘어서는 것이 있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형이상학적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라르가 볼 때는 이상적인 모델을 모방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욕망이 중요한 욕망이라는 것이죠. 만약에 어떤 실용적 가치, 물질적 가치에 한정되어있는 욕망은 욕구라고 부르죠. 그래서 대상이 실제적으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분해서 나누자면 모방욕망은 두 가지가 있다. 모방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델 사이의 거리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요, 굉장히 멀 때는 외적매개라고 하고, 굉장히 가까울 때는 내적매개라고 합니다. 이 차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외적매개라는 것은 어떤 단계인가하면, 모델이 모방자가 사는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때 외적매개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어떤 기독교인이 예수의 삶을 따라가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이것은 외적매개입니다. 내가 사는 세계와 예수가 사는 세계의 차원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똑같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병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코스프레 같은 거 있잖아요, 어떤 만화캐릭터를 흉내 내는 사람도 마찬가지죠. 만화 캐릭터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맞지만, 만화캐릭터와 자기가 사는 세상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병자죠. 그런 이야기인데, 이때는 갈등이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나와 모델간의 갈등이 없고 내가 누구를 흉내 낸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그것으로 경쟁해서 칼부림 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죠. 저마다 각자 모방하고 즐겁게 살면 되는 것이고 굉장히 유희적입니다. 이때는 대상의 대체가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오늘은 A 캐릭터를 흉내 낼 수 있고, 내일은 A 캐릭터의 지팡이를 들고 흉내를 냈다가 다른 것을 가지고 흉내를 낼 수도 있고요. 지라르 같은 경우에는 문학에서 대표적으로 두 가지 예를 드는 것이 하나는 ‘돈키호테’ 이고, 하나는 ‘마담 보바리’입니다. ‘돈키호테’는 어떤 사람이냐면 어릴 때부터 중세 기사도 소설을 많이 읽고 자란사람이죠. 그래서 약간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이죠. 우리로 치면 무협지를 너무 많이 본 사람. 그런데 돈키호테의 경우 별로 심각한 갈등이 없죠. 자기랑 중세기사가 사는 시대도 다르고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일어날 건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사람이 기사를 흉내를 내는데 다른 사람이 뭐라고 심하게 나만 그 기사를 흉내내야 하는 이상한 사람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큰 문제가 없으며, 보는 사람도 즐겁고 하는 사람도 즐겁고 그런게 유쾌한 소설이라는 거죠. 마담 보바리는 약간 깊어지지만 비슷합니다. 마담 보바리 부인은 어떤가하면 우리로 치면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본 분이죠. 그래서 하이틴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여자주인공처럼 예쁜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가서 춤을 추고 소비를 많이 하는 삶을 어릴 때부터 꿈꾸다가 나이가 들어 실연을 해 보고자 애를 쓰는 사람인거죠, 이런 경우 갈등이 없고, 유쾌합니다. 마담 보바리가 끝에는 비극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 비극은 정신적 비극보다 카드빚을 갚지 못해 일어나는 현실적인 비참함 또는 우리의 소비문화와 같은 겁니다. 그러나 나중에 말씀드릴 내적매개의 경우 이야기가 심각해집니다.


내적매개는 심각하다. 왜냐하면 아까는 세 가지가 다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나와 모방자와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델이 사는 세계, 이 세 개가 다르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여기서는 자기가 같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도 그와 같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기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종교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외적매개의 경우 예수의 삶을 모방하고 싶고 따라하고 싶다는 단계라면 내적매개에서는 내가 예수다 이런 단계입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심각해지는 겁니다. 이 단계에서는 모방자와 모델 사이에 경쟁과 갈등이 일어나고요. 여기서 지라르가 말하는 중요한 점은 이런 것입니다. 모방욕망은 인류의 보편적인 것인데 모방욕망이 자칫하면 폭력이 발생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폭력이 왜 발생하는가 하면 나와 모델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나고 그리고 이것이 전염이 됩니다. 내가 볼 때 택도 아닌 네가 모델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나도 같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전염되면서 전체 공동체로 확산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외적매개에서는 존경심만 있었다면 내적매개에서는 경쟁심이 공존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울효과, 전염효과가 일어나고요, 그리고 모방자가 모델을 넘어서려고 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예수다!”라고 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예수보다는 조금 다른 무언가를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뭔가 더 낫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애를 쓰죠. 영화에서 본다면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원래 음악가가 가지지 못한 게 뭡니까? 아버지의 역할이죠. 근데 모방을 단순하게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새로운 것을 넘어서려고 시도합니다. 그리고 이제 대상은 대체가 불가능 합니다. 대상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재판에서 엄마들이 싸운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이 죽어도 상대를 이기면 된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 대상을 포기 못하는 이유는 그 대상을 이겨야하기 때문입니다. 모방자와 모델 사이의 싸움만 남은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곁들여 말씀드리면, 외적매개에서 내적매개로 넘어갈 때 중요한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것 중에 ‘무관심’이 있습니다. 무관시은 자기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무관심일 때 오히려 이것이 그 사람을 더욱 좋아하면서도 미워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델에 대한 존경과 경쟁심이 생김과 동시에 자기에 대해서는 경멸감이 더 깊어지거든요. 여기서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까 영화에서는 음악가와 비서 사이에 이런 부분이 함축이 되어 있었습니다. 모방자가 변화를 일으키는 겁니다. 처음 5-6명 정도를 흉내 낼 때는 외적매개였어요. 유희적 이였고, 즐거웠습니다. 그랬는데 내적매개 단계에 들어가면서 아들의 엄마가 가짜라는 것을 못 알아봤잖아요, 그게 결정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라르 이론의 하이라이트 단계에 들어가는데요, 내적매개 단계에서는 경쟁이 과열되고 그 경쟁 속에 폭력이 일어나고 폭력이 무엇으로 해결되는가 하니 모델을 죽이는 쪽으로 보통 해결이 많이 됩니다. 모델이 죽으면 문제가 깨끗해지잖아요. 이때 죽는 존재를 희생양이라고 하는데요, 순서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차이가 소멸하는 겁니다. 나와 모델이 같다는 생각의 차이가 없어지기 시작하고, 그러면 경쟁적 폭력이 발생하는 겁니다. 경쟁적인 폭력이 발생하면 전염이 되기 시작합니다. 온 공동체가 하나의 모델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모델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욕망을 가질 수 있는 거죠. 그렇게 진행되면 만장일치로 존경하는 모델을 죽여 버릴 수 있는 겁니다.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역사상 정말 자주 일어났다는 겁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희생양이 죽으면 좋은 점도 있습니다. 공동체의 평화가 찾아오고 내부에서 단결을 합니다. 우리가 외적과 싸울 때 내부가 단결하잖아요. 그런 효과가 일어나는 것이죠. 외적과 싸웠다는 자체에서 한 집단이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희생물을 죽여 놓고 죽일 때는 나쁜 놈이라며 모든 죄는 너에게 있다며 다 덮어 씌워놓고 죽이고, 내부에서는 단결하면서 그 희생양을 신성화 시킵니다. 예를 들어 한 마을에 이방인이 찾아왔는데 갑자기 없던 전염병이 생긴 겁니다. 이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공동체가 위생적이지 못하고 불결해서 그런 건데 이유를 자기들 속에서 찾지 않고 이방인에게서 찾는 겁니다. 혹은 그 마을에 사는 약한 사람에게서 찾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죄를 덮어 씌워서 죽여 버립니다. 죽인다음에는 그 사람이 죽고 나니 평화가 찾아오고 병이 나았다며 그 사람이 신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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